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 역사실

[스크랩] 광주이씨(자성이족.칠원이족, 회안이족)의 연원과 이동경로, 시조 이자성 기록

LEE MIN YOUNG 2018. 11. 22. 14:33

광주이씨(자성이족.칠원이족, 회안이족)의 연원과 이동경로, 시조 이자성 기록

-광주이씨.칠원회안이씨의 自成李族 이동경로 세거지 (기원전 분황사 서라벌서남부

-칠토국 咸安일대-畿內와 염현등 한강수계 회안)



1.상고, 原三國시대-
기원전 서라벌(성읍국가,城邑國家) 인근에서 마을의 우두머리로 자성을 선출하여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원래 북방계의 철기족으로 남하하여 서러벌에 정착하여 일대에 영향을 미치다
서라벌은 북방민족의 남하, 왜 가야와의 통교를 통하여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철기족 정착.왜와 가야통교->금관가야등 병합(왜,가야문명)
 중국 백제 고구려와 교역(삼국통일기반완성)


분항사 인근의 읍락촌에서  이룬 집단마을 체제로 당시의 촌주(수장)는 自成이다.
원래 서라벌은 기원후에 이르러 20여개의 집단마을 연맹의 성읍국가였으며
남쪽과 서북쪽의 지역을 확대하여 연맹국가를 이루어 갔다
自成 李族을 포함한 촌주(이사금)들은  처음 박혁거세를, 동에서 온 석탈해 등을 뽑아
서라벌 일대를 통치하는 부족장(왕)으로 옹립하였다 
당시의 집단 촌주 들의 호칭이 이사금으로 이사금들이 모여서 서라벌 체제를 주도한다.
이사금체제는  朴昔金과 6村의 9개 集團 촌주를 포함하여
수십여개의 邑落集團 體制로 이루어진 城邑 國家가 고대 신라 모습이다.
서라벌 초기 집단이 이사금집단 연명체이다, 만장일치 회의(화백)를 통해서 결정한다.



  『최초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출발했는데,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서기전 57년이라 했으나, 성읍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빨랐을 개연성이 크다.

그것은 신라 역시 금속문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차차 부족장의 권한이 강화된 결과 성읍국가가 출현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경주지역으로의 금속문화의 유입은 서기전 1세기보다 몇 세기 일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속기의 사용은 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농업생산력의 일정한 발전과 외부로부터의 강한 자극이 없이는 국가 수준의 정치체를 성취할 수 없다.

이처럼 생각할 때 서기전 2세기 말에 발생한 고조선의 멸망과 이에 따른 주민 이동,

특히 남한지역에 삼한사회가 성립되는 세력 재편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성읍국가로서의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급량(及梁)·사량(沙梁)·본피(本彼)·모량(牟梁, 혹은 漸梁)·

한기(漢岐, 혹은 漢祉)·습비(習比) 등 여섯 씨족의 후예들로 구성된 것 같다.

이들은 처음 평야 주위의 산이나 구릉지대에서 취락생활을 하다가,

점차 평야지대로 생활권을 옮기는 과정에서 국가 형성의 길이 열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된 것이 급량 출신인 혁거세(赫居世, 일명 弗矩內)였으며,

그는 사량 출신의 알영(閼英)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처음 신라는 여섯 씨족 가운데

급량과 사량의 두 씨족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두 씨족은 후에 성씨제가 도입되었을 때 각기 박씨·김씨를 칭하였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쪽으로부터 진출해온 탈해(脫解) 영도하의 새로운 세력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역사서에는 이를 석씨(昔氏)라 칭하고 있다. 다만 탈해 집단은

부족적인 기반이 미약했으므로 곧 종래의 지배층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런데 2세기 후반에 탈해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새로운 세력집단이 다시

경주로 진출해 신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 즈음에 신라는 연합이나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 진한(辰韓)의 여러 성읍국가를 망라해 보다 확대된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종전의 점(點)에 불과하던 성읍국가로부터 일정한 영역·영토를 가진 연맹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는데, 주변국가들에 대한 지배·복속관계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신라에 복속한 국가들 중에는 수도 금성(金城)을 침입하거나

또한 토착세력의 거수(渠帥)들 가운데는 중국 군현과 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상태는 3세기말경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경주일대 왕릉급 무덤에서 지방의 이사금 또는 성읍국 통치자임을 나타내는

『이소지왕』 명문을  발견, 고대 서라벌이 9족장이 아닌 수십여개 족의

집단의 성읍국가임을 나타내고 서라벌의 신라가 박석금과 6촌의 연맹이 아닌,

다수 집단의 연명체라는 것이 통설이다)




2.. 奈勿王대, 內史令 자성李族시대



서라벌 회백회의는 읍락집단의 이사금 중에서 강한 촌주 (이사금)을 추천하여

왕을 선발하다가, 내물왕대에 이르러 내물족의 이사금을

간으로 옹립, 중앙집권 체제의 전제제를 완비하다, 이가 내물 마립간(내물왕)이다.

중국으로부터 신 문물을 받아들이고, 국토를 확장하고, 고구려 왜와 통교하다,

자성은 내물왕대에 내부의 내사를 관리하다(내사령).

이후, 내물왕의 직계-김씨왕 옹립에 기여하다,

실성 다음, 내물왕의 직계인 눌지를 옹립하다.



『그런데 내물왕(356∼401) 때부터 사용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고처(高處)의 지배자〔干〕

혹은 최고의 지배자라는 의미 그대로 종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권력자의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성읍국가의 지배자인 간(干)들을 거느리면서 그 뒤에 군림하는 군왕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따라서 이 연맹왕국 시대는 왕호를 따서 ‘마립간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대에 들어오면 종래의 박·석·김 3성에 의한 교립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다.

 특히 5세기 중에는 왕위의 부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예방하였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내물마립간 때에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중국 북조(北朝)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사신은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았다.

특히, 382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衛頭)는 전진의 왕 부견(苻堅)의 “경(卿)이 말한 해동(海東)의

 사정이 예와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가 당당한 정복국가로 비약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 광개토왕의 능비문(陵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의 보기(步騎) 5만명이 신라의 국경지대로 출동해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그 뒤 신라의 왕위계승에 개입하는 등 자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427년(장수왕 15)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적극 추진하자,

신라는 눌지마립간 때부터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433년에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3. 가야지역에『포상 8국의 난』이 일어나자 가야가 지원을 요청하다

『내해 이사금』은 태자, 왕자등 자성 이족등을 보내

『포상 8국의 난』을 평정하고 (김해 창원등과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영향력을 확대하다 자성이족등이 통제하다.(가야 일부지역이 평정된 후에)

이후 신라는 ,군대를 보내서 가야 지역을, 전부 평정하다,.



4.柒浦國 칠토國의 城伯時代

 가야함안 『 칠포 칠토 칠제국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의 

일대를 지배하는 성백이 된다(성주) 자성 이족들이 무리지어

이곳에서 통일신라 말까지 거주하다. 칠토국은

신라 상층부(자성이족)가 다스리는 지역이 된다.



즉, 왕권 옹립과 가야 지역의 칠포국을

정벌한 공으로, 그 지역의 성백을  세습하여, 이 일대가 자성이족의 호족세력이

된 것이다.



『 가야시대 낙동강 하류 및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일대에 있던 8개의 소국.
8국의 이름은 다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물계자전(勿稽子傳)에 보이는 골포국(骨浦國 : 지금의 昌原 또는 馬山), 칠포국(柒浦國 : 지금의 咸安郡 漆原), 고사포국(古史浦國 : 지금의 鎭海 또는 固城), 그리고 《삼국유사》 권5 물계자전에 나오는 사물국(史勿國 : 지금의 泗川), 고자국(古自國 : 지금의 固城, 고사포국과 동일지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보라국(保羅國 : 위치 미상) 등이 이에 속한다.

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8국이 가라(加羅)를 침략하려고 꾀하매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이 6부(六部)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잡아간 6,000명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이 때의 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국역삼국사기』(이병도, 을유문화사, 1977)「복원가야사」 상(천관우, 『문학과 지성』 28, 1977)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4세기에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 등에 의해 타격을 입어 중계무역의 주요 루트가 끊겼다는 점입니다. 고대 상업권은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서로 차지하려고 무단히 애쓰던 대동강이 중계무역권이었습니다. 그 중계무역권을 장악하던 가야는 주요 무역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백제 및 왜와 연결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죠.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중계무역의 타격이 커지자 거제도 등 남해 지방에 있었던 8개의 소국들이 금관 가야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8개 소국들을 통칭하여 포상 8국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왜와 연결하여 무역경쟁국인 신라를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가 위로는 아라 가야로부터 아래로는 포상 8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게되자 201년에 신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죠. 결국 금관 가야는 신라의 도움으로 6 가야의 맹주국 위치를 다시 찾고, 포상 8국의 독립 의지를 꺽고자 하였던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김해 지방에 군사를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라가 김해 지역에 진출하려면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와서 장산국이 있는 해운대를 거쳐서 김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산국은 포상 8국과 연계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습니다. 이러한 장산국을 그대로 놔두고 신라군이 김해로 진출하면 중간에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장산국은 장산의 정상 부근에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죠. .

