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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대의 어르신 법정스님/출처 국내기사참고

LEE MIN YOUNG 2010. 3. 15. 19:42

기사출처보기,http://media.daum.net/culture/religion/view.html?cateid=100028&newsid=20100315192106398&p=yonhap

 

법정스님 다비식]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듯 가셨다” [서울신문]"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듯 가셨다." 법정 스님과 30년 넘는 인연의 끈을 이어온 윤형두(75) 범우사대표는 14일 관악에 올랐다. 스님에게 "잘 가시라."란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울컥하는 마음이 가슴 밑바닥을 치며 올라왔지만 애써 눈물을 꾹꾹 눌렀다. 스님의 성품을 워낙 잘 알기 때문이다. ●"책 내기 어렵던 깐깐한 저자" 윤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평소 스님은 '사람이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생기는 것이요, 사람이 죽는 것은 그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 말처럼 그렇게 가셨다."며 말끝을 흐렸다. 윤 대표와 법정 스님의 인연은 잘 알려진 대로 산문집 '무소유가 맺어줬다. '범우 에세이 문고' 시리즈를 내고 있던 윤 대표는 1976년, 당시 서서히 문명(文名)을 알려가던 스님을 처음 만났다. '무소유' 출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첫 인상은 상당히 깐깐한 모습이셨습니다. 선천적인 것으로 보일 정도로 솔직하셨고, 쉽게 타협하지도 않았고, 실없는 우스개를 하지도 않으셨죠." 윤 대표는 "책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던 저자"라고 스님과의 첫 대면을 회고했다. "책 제목을 정하기 위해 출판회의를 처음 가졌는데 당신이 미리 생각해 온 '무소유'라는 제목을 꺼내놓으시더라고요. 편집자가 (조금 어렵다며) 다른 제목도 생각해 보자고 했지만 스님은 끝까지 '무소유'를 굽히지 않으셨지요." ●인세로 어려운 학생 장학금 지원 인세(印稅) 문제만 해도 그랬다. 원고료를 한꺼번에 주기로 하고 책을 만들었던 터라, 출판사로서는 따로 스님에게 인세를 줄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느닷없이 "좋은 데 쓰려 한다."며 인세를 요구했다. "무슨 스님이 돈을 밝히나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10% 인세를 드리기로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인세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셨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행을 단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내 생색낸 적이 없다는 윤 대표는 스님의 이런 '숨은 나눔'이 불교계뿐 아니라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끌어낸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는 "경허 스님 등 위대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민중을 위해 불심을 심고 대중적 사랑을 받은 스님은 만해 한용운 성철 큰스님, 법정 스님 정도였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비식에 모여든 것만 봐도 법정 스님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돌이켜 보면 스님은 '무소유'라는 수필 한 편에 자신의 평생 삶을 건 게 아닌가 싶어요. 무소유에서 말씀하신 삶을 살아오셨고, 돌아갈 때까지 그 끈을 놓지 않으셨으니까요."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탐욕의 시대… 청빈의 삶 실천한 '영혼의 스승' 강원도 산골서 혼자 살며 '영롱한 글'로 대중과 소통 "내 것이라고 남은 게 있으면 맑은 사회 구현에 써달라" 관련이슈 : '무소유' 삶 남기고… 법정스님 입적 20100311004252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은 종교를 넘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오두막에서 자연을 지키며 청빈한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호소하는 글을 통해 영혼을 정화시킨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으며 ‘무소유’ 정신을 실천한 ‘영혼의 스승’이었다. 스님은 그 흔한 사찰 주지 한번 지내지 않는 등 일체의 오용락을 멀리했지만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맡아 대중 법문만은 멈추지 않았다. ◇2008년 10월 법정 스님(가운데)이 설법을 위해 길상사 거처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삶과 죽음을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나서다=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한다. 전남대 상대 재학 중이던 54년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 그는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오대산의 절을 향해 떠난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출가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하며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지낸 박완일 법사와 함께 공부했다. 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스승인 효봉 스님은 법정 스님을 “천생 중”이라고 하며 매우 아꼈다고 전해진다.

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장준하·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스님은 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과 자책을 느낀 후 걸망을 짊어지며 본래 수행승의 자리로 돌아간다.

스님은 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이 무렵인 76년 발간된 저서가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산문집 ‘무소유’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의 등쌀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그곳은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조문하는 불자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의 법구가 안치된 서울 성북동 길상사 설법전 분향소에 불자들의 조문이 밤새 이어졌다.
이제원 기자
◆오두막에서 전파한 진정한 부와 행복에 이르는 법=병세가 나빠 지난해 겨울 제주도에서 요양했던 법정 스님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최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입원 중에도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은둔자의 삶을 살며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청빈을 실천했던 스님은 주옥 같은 산문으로 맑은 정신을 풀어내며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남겼다. 마지막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2008)에서 “내 삶을 이루는 소박한 행복 세 가지는 스승이자 벗인 책 몇 권, 나의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 그리고 오두막 옆 개울물 길어다 마시는 차 한 잔”이라고 말한 스님은 “늘 모자랄까봐 미리 준비해 쌓아 두는 마음이 곧 결핍”이라고 일깨웠다.

법정 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특히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1999년 별세) 할머니로부터 고급 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 터 7000여평을 시주받아 97년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했다. 그리고 스님은 2003년까지 길상사의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 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주며 시대의 잘못을 꾸짖고 고단한 대중들을 위로했다.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94년부터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환경보호와 생명사랑 운동을 이끌었다.

◆마지막 길까지 놓지 않은 ‘무소유’ 정신=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에서 스님의 평생의 삶이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이라면서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는 향기로운 글을 남겼다.

산문집은 물론 수많은 법문집과 경전 번역서, 여행서 등을 저술한 스님은 대중을 위한 산문과 수행자를 위한 법문 사이의 경계를 없애며 탐욕의 시대, 마음의 등불을 밝혔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라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겸손해 했다.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은 생전과 다름없었다. 그는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 달라”고 당부했다. 또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스님의 유지에 따라 송광사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거행하지 않기로 했다.

스님의 저서로는 ‘무소유’ 이외에도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버리고 떠나기’, ‘홀로 사는 즐거움’, ‘오두막 편지’ 등 산문집과 법문집 등 50여권이 있다.

김은진 기자

■법정 스님 주요 연표
1932년10월8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출생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선사를 은사로 입산출가
1959년 3월15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 수계
1959년 4월15일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화상을 강주로 대교과졸업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 출간
1976년 대표 저서인 ‘무소유’ 출간
1984∼1987년 송광사 수련원 원장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홀로 수행정진
1993년10월10일 프랑스 최초의 한국 사찰인 파리 길상사 개원
1994년 1월1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창립
2003년12월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회주에서 스스로 물러남
2010년 3월11일 길상사에서 법랍 55세, 세수 78세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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