  따라서 신라군은 장산국 정벌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신라는 어느 해 가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기장에서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는 사신을 장산국에 보내서 감사의 선물을 바치고 물러갔죠. 이러한 군사 훈련을 매년 가을마다 수행하자 어느덧 장산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갑자기 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산국을 기습하여서 멸망시켰습니다.   209년 7월에는 포상 8국이 금관 가야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라는 내해왕이 태자를 중심으로 대병을 파견하여 금관 가야를 도왔습니다, 이때 잡힌 포로가 6천명에 이르렸다고 하니 이 전쟁도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을 가르켜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상 8국의 난이 평정된 후의 금관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가야 연맹은 점차 쇠약해지게 되었죠.』


5.톨일신라시대의 자성이족

--신라 왕제의 확립(군린 용수)에 기여하다



6.통일신라시대의 문예 부흥, 대당교역.외교등에 힘쓰다

   (동이)
-우리 자성이족은 칠토 칠제국의 일대 (김해 창원북부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에서

-집단으로  일가를 이루며 살다



7.통일신라 말기-지방 호족 시대

-통일신라초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9주 5소경을 두어 다스렸으나

후기에 이르러 농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지방은 호족들이나 지방무장세력이 반기하여

군웅할거하는 혼란기가 도래하니

이것이 견휜 궁예 양길 기훤등의 후삼국과 지방호족이 난립된 한반도의 상황이다

-지방 호족들이 각자 나라라고 칭하며 봉기하기도하고, 가병을 모으고 치정을 담당하다

  자성이족도 칠원일대에서 강세하다

-평주, 송악, 철원,명자성,명주, 국원, 충주, 사벌주,

-죽주, 완산주,청해진,창원,공산,나주, 김해 (칠제등지)일대에서


『7세기 말부터 시작된 신라의 번영은 8세기 후반에 들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780년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고, 809년 김언승이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에 오르는 등 진골 귀족간의 내분으로 왕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무열왕의 직계후손이 왕위를 차지하던 왕위계승의 전통은 혜공왕대에서 끝나고, 785년 원성왕의 등장으로 그의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신라는 이후 150년간 20여 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을 겪으며 왕권과 사회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러한 불안한 정국 속에서 무열왕의 후손인 웅주도독 김헌창은 822년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으며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어서 청해진을 지키던 장보고도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세력을 키운 호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촌주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나, 중앙에서 내려온 진골 귀족, 해상세력, 군사세력 등 출신도 다양했다. 이들은 일반 농민보다 우월한 경제력을 앞세워 성과 군대를 거느리며 반독립적인 소왕국을 건설했다.

이 시기 사회 변화에 가장 앞장섰던 계층은 골품제도에 큰 불만을 품었던 6두품들이었다. 관직 승진 등에서 큰 제약을 받았던 6두품 출신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는 개혁을 요구했지만 중앙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말았다. 결국 이들 6두품 지식인들은 호족세력과 연합하기 시작했다.』



8. 한반도는

각지에서 영웅호걸들이 봉기하고 후백제 후고구려 등 10여 개의 분국이 난립되어

통일 신라의 통치영역은 사실상 옛 서라벌의 소국으로 전락하다.


신라는 9주 5소경에 의한 통치가 무너지고 각지의 호족들이 봉기하고 이어서

궁예 왕건의 태봉마진의 후고구려, 진현 기현등의 후백제의 침공을 자주 받다,

후백제군에 의해 경애왕이 죽고, 경순왕이 오르다 경순왕은 후백제에 의하여 통제를 받다,

신라 북부와 서부는 대부분 봉기한 지역의 호족과 후고구려 후백제. 세력권이되고

나중에는 지방호족들도 독립을 이루거나 강한 후고구려,. 후백제의

예하로 귀속 되어가다.

후백제 잦은 침공과 섭정으로 경순왕은 왕건에게 귀부의사를 밝히다


자성 이족들과 태자, 왕자 김일, 일부 친서라벌 왕국의 호족,

성주의 호족장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등등은 이에 반발하고 계속 고려군에 항거하다.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두 왕자는 양국(讓國) 반대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태자(太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며, 둘째아들 황(굉,나주김씨)
왕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8.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자성이족 이한희 공, 일부 친서라벌 호족,

궁예 왕건에 불만이 많는 호족, 지방 군벌들이  이에 항거하다

  자성이족들은 함안김해 창원북부일대 (창원북부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

신라서남부에서 항거하였다.

왕건의 군대와 대치하다 몇달인지 모르나 증강된 고려군에 의해 성이 함락되다



9. 성이  함락 당한 자성이족은 수장(호족장) 이한희 이사금과,

이를 따르는 무리들과

기타 봉기한 호족 세력들과 .

  경순왕의 항복 대열에 이어서, 저항세력과 함께 북상하다.

  (후 명칭 칠원성 (柒浦, 칠토현,漆吐縣, 칠제현(漆隄縣) 창원북부,김해일대)성을

   함락당한 자성 이족은 신라

   부흥군과 함께(부흥군, 경순왕 호송의 일부의 군대 세력, 태자, 왕자와 이순유세력)

   북상하다.

--한편 항복 교서를 왕건에게 바친 경순왕은 신료,왕자, 부인, 귀족, 호위군사, 백성들과

함께 북상하다.

--북상대열은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리길(12키로미터)이 되다, 1000여필이다  

--대열의 신라 인원은 합하여 3만에 이르다.



『고려 귀순 후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또 태조 왕건은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 하고, 시호는 효목(孝穆)이라 했다.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도 아내로 삼게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왕건은 딸을 경순왕과 결혼시키다, 식음과 녹봉을 주고 위무하다



『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10.자성이족과 경순왕항복 호종세력, 기내의 봉기세력들은

   기내 회안 일대에 거주하며, 신라 부흥( 3갈래-궁예를 따른 세력, 친신라

세력,경순왕 태자세력) 봉기를 이어가다

     일부는 태자를 따라서, 강릉 명주 인제등지에서 독립하여 항거하다

     (당시 경순왕을 따라온 무리, 태자, 황자, 이순유, 자성이족등)

--왕건이 죽다,이후 정종 광종 경종등이 이어가다

--경순왕이 개성에서 죽다 ,고려 경종대

--경순왕을 따르며 개경과 기내에 거주하던  신라 사람들이 경순왕의 무덤을 서라벌에

   묻어야한다면서 시신을 모시고, 서라벌의 장례길에 나서자,

   고려의 수도 개경이 텅텅 비다. 장례행렬이 기내를 벗어나려하자. 황급히

--이에 놀란 고려 왕조는 100리길 불가 칙서와 대군을 보내다. 연천에 강제로 묻히다

    (신라유민들이 봉분을 쌓고 표하다)

--고려왕조는 지속하여 기내외 기외의 신라부흥세력과 지방호족을 위무하면서

   결혼정책으로 또는 무력으로 전부 평정하다

             (고려사. 삼국유사. 이제가기)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978년(고려 경종 3)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였다.[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되었다 』

.


10.기내 이주후, 신라유민들과  부흥 운동 실패한  자성이족 이한희 이사금의 무리들은,

이때부터 다른 무리의 신라 사람들과 함께,

畿內 회안일대 (염현, 용인 이천등 당시의 한산주 일대)에 정착하게 되다.

고려는 신라 서라벌을 경주(동경)으로 개칭하다,



11. 이족들은 모여서 조상을 기리다 (회안일대)

--멀리 신라에서 발흥한 역사와 이주의 내력을

팔면비석에 새기고, 비석으로 세워, 신전과 제단을 세우다

--선조를 기리다(매년 10월과 3월에 전 종족이 전부 모여서 제사를 지내다)

--제단의 위치는 상고할 수가 없으나 염현으로 보아,

예성강 한강의 수계 연안, 개경의 인근 또는 용인, 이천 일대로 여겨짐



12. 고려군부가 지방 호족등 잔존독립세력을  평정하고, 기내 신라 부흥세력도 위무,

전국을 완전 통제하다, 건국후 100년이 지난 뒤이다,고려 성종조

   (후백제 후고구려 멸망, 봉기세력 고려 귀부)



13.高麗朝 安定으로, 회안의 자성李族은 (畿內 즉,

회안일대에서) 身分이 정향(회안으로) 이속(문호공 신도비명, 박상 기록) 되다.


--신분이 강계되다.


--서라벌 함안의 칠포, 칠토,창원북부, 가라국이  칠원현으로 개칭 되다,

   후에 고려중기에 사람들이 부르기를, 너희들은 본이 어디냐 어디서 왔느냐 물으니

"우리는 칠원에서 왔으므로, 칠원 이족이라고 하다.

--일부는 역리가 되다.

--일부는 아전이 되다.

--회안일대에서 세거하며 주거를 이루다.

    (이때에 기내와 강원 일대에 서라벌에서 이주한 신라 사람들이 살게되다)

--자성李족,칠원李족의 수장豪族長(니사금 임금 마마 간,님금의 諱 군린 , 마마의 諱 용수, 마마의 諱 한희, 마마의 諱 방린)호칭에서  戶長의 호칭인

   諱 향임 당임 존임(어르신, 나리.사군, 백)님으로, 되다(호칭하다).

(栗亭 世傳草譜)

   일부는 역리로 이속되다.



14. 무신정권시대인 고려 중말기이후에야, 身分이 상승(高麗 中期)하다,

민망히 여긴 담로한 대신들이(고종) 광릉 삼익. 삼현

--무신정권이 등장하여 王權이 弱化되고, 地方 豪族長 時代 되다

--민망한 고려 대신, 담로(지방 호족장)들이

자성이족-칠원 李族을 승계시키다.



15.고려말, 원나라 간섭시대로 왕권이 약화되고, 호족등이 지방을 통제하고

     (자성이족은 이른바 광릉시대 회안이씨의 후기시대)
 고종 高宗 충헌 忠憲 안효대왕 安孝大王 철 皞 홍릉 洪陵 1213년~1259년   
1259년~1269년

  --호족들의 자제들이 주정 학문을 배우고, 두터워진  신진 사류들이

  --중앙 정계에 전면에 등장, 중앙정부를 장악하다, 자성이족도 이에 이르고,

  -- 출사에 이르다.


-가야 나라의 칠원현은 그 뒤, 창원부로 복속, 없어졌고,

조선왕조 開國後에

주군현제도 개편으로, 다시 칠원현漆原縣이 獨立되다.


*마의 태자라는 명칭은 1930년 이광수 소설에서 유래, 사기에 마의 태자는 없다.

*칠원은 고려 태조가 가야지역 일대 칠토등을  칠원이라고 개칭해서 부름.

*이후 없어졌다가 조선조 초기에 칠원현으로 칠원으로 복원


.....................


첨부, 참고자료
『휴징, 필행의 선세사적』,

『통판공과 율정공의 세전초보』,

『좌찬성 휘 우생의 묘지명』,

              『조종운, 씨족원류고』,

『문호공비문』,

『이이만가의 세전초보』,

『복암가장초보』,

『정곤수 광주이씨 선대도』.       

『이명징가의 광이 선대도』

『삼국유사』.

『삼국사기』,

『 고려사』,

『칠원읍지』,

『송악지』,

『이제가기』,

『후고구려기』

『세종실록지리지』

『신라부흥운동』『신라 멸망 직후 부흥운동 소고』

........................

고려국 황제

역대 국왕 목록
 대수

묘호

시호

능호

재위

비고


원·명에서 내린 시호

고려·조선에서 올린 시호

1 태조 太祖 -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건 建 현릉 顯陵 918년~943년

Goryo Taejo Wangkun 2.jpg

2 혜종 惠宗 - - 인덕명효선현고평경헌의공대왕 仁德明孝宣顯高平景憲義恭大王 무 武 순릉 順陵 943년~945년 
3 정종 定宗 - - 지덕장경정숙영인경간장원문명대왕 至德章敬正肅令仁簡敬莊元文明大王 요 堯 안릉 安陵 945년~949년 
4 광종 光宗 - -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소 昭 헌릉 憲陵 949년~975년 
5 경종 景宗 - - 지인성목명혜순희정효공희헌화대왕 至仁成穆明惠順熙靖孝恭懿獻和大王 주 胄 영릉 榮陵 975년~981년 
6 성종 成宗 - - 강위장헌광효헌명양정문의대왕 康威章憲廣孝獻明襄定文懿大王 치 治 강릉 康陵 981년~997년 개령군(開寧君) 
7 목종 穆宗 - - 효사위혜극영정공선양대왕 孝思威惠克英定恭宣讓大王 송 訟 공릉 恭陵 997년~1009년 
8 현종 顯宗 - -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 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순 詢 선릉 宣陵 1009년~1031년 대량원군(大良院君) 
9 덕종 德宗 - - 선효강명광장경강대왕 宣孝康明廣章敬康大王 흠 欽 숙릉 肅陵 1031년~1034년 연경군(延慶君) 
10 정종 靖宗 - - 홍효안의강헌영렬문경용혜대왕 弘孝安毅康獻英烈文敬容惠大王 형 亨 영릉 英陵 1034년~1046년 평양군(平壤君) 
11 문종 文宗 - - 강정명대장성인효대왕 剛定明大章聖仁孝大王 휘 徽 주릉 周陵 1046년~1083년 낙랑군(樂浪君) 
12 순종 順宗 - - 영명정헌선혜대왕 英明靖憲宣惠大王 훈 勳 경릉 景陵 1083년 
13 선종 宣宗 - - 관인현순안성사효대왕 寬仁顯順安成思孝大王 운 運 인릉 仁陵 1083년~1094년 국원후(國原侯) 
14 헌종 獻宗 - - 공상정비회효대왕 恭殤定比懷孝大王 욱 昱 은릉 隱陵 1094년~1095년 
15 숙종 肅宗 - - 문혜강정명효대왕 文惠康正明孝大王 옹 顒 영릉 英陵 1095년~1105년 계림공(鷄林公) 
16 예종 睿宗 - - 명렬제순문효대왕 明烈齊順文孝大王 우 俁 유릉 裕陵 1105년~1122년 
17 인종 仁宗 - - 극안공효대왕 克安恭孝大王 구 構 장릉 長陵 1122년~1146년 
18 의종 毅宗 - - 강과장효대왕 剛果莊孝大王 현 晛 희릉 禧陵 1146년~1170년 
19 명종 明宗 - - 황명광효대왕 皇明光孝大王 호 晧 지릉 智陵 1170년~1197년 익양후(翼陽侯) 
20 신종 神宗 - - 경공정효대왕 敬恭靖孝大王 탁 晫 양릉 陽陵 1197년~1204년 평량공(平凉公) 
21 희종 熙宗 - - 인목성효대왕 仁穆誠孝大王 영 韺 석릉 碩陵 1204년~1211년 
22 강종 康宗 - -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 浚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清元孝大王 오 祦 후릉 厚陵 1211년~1213년 수사공상주국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 
23 고종 高宗 충헌 忠憲 안효대왕 安孝大王 철 皞 홍릉 洪陵 1213년~1259년 
24 원종 元宗 충경 忠敬 순효대왕 順孝大王 정 禎 소릉 昭陵 1259년~1269년
 복위 1270년~1274년 
임시 영종 英宗 - - - - 창 淐 - - 1269년 안경공(安慶公) 
25 - - 충렬 忠烈 광문선덕경효대왕 光文宣德景孝大王 거 昛 경릉 慶陵 1274년~1298년[1]
복위1298년~1308년 
26 - - 충선 忠宣 선효대왕 宣孝大王 장 璋 덕릉 德陵 1298년
복위1308년~1313년 
이지르부카[2] 益知禮普花 
27 - - 충숙 忠肅 의효대왕 懿孝大王 만 卍 의릉 毅陵 1313년~1330년
 복위1332년~1339년 강릉대군(江陵大君) 
아라트나시리[2] 阿刺訥忒失里 
28 - - 충혜 忠惠 헌효대왕 獻孝大王 정 禎 영릉 永陵 1330년~1332년
 복위1339년~1344년 
부다시리[2] 寶塔實里 
29 - - 충목 忠穆 현효대왕 顯孝大王 흔 昕 명릉 明陵 1344년 ~ 1348년 
바스마도르지[2] 八思麻朶兒只 
30 - - 충정 忠定 - - 저 胝 총릉 聰陵 1348년~1351년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 
미스젠도르지[2] 迷思監朶兒只 
31 - - 공민 恭愍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전 顓 현릉 玄陵 1351년~1374년

화장사 봉안 공민왕 어진 유리건판 촬영.jpg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바얀테무르[2] 伯顔帖木兒 
32 - - - - - - 우[3] 禑 - - 1374년~1388년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모니노[2] 牟尼奴 
33 - - - - - - 창 昌 - - 1388년~1389년 윤왕(允王)
후폐왕(後廢王)
34 - - - - 공양왕 恭讓王 요 瑤 고릉 高陵 1389년~1392년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공양군(恭讓君)
간성왕(杆城王) 
 


1. 신라

신라는 고대 삼국의 하나로서, 7세기 중엽에 백제·고구려를 평정하였으며,

698년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한국 역사상 이른바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으나,『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시대구분을 참작해 여섯 시기로 세분할 수 있다.

그런데『삼국사기』에서는 이〔표〕중 제1기에서 제3기까지를 상대(上代), 제4기를 중대(中代), 제5기 이후를 하대(下代)로 구분하고 있으며,『삼국유사』에서는 제1기와 제2기를 상고(上古), 제3기를 중고(中古), 제4기 이후를 하고(下古)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주로 왕통의 변화에 따른 독자적인 시대구분이지만, 불교의 공인 혹은 율령의 제정 같은 중요한 사건도 참작한 것이므로 신라 역사의 발전대세를 가지고 시대구분할 때도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국호 신라는 사로(斯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야벌(徐耶伐)·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나라, 동방의 나라, 혹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수풀의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그 중 한자의 아름다운 뜻을 가장 많이 가진 신라로 확정하였다고 하지만 414년에 건립된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에 이미 신라의 사용 예가 보인다.

『삼국사기』찬자에 의하면, 신라의 ‘신(新)’은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라(羅)’는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각기 취했다고 하는데, 이는 후세의 유교적인 해석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신라의 모태(母胎)가 된 사로국은 백운산(울산광역시 두서면 내와리)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주시를 남북으로 관통한 뒤 영일만을 통해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형산강 지구대(地溝帶)에 전개된 경주평야를 무대로 형성되었다. 이곳은 동해안 지방에서는 가장 넓은 농업지대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지대가 낮아서 예로부터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경주는 형산강 지구대의 중심에 위치한 형산강 평야의 핵심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사로국의 국읍(國邑)에 해당하는 경주분지는 삼면을 에워싸고 있는 하천의 범람에 의해서 퇴적된 선상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가지 서쪽을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흐르는 형산강 외에 북천(일명 알천)과 남천(일명 문천)이 경주분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북천은 토함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명활산과 금학산을 통과한 뒤 직선방향인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고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시가지 북쪽을 흐르는 남천과 합류하여 주변 여러 곳에 늪지를 발생시켰다. 그런 까닭에 경주분지 내에서는 북천의 범람을 피할 수 있는 지역에 일차적으로 거주공간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의 경주분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의 성과를 갖고 본다면 황성동유적에서 삼한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서기전 1세기 중반경의 고식(古式) 와질토기가 발견된다거나 대단위 취락이 형성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인왕동고분군 하층 유적에서 볼 수 있듯 서기 3세기 전반경부터는 왕궁이 있었던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한 반경 약 1㎞ 이내의 지역으로 확산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어쩌면 황성동 일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공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월성 주변으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남천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는 이 황성동지역과 월성지역 사이는 뒤에 조정에 의해서 개발되기까지 오랜 동안 습지상태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한편 경주평야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중국의 경우처럼 수도 외곽에 별도의 나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만큼 천연적인 성곽을 이루고 있었다. 사로국을 구성한 여섯 촌의 시조전설을 보면 시조들이 하늘에서 경주 주위의 표암봉·형산·이산(일명 개비산)·화산·명활산·금강산에 각기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경주의 지리적 조건과 결부시켜 윤색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경주의 성곽도시적 성격은 초창기 사로국의 발전과 자위(自衛)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형산강과 그 지류들을 끼고 주위의 산으로 둘러싸인 이 국읍은 외부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방비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내부적인 통합을 꾀하는 데 있어서도 유리한 점이 많았다. 국가의 지배체제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던 진한 12국 시대는 국가들 사이에 연맹과 전투가 끊임없이 되풀이 된 시대였는데, 사로국이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주위의 소국들을 모두 병합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는 바로 이 지리적인 이점(利点)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인의 보수성이랄까 지역적인 폐쇄성이랄까를 양성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신라는 진한의 동료국가들을 모두 병합한 뒤 소백산맥 동남부의 영남지방을 본부로 하여 삼국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소백산맥은 북방으로부터의 침공에 대해 영남지방을 보호하는 천연적 장벽의 구실을 톡톡히 했으나, 한편 교통상으로는 그 만큼 큰 장애물이 되어 심한 격절성(隔絶性)을 띠었다. 이를테면 외부의 주민들이 북쪽으로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에 일단 정착하게 되면 마치 울타리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다시는 여기서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1432년(세종 14)에 편찬된『세종실록 지리지』의 도별(道別) 성씨 분포상황을 보면 경상도 성씨는 다른 도에 비하여 토성(土姓)과 내성(來姓)·속성(續姓)의 성관(姓貫) 수효가 가장 많은 반면에 망성(亡姓)은 가장 적다. 이는 이 지방 호구의 다른 도(道)로의 유출이 가장 적은 대신에 반대로 다른 도로부터 토성의 유입은 가장 많았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사로국 건국기의 형편을 추측할 수가 있다.

고조선의 멸망을 역사적 계기로 하여 광범위하게 진행된 주민 이동의 물결 속에서 뒤에 진한과 변한을 형성하게 된 이주민들이 여러 단계에 걸쳐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에 중층적으로 잡거(雜居)하는 가운데 이 지방의 독특한 지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비교적 빠른 기간 내에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고, 더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한 토착적 성격마저 띠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3백년 이상에 걸친 가혹한 삼국 항쟁기를 거쳐 7세기 중·후반 한반도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리하여 그 지배 영역은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크게 확대되었다. 이처럼 영토가 크게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핵심부, 소백산맥 동남부를 본부로 생각하는 삼국 항쟁기의 편협한 지역 구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새로이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다스림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수도 경주를 끝내 고수하고, 더욱이 경주 6부 사람에 한하여 관직을 부여한 것은 그 뚜렷한 예증이다. 하기야 신라조정은 경주의 편재성(偏在性)을 보완할 목적에서 각지에 다섯 개의 소경(小京)을 두었으나, 김해에 설치한 금관경(金官京)을 제외하면 모두가 경주를 기준으로 해서 볼 때 소백산맥 바로 너머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결국 신라가 한반도에 군림하게 된 뒤에도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여 방어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요컨대 경주분지와 영남지역이 제공한 지리적 이점은 신라의 성장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나, 한편 그것은 동시에 신라 지배층의 폐쇄적인 영역의식을 낳게 되어 한반도를 대부분 통일한 뒤에는 오히려 새로운 발전을 제약 내지 저해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성립과 발전

  1. 건국과 초기의 발전

 

제1기는 신라의 건국으로부터 연맹왕국(聯盟王國)을 완성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신라도 다른 초기 국가와 마찬가지로 최초 성읍국가(城邑國家)로 출발했는데,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서기전 57년이라 했으나, 성읍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빨랐을 개연성이 크다. 그것은 신라 역시 금속문화의 세례를 받으면서 차차 부족장의 권한이 강화된 결과 성읍국가가 출현했을 것이 틀림없는데, 경주지역으로의 금속문화의 유입은 서기전 1세기보다 몇 세기 일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속기의 사용은 국가 성립의 필요조건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농업생산력의 일정한 발전과 외부로부터의 강한 자극이 없이는 국가 수준의 정치체를 성취할 수 없다. 이처럼 생각할 때 서기전 2세기 말에 발생한 고조선의 멸망과 이에 따른 주민 이동, 특히 남한지역에 삼한사회가 성립되는 세력 재편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성읍국가로서의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급량(及梁)·사량(沙梁)·본피(本彼)·모량(牟梁, 혹은 漸梁)·한기(漢岐, 혹은 漢祉)·습비(習比) 등 여섯 씨족의 후예들로 구성된 것 같다.

이들은 처음 평야 주위의 산이나 구릉지대에서 취락생활을 하다가, 점차 평야지대로 생활권을 옮기는 과정에서 국가 형성의 길이 열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된 것이 급량 출신인 혁거세(赫居世, 일명 弗矩內)였으며, 그는 사량 출신의 알영(閼英)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처음 신라는 여섯 씨족 가운데 급량과 사량의 두 씨족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두 씨족은 후에 성씨제가 도입되었을 때 각기 박씨·김씨를 칭하였다.

그 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쪽으로부터 진출해온 탈해(脫解) 영도하의 새로운 세력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역사서에는 이를 석씨(昔氏)라 칭하고 있다. 다만 탈해 집단은 부족적인 기반이 미약했으므로 곧 종래의 지배층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런데 2세기 후반에 탈해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새로운 세력집단이 다시 경주로 진출해 신라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 즈음에 신라는 연합이나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 진한(辰韓)의 여러 성읍국가를 망라해 보다 확대된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종전의 점(點)에 불과하던 성읍국가로부터 일정한 영역·영토를 가진 연맹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는데, 주변국가들에 대한 지배·복속관계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신라에 복속한 국가들 중에는 수도 금성(金城)을 침입하거나 또한 토착세력의 거수(渠帥)들 가운데는 중국 군현과 통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같은 상태는 3세기말경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 초에 평안남도와 황해도에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타멸되고, 곧이어 고구려와 백제 양대세력이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날카롭게 대립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낙동강 동쪽사회도 이에 큰 자극을 받아 신라를 맹주(盟主)로 한 국가통합운동이 급속히 진전된 결과 4세기 중엽에는 연맹왕국이 완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2. 마립간시대의 신라  

제2기는 연맹왕국의 발전기로서 다음에 전개될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준비하던 태동기였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왕호로서의 마립간(麻立干) 칭호이다. 이전까지 사용해온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 등의 왕호는 계승자 이상의 권력자의 의미를 풍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내물왕(356∼401) 때부터 사용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고처(高處)의 지배자〔干〕혹은 최고의 지배자라는 의미 그대로 종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권력자의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성읍국가의 지배자인 간(干)들을 거느리면서 그 뒤에 군림하는 군왕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따라서 이 연맹왕국 시대는 왕호를 따서 ‘마립간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대에 들어오면 종래의 박·석·김 3성에 의한 교립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다. 특히 5세기 중에는 왕위의 부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예방하였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내물마립간 때에는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중국 북조(北朝)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 때 사신은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았다.

특히, 382년에 사신으로 간 위두(衛頭)는 전진의 왕 부견(苻堅)의 “경(卿)이 말한 해동(海東)의 사정이 예와 같지 않다니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에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가 당당한 정복국가로 비약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다. 광개토왕의 능비문(陵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의 보기(步騎) 5만명이 신라의 국경지대로 출동해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그 뒤 신라의 왕위계승에 개입하는 등 자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특히 427년(장수왕 15)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적극 추진하자, 신라는 눌지마립간 때부터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 433년에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 뒤 475년(자비마립간 18)에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무력으로 침공,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한 뒤에는 백제와 다시 결혼동맹을 맺어 종전의 동맹체제를 한층 강화했고, 일선지대에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침에 대비하였다.

한편 대내적으로는 이 시기에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단행하였다. 종래의 족제적(族制的)인 6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469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의 방리(坊里) 이름을 정했고, 487년(소지마립간 9)에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수리했으며, 다시 490년에는 수도에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하게 하였다.

5세기를 통해 신라조정이 꾸준히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음은 이 시기에 축조된 금관총이나 황남대총(皇南大塚)을 비롯한 수많은 고총고분(高塚古墳)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487년 혹은 지증왕 때에 설치된 김씨왕실의 종묘로서의 신궁(神宮)은 바로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3. 신라의  발전  

제3기는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어 국왕과 여러 귀족과의 일정한 타협 조화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해가던 시기였다.『삼국유사』에서 시대구분하고 있는 이른바 중고가 바로 이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대는 법흥왕 때의 일련의 개혁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정치적·사회적 기반은 전왕인 지증왕 때에 대체로 마련되었다. 502년에 농사를 장려하는 왕의 명령을 공표하는 가운데 우경(牛耕)이 시작된 것은 농업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의 발달한 정치제도를 받아들여 국가의 면목을 일신하였다. 종래 구구하게 사용 표기되어오던 국호를 신라로 통일했고, 마립간 대신에 중국식 왕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505년에 지방제도로서 주군(州郡)제도를 채택한 것 등은 모두 국가체제 확립에 수반하는 조처들이었다.

대외관계에서도 521년 중국 남조의 양(梁)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382년 이래 14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법흥왕 때에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율령을 반포하고, 중요 관부를 설치하며, 진골귀족회의를 제도화하는 등 신라의 전반적인 국가체제를 법제화·조직화한 시기였다. 520년(법흥왕 7)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백관의 공복(公服)·17관등 등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근래 경상북도 포항시 중성리(북구 흥해읍)와 냉수리(신광면)에서는 각기 501년과 503년에 건립된 두 개의 비석이 발견되어 조정이 공론을 거쳐 교령(敎令)의 형식으로 6부 세력가의 현지 촌락 지배 혹은 재물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민간의 분규를 평결하고 그 내용을 비석에 새긴 사실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된 524년(법흥왕 11) 건립의 거벌모라(居伐牟羅)비에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어떤 사태에 대한 문책으로 촌 사인(使人)들과 도사(道使)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장(杖) 1백대 혹은 60대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새겨져 있다.

또한 550년경에 세워진 충청북도 단양의 적성(赤城)비에는 호령(戶令) 및 전령(田令)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들 비문들을 통해 당시 율령의 수용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얻게 되었다.

율령제정에 앞서 516∼517년경에는 군사문제를 전담하는 병부가 설치되었다. 531년에는 진골귀족회의의 주재자로 상대등 제도를 채택하였다. 또한, 상대등의 설치를 전후한 527년 내지 535년경에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가 있은 뒤인 536년에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통치체제가 확립되어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이 무렵 왕의 칭호도 종래의 매금왕(寐錦王) 대신 대왕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소속 부인 탁부(喙部) 출신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6부 전체를 지배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되었다.

진흥왕 때는 이 기반 위에서 대외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켰다. 이미 법흥왕 때에 김해에 있던 본가야를 병합해(532) 낙동강 하류지방에서부터 북상하면서 가야 여러 나라를 위협했는데, 진흥왕은 다시 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 창녕의 비화가야(非火加耶)를 병합한 다음 562년(진흥왕 23)에는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고령의 대가야를 공략, 멸망시킴으로써 기름진 낙동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정복사업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한강 유역의 점령이었다. 550년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 : 지금의 충청남도 天安 혹은 충청북도 槐山)과 금현성(金峴城 : 지금의 충청남도 全義 혹은 충청북도 鎭川)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두 성을 빼앗았다. 이듬해에 ‘개국(開國)’이라 개원(改元)하고, 친정하면서 백제 중흥의 영주(英主) 성왕과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다. 신라는 처음 한강 상류지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 지금의 鐵嶺)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의 6군을 기습 공격해 그들을 몰아냄으로써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554년에는 신라의 약속 위반에 분격해 관산성(管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沃川)으로 쳐들어온 성왕을 죽이고, 백제의 3만 대군을 섬멸시켰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얻은 것 외에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편으로는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의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556년에는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 일명 碑利城)를 설치했고, 568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에까지 진출하였다. 이 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단양에 있는 적성비가 잘 말해주고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중대의 황금시대

1. 삼국통일전쟁의 수행  

신라는 560년대에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때부터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660년대까지 한 세기 동안 실지회복을 노리는 고구려·백제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여러 차례 국가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진평왕대 후반기부터 강화되기 시작한 두 나라의 침략은 선덕여왕의 즉위 후 한층 가열해졌다. 642년(선덕여왕 11)에는 한강 방면의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南陽)이 양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함락직전까지 갔으며,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 : 현재의 陜川)은 백제군에 함락되어 대야주 군주(軍主)이던 김품석(金品釋)이 전사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서부 군사령부는 합천에서 낙동강 동쪽의 경산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적 위기에 처하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대당외교(對唐外交)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지적한 여왕통치의 문제점과 그 대안으로 제시한 당나라의 황족에 의한 신라의 감국안(監國案)이 도리어 신라정계를 분열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이에 여왕 측근세력과 문벌귀족세력 간에 암투가 벌어지던 중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 일파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반란은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연합세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내란 중에 선덕여왕이 죽자 그들은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정치·군사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로부터 7년 뒤에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의 군사력을 배경으로 김춘추가 즉위,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이로써 제3기는 종말을 고하고, 신라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었다.

무열왕의 즉위를 기해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공세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무열왕은 이 같은 군사적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종래의 수세에서 벗어나 일약 공세로 전환하였다. 바야흐로 종전의 국가 보위전쟁은 삼국통일전쟁으로 대전환을 맞았다. 대당 친선외교는 당이 고구려와 백제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거중(居中)조정을 청원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를 치기 위한 양국 간의 군사동맹 체결로 발전하였다.

마침내 무열왕은 660년 당군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듬해무열왕이 죽자 삼국통일의 대업은 그의 아들 문무왕에게 넘겨졌다. 문무왕은 663년백제 부흥운동군을 완전히 진압하고, 668년에는 당군과 함께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 보장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만 당군은 백제 고지(故地)와 고구려 땅에 주둔하면서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은 고구려 멸망 직후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려고 하였다. 당의 야욕을 간파한 문무왕은 당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신라군대는 옛 백제 땅으로 진출해 이를 송두리 채 차지하였고 고구려의 부흥운동군을 몰래 지원했다. 신라와 당 양국간의 긴장과 반목은 이윽고 전쟁상태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671년 이래 당군을 상대로 하여 사투를 벌인 끝에 676년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당군은 압록강 너머 만주지방으로 물러갔다. 이로써 신라는 진정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2. 통일신라의 황금시대  

제4기는 왕통상으로 보면 태종무열왕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해간 시대이며,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이전과는 달리 왕권이 크게 강화된 전제왕권시대였고, 문화상으로는 신라 문화의 극성기였다.『삼국사기』의 시대구분인 이른바 중대가 바로 이 시대이며,『삼국유사』는 이때부터를 하고(下古)로 잡고 있다.

신라가 이 시기에 들어와 전제왕권을 구축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을 지적할 수 있다. 즉, 태종무열왕과 아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성취함으로써 왕실의 권위가 크게 고양된 점,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단행된 중앙귀족의 도태·숙청 및 지방세력과의 연계 강화, 집사부(執事部) 중심의 일반행정체계와 유교적 정치이념의 도입과 강행, 나아가 이로 인한 관료제의 발달 등이 전제왕권의 확립에 기여한 요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집사부 중심의 정치운영이 전제왕권의 안전판과 같은 구실을 하였다. 본래 집사부는 651년(진덕여왕 5)에 김춘추 일파가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해 종래의 품주(稟主)를 개편, 설치한 국왕직속의 최고관부였다. 이는 품주가 지닌 가신적(家臣的)인 성격을 표면화해 왕정의 기밀을 맡게 됨으로써 그 장관인 중시(中侍)는 국왕의 집사장 구실을 맡게 되었다. 이른바 중대왕권은 이를 통해 전제화되어 갔다. 제3기가 불교식 왕명시대(王名時代)였다고 한다면, 이 시대는 중국식 묘호(廟號)를 쓰기 시작한 시대로서, 당시 정치적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다.

중대의 전제왕권은 신문왕 때에 정력적으로 구축되었다. 그는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고, 통일에 따른 중앙·지방의 여러 행정·군사조직을 완성하였다. 중국 제도를 모방해 6전조직(六典組織)을 갖추거나, 제일급 중앙행정기구의 관직제도를 다섯 단계로 정비한 것, 지방에 9주(州)를 비롯해 5소경(小京)을 설치한 것, 수도와 지방에 각각 9서당(誓幢)과 10정(停) 등의 군사조직을 배치한 것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성덕왕 때에는 전제왕권하의 극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점차 누적되어 경덕왕 때에는 진골귀족들이 반발하였다. 689년에 폐지된 바 있는 진골귀족들의 녹읍이 757년에 부활된 것은 귀족들이 전제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이 같은 움직임을 막기 위해 경덕왕은 757년에 전국의 모든 지명을, 759년에는 모든 관청·관직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쳤다. 이렇게 겉으로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표방하면서 국왕의 권력집중을 위한 정치개혁에 열을 올렸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를 이어 즉위한 혜공왕 때는 전제왕권의 몰락기로서, 친왕파와 반왕파 사이에 모두 여섯 차례에 걸친 반란과 친위 쿠데타가 잇따랐다. 특히, 768년에 일어난 대공(大恭)의 반란은 전국의 96각간(角干)이 서로 얽혀 싸웠다고 하는 대란으로서 3년 동안 지속되었다. 774년에는 반왕파의 중심인물인 김양상(金良相)이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780년에 혜공왕이 김양상·김경신(金敬信)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태종무열왕 계통은 끊어지고『삼국사기』에서 시대구분하고 있는 3대의 마지막 시대인 하대가 개막되었다.

 


신라의 쇠퇴와 멸망

1. 신라의 쇠퇴  

제5기는 왕통상으로 원성왕 계통이지만, 원성왕 자신이 내물왕의 12세손임을 표방한 점에서 혹은 부활내물왕계통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진골귀족들이 왕실에 대해 서로 연합하는 형세를 띠면서도 각기 독자적인 사병세력을 거느리고 있어 귀족연립(貴族聯立) 혹은 분열의 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시야를 전국적으로 확대해본다면 지방의 호족세력이 크게 대두하고 있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9세기 말에 전개되는 호족의 대동란은 실로 이 시기에 배양된 것이었다.

이 시대의 개창자인 김양상은 혜공왕을 죽인 뒤 즉위해 선덕왕이 되었다. 그러나 변혁기의 정치적·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겨를도 없이 재위 5년 만에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왕위경쟁에서 승리한 상대등 김경신이 즉위, 원성왕이 되었다. 그는 788년에 국학(國學) 출신자에 대한 관리등용제도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는 등 정치 개혁에 착수했으나, 왕실 직계가족 중심으로 권력구조를 개편함으로써 귀족들의 불만을 초래하였다.

그 뒤 애장왕 때는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섭정이 되어 율령의 개정과 오묘제도(五廟制度)의 확립을 통해 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고, 김언승이 왕을 살해하고 헌덕왕이 된 뒤로는 이와 같은 노력이 한층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왕실가족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소외된 진골귀족들의 불만이 커져 822년(헌덕왕 14)에는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웅천주(熊川州)에서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이 반란은 비록 단시간 내에 진압되었으나, 호족의 지방할거적 경향이 이로써 크게 촉진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뒤 흥덕왕 때에는 진골귀족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일대 개혁정치가 단행되었는데, 그 실효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더욱이 그가 죽은 뒤에는 근친왕족 사이에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 3년간에 걸쳐 2명의 국왕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골귀족들이 중앙에서 정쟁(政爭)에 휩쓸려 있는 동안 지방의 호족세력들은 차츰 성장해 장차 왕실을 압도할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청해진(淸海鎭)을 근거로 한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해상세력가는 그 두드러진 존재였다.

그 뒤 경문왕·헌강왕 때에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시도되었으나, 이미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늦었고, 정강왕의 뒤를 이어 진성여왕이 즉위했을 때에는 사태가 절망적이 되어 국가재정은 파탄에 직면하고 말았다. 889년(진성여왕 3)에 조정이 재정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방의 주군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들의 반란을 유발했고, 조정이 끝내 이를 수습하지 못해 장기간의 내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2. 신라의 멸망  

제6기는 왕통상으로 제5기의 계승, 연장이었으나, 신라가 50년 가까운 내란 끝에 마침내 멸망하게 되는 쇠망기이다. 이 시기에 신덕왕·경명왕·경애왕 등 박씨왕이 3대에 걸쳐서 15년 간(912∼927) 재위했으나, 그들은 김씨 왕통과 혼인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군웅들이 전국 도처에 할거해 신라조정이 전혀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왕경 자체도 무방비상태가 되어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왕경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할 정도였고, 927년에는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이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김씨 왕통 출신의 경순왕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주역은 전국 각지에 자립하고 있던 군웅들이며, 그 가운데서도 백제와 고구려의 국가 부흥을 부르짖으며 궐기한 견훤과 궁예(弓裔)였다. 신라는 이들이 서로 대결하는 동안 여맥(餘脈)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918년에 궁예를 쓰러뜨리고 즉위한 고려태조왕건(王建)이 정책상 신라와의 친선정책을 꾀하게 됨에 따라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고려가 후백제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은 935년 11월고려에 자진 항복해 신라는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신라의 제도

1. 골품제도  

골품제도는 6∼7세기경 신라 조정에 의해 법제화된 이래 삼국통일을 거쳐 멸망에 이를 때까지 3백여 년간 거의 변함없이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규제하는 대본(大本)으로서 기능, 작용하였다. 이 제도는 왕경 6부민을 대상으로 개인의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이라든지 가옥의 크기,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을 가한 신분제도였다. 따라서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교되고 있다.

-형성과 계통  

본래 골품제도는 신라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복속된 성읍국가 혹은 연맹왕국의 지배층을 왕경에 옮겨 6부제로 편성한 뒤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그 신분 등급을 매기면서 제정되었다. 그런데 원시씨족제도 내지 족장층의 사회적 기반을 해체하지 못한 채 집권화의 방향으로 나갔던 까닭에 등급 구분의 원리는 혈연적·족적인 유대를 토대로 하게 되었다.

골품제도는 처음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왕경 내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가 별개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듯한데, 뒤에 두 계통이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골품제도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라는 두 개의 골과 육두품에서 일두품에 이르는 여섯 개의 두품을 포함해 모두 8개의 신분으로 나누어졌다. 다만 골품제도가『삼국사기』직관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연한 신분체계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에 걸친 사회성층의 결정화(結晶化)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그 최종적인 완성 시기는 7세기 중엽이 아닐까 짐작된다.

성골과 진골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나,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하며 성골이 소멸되자 김춘추 때부터는 왕위에 올랐다. 그뒤 신라의 멸망 때까지 모든 왕들은 진골이었다. 이처럼 같은 왕족이면서도 양자가 구별된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진골 중에는 김씨 왕족 이외에 전 왕족이자 중고시대의 왕비족으로도 생각되는 박씨족이나 혹은 신라에 의해 병합된 비교적 큰 국가의 왕족들에게도 부여되었다. 즉, 본가야의 왕족이나 고구려의 왕족출신인 보덕국왕(報德國王)안승(安勝)은 모두 김씨성을 받고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비록, 이들은 ‘신김씨(新金氏)’라 하여 본래의 신라왕족과는 구별되었지만, 진골 대우를 받음으로써 김씨 왕족과도 통혼할 수 있게 되었다.

두품제  

진골 아래의 여섯 개의 신분은 뒤에 가면 크게 상하 두 계급으로 구별되었다. 즉, 6두품·5두품·4두품은 하급귀족으로서 관료가 될 수 있었으나, 3두품·2두품·1두품은 그렇지 못하여 일반평민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물론, 관료가 될 수 있는 계급이라도 그 특권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진골 바로 다음가는 신분인 6두품은 일명 ‘득난(得難)’이라고 불린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좀처럼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이었다. 여기에는 본래의 신라국을 형성한 여섯 씨족장 가문의 후예와 신라의 팽창과정에서 복속되어 왕경 6부에 편입된 여러 성읍국가의 지배층 후손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영(令)을 장관직으로 하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이나 혹은 6정·9서당 등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인 장군이 될 수 없었고, 그 아래의 차관직이나 부지휘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는 관리나 군인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유학자 혹은 승려가 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원효(元曉)와 같은 위대한 승려나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뛰어난 문장가·학자는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한편, 5두품과 4두품은 6두품에 비해서 보다 낮은 관직을 얻는 데 불과했다. 3두품·2두품·1두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분된 의미를 잃어 9세기 경이 되면 평인(平人) 혹은 백성이라 통칭되었다.

변천  

골품제도는 본래 8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성골이 소멸하고 또한 평민들의 등급구분이 없어지게 된 결과 진골·6두품·5두품·4두품·백성의 5등급으로 정리되었다.

834년(흥덕왕 9)에 제정된 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에 대한 사용 제한규정에서 보면, 4두품은 백성과 같은 규제를 받고 있어 점차 백성층으로 강등된 듯하다.

카스트제도와 마찬가지로 골품제도도 최고신분인 성골·진골은 엄격히 지켜졌으나, 4두품 이하의 하층신분은 오랜 기간에 걸쳐 계급의 이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평민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골품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은 왕경에 사는 사람만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만큼 지방의 촌락민과는 같이 논할 수 없는 우월한 존재였다.

왕경사람들은 지방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골품제도는 이를 합법화하기 위한 왕경 지배자공동체의 배타적인 신분제도였다. 다시 말해 지방민은 노예나 부곡민(部曲民) 등 천인계층과 더불어 골품제도에 포섭되지 않는 이른바 탈락계층이었던 셈이다.

정치적 규제  

여러 골품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규정이 정치적 진출에 대한 것이었다. 즉, 골품제도는 신분에 따라 일정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관등의 상한선을 설정함으로써 결국 정치적 진출에 제한을 가하였다.

신라의 관등제도는 골품제도에 앞서 법흥왕 때에 완성되었는데, 왕경인에 대한 경위제도(京位制度)와 지방민에 대한 외위제도(外位制度)의 이원적인 체계로 구성되었다.

그 뒤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외위제도를 폐지하고 경위제도로 일원화하면서,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그밖에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로 각기 승진의 한계를 정하였다.

그런데 집사부의 장관직인 중시나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직인 영은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만이 취임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장관직은 진골귀족의 독점물이었다.

6두품은 차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고, 5두품과 4두품은 각기 제3등 관직인 대사와 그 이하 관직인 사지(舍知)·사(史)에 한정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와 같은 원칙은 주요 군부대·지방관직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사회적 규제 

골품제도는 정치적 규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규제 또한 엄격하였다. 원칙적으로 같은 신분 내에서만 결혼이 가능했으므로 최고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은 배우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진덕여왕이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왕실 안에서 성골 신분의 남성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충분히 그럼직한 상상이다. 또한, 같은 진골이라도 김씨 왕족은 뒤에 왕경으로 이주해온, 신라에 의해 병합된 조그만 나라의 왕족 후예와의 혼인을 꺼리는 관습이 있었다.

이외에도 거처할 수 있는 가옥의 크기에까지 적용되었다. 834년의 규정에 따르면 진골의 경우라도 방의 길이와 너비가 24척(尺)을 넘지 못하며, 6두품·5두품·4두품은 각기 21척·18척·15척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옷빛깔에서는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 제9관등인 급벌찬(級伐飡) 이상, 제11관등인 나마(奈麻) 이상, 제17관등인 조위(造位) 이상이 각기 자색(紫色)·비색(緋色)·청색(靑色)·황색(黃色)의 복장을 하도록 규제하였다. 이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 신분에 각기 상응하고 있다.

이 밖에도 우차의 자재 및 장식, 일상생활 용기들이 골품에 따라 각기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다. 결국 골품제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것은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진골이었다.

2. 정치제도  

신라의 정치제도는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에 최종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으나, 연원은 마립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시대의 정치운영방식이나 관제는 뒷날의 화백제도(和白制度) 및 관등제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관등제도를 예로 들어본다면, 6세기초 법흥왕 때에 크게 정비되었으나, 관등의 원류를 소급해보면 연맹왕국시대에 이미 관직으로서 기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제1·2관등인 이벌찬과 이척찬(伊尺飡, 일명 伊飡)은 법흥왕 때 상대등직이 설치될 때까지는 수상에 해당하는 관직이었고, 제4관등 파진찬(波珍飡)은 본래 해관(海官) 혹은 수군(水軍) 지휘관을 가리키는 고유한 직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관등의 관직적 성격은 6세기 이래 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점차 지양되었으나, 완전하게 정지되지 않은 채 관직의 제도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법흥왕 이후 관등과 관직이 분리된 뒤에도 대사·사지 등 관등명칭은 집사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제3·4등 관직명칭으로 함께 쓰여졌다.

중앙행정제도 

중앙의 통치조직을 보면 법흥왕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해 516∼517년경에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로서는 처음으로 병부(兵部)가 설치되었으며, 531년에는 귀족회의 의장으로서의 상대등 제도가 채택되었다. 진흥왕 때인 544년에는 관리의 규찰을 맡은 사정부(司正府)가 만들어졌고, 565년에는 국가의 재정을 맡은 품주가 설치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행정기구 발달에 있어 획기적인 시기는 진평왕 때였다. 581년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583년에는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각각 창설되었다. 이듬해에는 공부(貢賦)를 맡은 조부(調府)가 품주로부터 분리, 독립했으며, 승여(乘輿)·의위(儀衛)를 담당하는 승부(乘府)가 설치되었다. 586년에는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등이 창설되어 관제발달을 맞게 되었다. 580년대의 관제조직상의 특징은 새로운 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고, 소속 직원의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보여 일종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진덕여왕 때에는 김춘추 일파에 의해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대규모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651년에 종래의 품주를 개편, 국왕직속의 최고 관부로서 집사부를 설치하고, 품주의 본래 기능은 신설된 창부(倉部)로 이관하였다. 또한, 입법과 형정(刑政)을 담당하는 이방부(理方府)가 설치되었는데, 667년(문무왕 7)에 또 하나의 이방부가 설치됨으로써 종래의 것은 좌이방부, 신설된 것은 우이방부로 고쳤다. 이와 동시에 예부와 사신접대를 담당하는 영객부(領客府)의 지위를 높였다.

개혁작업은 김춘추가 즉위한 뒤에도 계속 추진되어 삼국통일 직후인 686년(신문왕 6)에 토목·영선(營繕)을 담당하는 예작부(例作府) 설치를 끝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1급 행정관부의 관원조직도 확충되었다. 종전에는 관원조직이 영·경(卿, 병부는 大監)·대사·사의 4단계였는데, 685년에 대사와 사의 중간에 사지를 신설함으로써 결국 5단계조직으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기구들은 신라 멸망 때까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759년(경덕왕 18)에 모든 관부와 관직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친 일은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776년(혜공왕 12)에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이처럼 행정기구 자체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기능이나 지위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9세기에 접어들면 종전의 내성(內省) 일국(一局)에 불과하던 어룡성(御龍省)이 승격, 독립해 일종의 섭정부(攝政府)로 등장하였다(801). 또한 국왕의 문필(文筆) 비서기관인 세택(洗宅)이 중사성(中事省)으로 승격해 집사성(執事省 : 執事部가 개칭됨) 장관인 시중(侍中 : 中侍가 개칭됨)을 견제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특히 경문왕·헌강왕 때에는 문한(文翰)기구의 비중이 커지면서 서서원(瑞書院)·숭문대(崇文臺) 등에 학사(學士)·직학사(直學士) 제도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화백제도  

신라의 정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은 그것이 합좌제도(合坐制度)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에서는 이 회의체를 화백이라고 불렀는데, 그 기원은 연맹왕국시대의 정사당(政事堂) 혹은 남당(南堂)에까지 소급되고 있다. 하지만 화백제도가 비교적 뚜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것은 법흥왕 때 의장인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후부터의 일이다.

진골귀족출신의 대신이라 할 수 있는 대등(大等, 혹은 大衆等)으로서 구성되는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그밖에 불교의 공인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만장일치에 의해 의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특히 중대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왕경 사위(四圍)의 청송산(靑松山, 동쪽)·오지산(亏知山, 남쪽)·피전(皮田, 서쪽)·소금강산(小金剛山, 북쪽) 등 이른바 영지(靈地)를 택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합좌제도의 존재는 당시의 정치형태가 귀족연합적인 성격을 지닌 데 연유하였다. 이 귀족회의의 주재자로서의 상대등은 진골 중에서도 이척찬과 같은 높은 관등의 인물이 임명되어 귀족세력과 왕권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다.

즉, 상대등은 국왕의 교체와 거취를 같이함으로써 국왕과의 관계에서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존재였고, 귀족의 통솔자일 뿐 아니라 그 대변자요 대표자라는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위를 계승할 제일후보자로 여겨졌다.

다만, 집사부의 설치를 계기로 국가의 정무를 분담하는 새로운 관부가 만들어지자 어느 관청에도 소속되지 않는 대등의 존재 의의는 줄어들게 되었다. 특히 통일기에 들어와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등으로 상징되던 화백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빛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합좌제적인 정치운영의 전통은 변형된 형태로나마 여전히 잔존하였다. 가령 집사부와 사정부·예작부·선부 등 몇몇 관부를 제외한 주요 관청의 장관직인 영이 대개 2명 이상의 복수로 되어 있는 점이라든지, 더욱이 이들 장관직이 겸직의 형태로 소수의 진골귀족에 의해 독점되어 있는 것은 통일기 신라의 정치가 기본적으로 합의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것을 암시한다고 보여진다.

지방행정제도  

지방의 통치조직은 점령지역의 확보책으로서 설치되어 지방의 촌(村)에 도사(道使)가 파견되었는데, 지증왕 때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즉, 505년에 지방제도로서 주군(州郡)제도를 채택, 실시했는데, 군정적(軍政的) 성격을 띠어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때때로 중심을 이동할 수 있었다.

큰 성에 설치한 주의 장관을 군주(軍主), 중간 정도 규모의 성에 설치한 군의 장관을 당주(幢主)라 하였다. 뒤에 군주는 총관(摠管)·도독(都督)으로, 당주는 태수(太守)로 각각 바뀌었다. 한편, 몇 개의 촌을 장악한 작은 규모의 성은, 통일기에 들어와 현(縣)으로 개편되었는데, 장관 명칭은 현의 크기에 따라 현령 혹은 소수(小守)라 하였다.

6세기 전반기 신라의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 짐작되는 중국 정사인『양서(梁書)』신라전에는 왕경 안에 여섯 개의 탁평(啄評), 지방에 52개의 읍륵(邑勒)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읍륵을 군으로 보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군제도는 한꺼번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주만 하더라도 505년에 실직주(悉直州 : 지금의 강원도 三陟) 1개가 설치되었고, 525년에 다시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尙州), 550년대에 신주(新州 : 지금의 경기도 廣州)·비사벌주(比斯伐州 : 일명 下州라고도 하며 지금의 경상남도 昌寧), 비열홀주(지금의 함경남도 安邊) 등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한편, 주군제도와는 별도로 왕경을 모방해 특수행정구역으로서 소경을 설치하였다. 소경은 처음 514년에 아시촌(阿尸村 : 위치에 대하여는 安康·咸安·義城 등이 있음)에, 557년에는 국원(國原 : 지금의 충청북도 忠州)에, 다시 639년에는 하슬라(何瑟羅 : 지금의 강원도 江陵)에 각각 설치하였다. 이들 소경에는 왕경 6부의 진골을 비롯한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소경은 주군이 군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주로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한편으로는 주군을 견제, 감시하는 듯한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관은 사신(仕臣 : 일명 仕大等)이라 하여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다만, 삼국통일 이전의 소경제도는 전국적으로 체계 있게 정비되지는 못하였다.

통일에 따른 지방제도의 개편  

이와 같은 지방통치조직은 삼국통일에 따른 영토의 확대로 크게 개편되어 685년에 9주·5소경제도로 완성되었다.

9주는 중국의 옛 우왕(禹王) 때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백제·고구려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를 설치하였다. 주 밑에는 전국에 117∼120개의 군과 293∼305개의 현을 두었다.

한편, 5소경은 대체로 국토의 동서남북 방향에 맞추어 정비되었다. 이는 왕경이 동남쪽 한끝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통일기의 지방통치조직의 변화는 이 같은 각급 행정단위의 증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주군제도는 종전의 군정적 성격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행정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는 군현에 파견되는 외관(外官) 중에 문관 출신을 적극 등용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신라가 약 1세기 동안 생사를 건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안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끝으로 주·군·현과 소경 밑에는 촌(村)·향(鄕)·부곡(部曲)이라는 보다 작은 행정구역이 있었다. 촌은 양인이 사는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이른바 행정촌이었는데, 그 지방의 토착세력가를 촌주(村主)로 임명해 현령을 도와 촌락행정을 맡도록 하였다. 한편, 향·부곡은 촌과는 구별된 듯한데, 이는 특수한 직역(職役)에 종사한다거나 혹은 현을 편성하기에 호구(戶口)가 크게 부족한 데 연유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3. 군사제도  

신라는 처음에 왕경 6부의 소속원을 군인으로 징발해 이른바 6부병을 편성, 왕경을 수비하도록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6세기에 들어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발전함에 따라 국왕은 전국적인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강력한 군사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국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귀족출신의 무장을 대신 파견해 싸우게도 하였다.

국왕지휘 하의 부대편성의 구체적인 모습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독립된 단위부대를 흔히 군기(軍旗)의 뜻을 가진 당(幢)이라고 불렀고 그 지휘관을 당주라고 한 것만은 확실하다.

화랑제도  

또한, 6정 군단의 보충을 목적으로 한 군사조직에 화랑도(花郎徒)와 같은 청소년단체가 있었다. 화랑도의 원류는 성읍국가시대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청소년조직으로 생각되는데, 진흥왕 때 대규모의 군단이 편성될 때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는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화랑도는 단순한 군사조직은 아니었다. 화랑집단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서 볼 수 있는 충(忠)과 신(信) 등 사회윤리 덕목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일정 기간 수련을 쌓았다.

그 결과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1세기 동안 국난기에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을 이끌어갔으며, 특히 무사도의 현양(顯揚)에 이바지한 바 컸다.

화랑출신인 사다함(斯多含)·김유신·김흠운(金欽運)·관창(官昌) 등의 무용담은 신라 무사도의 귀감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은『화랑세기(花郎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해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9서당·10정제도 

삼국통일 후 신라의 군사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즉, 중앙군으로서 9서당, 지방 주둔군으로서 10정, 기타 많은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 같은 개편은 대체로 문무왕·신문왕 때에 이루어졌다.

9서당의 특징은 본래의 신라사람 이외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피정복민을 포함해 구성된 군단이라는 점에 있다. 즉, 신라민으로는 종전의 서당과 낭당을 각각 개편해 두 개의 군단을 편성하고, 672년에 조직한 장창당(長槍幢)을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라 개칭하면서 9서당에 포함시켜 도합 3개의 군단을 조직하였다. 백제민으로는 전후 2개의 군단을 조직했으며, 고구려민으로는 3개 군단, 그리고 말갈민으로 1개 군단을 조직하였다.

고구려민으로 구성된 3개 군단 중에는 신라의 보호국으로 금마저(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에 세워졌던 보덕국의 성민(城民)으로 구성된 군단이 2개 포함되어 있다. 결국 9서당은 피정복민으로 조직된 군단의 수가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했는데, 신라통일기의 최대군단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군사력이었다.

한편, 10정은 9주에 각각 하나씩 정을 둔다는 원칙 아래 고루 배치하였다. 다만, 한주(漢州)는 국경지대에 위치했고, 지역 자체도 넓었기 때문에 2개의 정을 배치하였다. 10정은 국방상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지방의 치안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군사조직이었다.

한편, 9주 가운데 특히 다섯 주에 배치된 군대로 5주서(州誓)가 있었다. 이는 기병집단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국경지대에는 3개의 변수당(邊守幢) 등 여러 군사조직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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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제도  

농업은 여러 산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므로, 농업생산의 토대가 된 토지는 경제적 부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관심은 성읍국가 성립 이전부터 싹트기 시작했고, 국가의 성립 이후에는 그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6세기 이래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성장에 따라서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요, 모든 국민은 왕신(王臣)’이라고 하는, 중국 고대의 이른바 왕토사상이 전해져서 모든 토지와 국민이 국왕에게 예속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토지가 국왕에 의해 독점된 것은 아니었다. 관직과 군직을 독점한 귀족들은 국가에 대한 공로로 식읍(食邑)·사전(賜田) 등의 명목으로 많은 토지를 받았고,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토지의 면적은 증가되어 갔다.

또한, 고급 관료들은 녹읍을 지급받았는데,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일정한 양의 조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특권도 묵인된 듯하다.

그러나 삼국통일 후 토지제도는 크게 변화하였다. 즉, 687년에 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2년 뒤에는 녹읍을 폐지, 대신 세조(歲租)를 지급하였다. 관료전은 다만 조의 수취만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성질의 토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개혁은 귀족들의 토지지배에 부수된 일반농민에 대한 지배를 제한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획기적인 조처였다. 다만, 귀족들의 반발이 너무나 컸고, 한편 이를 억누를만한 국가권력이 쇠퇴해 757년에는 녹읍을 부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때 관료전과 세조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귀족 관료들은 부활된 녹읍 이외에도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해 국가권력이 퇴조를 보이기 시작한 하대에는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릴만큼 재산을 축적해갔다.

한편, 전제왕권의 전성기였던 722년(성덕왕 21)에는 농민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는데, 이는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지급한 토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를 당나라의 균전제(均田制)에 입각한 토지 지급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농민들이 본래부터 자영하고 있던 농토의 소유를 국가에서 인정해 준 조치로 보기도 한다.

한편 이는 삼국통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크게 피폐해졌고, 더욱이 고리대자본의 성행으로 몰락하고 있던 농민층을 구제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책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농민을 전통적인 촌락공동체적 결집에서 분리시키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과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본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통일기의 서원경(西原京 : 지금의 충청북도 淸州지방) 지방 촌락 장적(帳籍)에 의하면, 촌에는 관모전답(官謨田畓)·내시령답(內視令畓)·마전(麻田) 등이 할당되어 촌민들에 의해 경작되었으며, 촌주는 촌주위답(村主位畓), 촌민은 연수유답(烟受有畓)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연수유답을 정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어쨌든 그보다는 농민들의 자영농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외무역

수공업 및 상업의 발달과 귀족사회의 번영은 대외무역을 크게 촉진시켰다. 신라의 대외무역은 조공이나 예물 교환형식으로 행해지는 공무역과 사절단의 수행원과 상인들이 사사로이 행하는 사무역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대상국가는 중국 특히 당나라이었으며, 그밖에 일본이 있었고 신라 말기에는 아랍 상인들까지 신라에 와서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쇼소인에 전해지고 있는「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는 752년 일본 조정이 신라 사신을 따라온 상인들로부터 매입한 물품을 적은 것인데, 당시 신라는 7척의 배에 7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 바 있다.

삼국통일 이전의 소규모의 대외무역이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해상교통이 한층 손쉽게 되었다.

또한 9세기에 들어오면 중앙 정치무대로의 진출이 막혀버린 지방세력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마침 당나라의 지방통제력이 약해진 데 힘입어 민간의 사무역이 크게 발달하여 차츰 공무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828년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한국 서남해안에 출몰하는 해적을 퇴치한 뒤 중국·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해 단기간 내에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당나라에 파견했으며,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라는 이름의 무역사절단을 파견해 신라·당나라·일본 사이의 삼각(三角) 무역을 주도하였다.

당시 신라인의 내왕이 빈번한 산둥반도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반자치적인 신라인의 집단거류지가 생겼다. 이를 신라방(新羅坊)이라 불렀고,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기관까지 설치되었다.

이들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장보고가 산둥성 원덩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가장 유명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교역이 번성해지자, 일본은 812년에 지쿠젠(筑前 : 지금의 九州 福岡縣 북서쪽)에 신라어학생(新羅語學生)이라는 통역생을 두었으며, 그 밖에 대마도(對馬島)에 신라역어(新羅譯語)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두의 사용  

고조선이 멸망되기 전에 진국(辰國)에서 중국의 한(漢)나라에 국서를 보내려 했다는 역사기록을 보면 남한지방에서 한자가 사용된 시기는 한이 낙랑군을 설치하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만 신라에서는 5세기의 고분에서 명문 자료가 출토되고 있으며, 6세기에 들어오면 많은 비석들이 만들어졌다.

신라인들은 문어(文語)로는 외국문자인 한자 및 한문을 쓰면서 구어(口語)로는 이와 그 구조를 전혀 달리하는 우리말을 쓰는 데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을 없애기 위해 일찍부터 독특한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을 발전시켰다.

물론, 이 표기법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전해진 것이지만, 신라인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이두(吏讀)를 성립시켰고, 7세기 후반에 설총(薛聰)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토(吐)를 넣은 이두문의 문법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755년(경덕왕 14)에 완성된 「신라 화엄경 사경 조성기(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표기법은 일본으로 전해져 그들의 음절문자인 가나(假名)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한문이 사용됨에 따라 자연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진흥왕순수비 비문은 현재 남아 있는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한문수준을 대표하고 있다.

국사의 편찬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행해진 국가적인 편찬사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545년(진흥왕 6)『국사(國史)』의 편찬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대신이던 이사부가 상주해 국왕의 재가를 얻은 뒤에, 왕명을 받은 거칠부(居柒夫)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해 왕자(王者)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편찬된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새로이 관찬사서를 편찬했을 법한데,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8세기 초 성덕왕 때에 진골출신의 정치가요 역사가인 김대문이『계림잡전(鷄林雜傳)』·『화랑세기』·『고승전(高僧傳)』·『한산기(漢山記)』·『악본(樂本)』등 많은 저술을 했다고 한다. 김대문의『고승전』외에도 여러 고승들의 전기가 나왔고, 김장청(金長淸)에 의해『김유신행록』과 같은 화랑 출신의 대표적 위인에 대한 전기도 저술되었다.

이들 저술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때에『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남아 있어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 말기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에 의해서『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등의 역사서가 편찬되었는데, 이 역시 현재 그 편린만 전해지고 있다.

유교의 발달  

신라시대에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유교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정비되지 않았으나, 교육적 기능을 지닌 화랑도가 도덕적 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화랑도가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유교덕목은 신(信)과 충(忠)이었는데,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확인된다.

이는 무엇보다도 당시 국가가 앞장서서 유교도덕을 널리 국민에게 권장했던 것과 관계가 있는데,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충신정성(忠信精誠)해 나라를 위해 절개를 다하는 인물을 표창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들 비문에서는 유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이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통일기에 들어오면 유교는 도덕정치의 이념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이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국학이 설립되었다. 본래 국학은 통일 직전인 651년에 설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여 사무직인 대사(大舍)를 두었으나, 682년에 예부 소속으로 정식 설치되어 3과(科)로 나누어 박사와 조교의 지도하에 유교경전을 교육하였다.

여기에 입학하는 학생은 나이가 15∼30세로서 대사 이하의 관등을 가진 관료이거나, 무위(無位)인 자에 한정되었으며, 수학연한은 9년이었다.

그리고 국학생들이 졸업할 때 학력을 시험해 3등급을 매겨서 관직에 나아가게 하는 제도가 788년(원성왕 4)에 생겼는데, 이것이 독서삼품과였다.

국학의 입학생은 주로 육두품이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유교를 도덕정치의 이념으로 주장하였다. 설총이 지은『풍왕서(諷王書)』(일명 화왕계(花王戒)라고도 함)나 혹은 강수(强首)의 입장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골품제 아래서 관계진출에 제약을 받고 있던 육두품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육두품출신 지식인들에 의해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나아가 이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최치원이 894년진성여왕에게 건의한 10여 조의 시무책 중에는 이 같은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비록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육두품 지식인들의 정치이념은 뒤에 오는 고려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신라의 종교  

신라시대의 종교를 보면 재래의 샤머니즘 외에 불교·도교 그리고 풍수지리설이 전래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불교의 발달  

불교는 5세기초,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를 통해 전해져 처음 북쪽 변경지방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전도자들은 당국의 박해를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소지마립간 때에 아도(阿道, 일명 墨胡子)가 일선(一善 : 지금의 경상북도 善山)지방에 숨어 지내면서 전도에 힘썼으나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그러던 중 521년에 중국 남조인 양(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두 나라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되면서 양나라 무제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해 비로소 불교가 신라왕실에 정식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흥륜사(興輪寺)를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던 법흥왕의 노력은 귀족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실패로 끝났고, 527년(법흥왕 14) 왕의 총신인 이차돈(異次頓)이 창사(創寺) 준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왕과 귀족세력간에 일정한 타협을 보게 되어 늦어도 535년경에는 마침내 공인을 받게 되었다.

불교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매우 적합했을 뿐 아니라, 귀족들의 특권을 옹호해주는 이론적 근거도 갖추었기 때문에 공인 후 국왕과 귀족세력 쌍방의 조화 위에서 국가불교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물론, 질병을 고친다든지 자식을 구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현세이익을 기원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전반적으로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으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호국경전인『인왕경(仁王經)』과『법화경(法華經)』이 매우 존중되었으며, 호국의 도량(道場)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왕궁 가까운 곳에 황룡사 같은 큰 사찰을 짓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찰에서는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함께 팔관회 같은 호국적인 행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선덕여왕 때 군사적 위기가 한껏 고조되었을 때, 중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와 황룡사의 사주(寺主)로서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불교를 주관한 자장(慈藏)은 신라 왕실이 석가와 같은 찰제리종(刹帝利種, 크사트리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불법(佛法)과 왕법(王法)을 일치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아가 호국을 위한 전쟁이 동시에 호법(護法)을 위한 싸움이라고 이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였다.

이처럼 승려들에게 있어서 호국과 호법이 일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전쟁을 적극 옹호하기까지 하였다.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원광 자신은 비록 전쟁을 용인한 적은 없으나, 진평왕의 명령을 받아들여 608년 ‘걸사표(乞師表)’를 쓰기도 했으며, 또한 임전무퇴(臨戰無退) 등 전투에 있어서 용감하기를 권하는 세속오계를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윤리적·실천적 의미의 현세구복적인 성격에서 점차로 종교적·신앙적인 의미의 내세적인 불교로 바뀌어갔다. 정토신앙(淨土信仰)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뚜렷한 증좌이다.

정토신앙은 통일 직전 왕경의 하급귀족이나 평민들 중에서 사회적으로 몰락해 지방으로 낙향해간 사람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원효(元曉)는 극락(極樂)에 왕생하는 데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여섯자를 극진한 마음으로 부르면 족하다고 설교하였다.

이로써 교리상의 발전은 물론, 신앙면에서도 위로는 국왕과 귀족을 비롯해 아래로는 일반민중에 이르기까지 급속히 퍼져갔다.

한편 통일기에는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갔다. 통일 전 국가불교가 융성했을 때의 승려들은 현실참여를 강요당하게 되어 교리연구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각덕(覺德)이 양나라에 다녀온 549년 이래 많은 승려들이 서학(西學)하고 돌아와서 교학불교(敎學佛敎)의 전개에 큰 자극을 주었다. 역시 6세기 후반에 진(陳)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이 진평왕 때 운문산 가슬사(嘉瑟寺)에 머물면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가르쳤던 것은 그 뒤 교학불교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통일기에는 불교에 대한 허다한 저술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이름난 것이 원효의『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판비량론(判比量論)』등이었다. 그밖에 원측(圓測)·의상(義湘)·도증(道證)·승장(勝莊)·경흥(憬興)·의적(義寂)·태현(太賢) 등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들의 저술은 내용이 풍부하고 이해의 수준이 높아서 중국 및 일본에 교리 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 교리의 대립을 가져와 여러 교파의 분립현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종래에는 흔히 5교(敎)라 하여 열반종(涅槃宗)·계율종(戒律宗)·법성종(法性宗)·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을 꼽아왔으나 최근에 이 5교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통일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의상의 화엄사상과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었다.

한편, 신라 말기에는 개인주의적 성격을 지니는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였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고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심성을 도야하는 데 치중했던 만큼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존하는 교종과는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선종이 처음 신라에 들어온 것은 선덕여왕 때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다지 이해를 얻지 못하다가 헌덕왕 때 도의(道義)가 가지산파(迦智山派)를 개창함에 따라 점차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9산(山) 선문(禪門)이 성립되었고,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크게 발달했다. 선종은 진골귀족의 지배체제에 반발하고 있던 지방호족들에게 자립의 사상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도교의 발달  

도가사상(道家思想)도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도가사상은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사상의 형태를 띠고 발달했는데, 산악신앙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경주 서악(西嶽)의 선도산 성모전설(仙桃山聖母傳說)은 선도와 인연이 깊은 서왕모(西王母)의 전설을 연상하게 한다. 진평왕 때 지상의 범골(凡骨)들과는 다른 장생불사의 신선이 되기 위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 대세(大世)의 이야기라든지, 혹은 김유신이 중악(中嶽) 석굴에서 신술(神術)을 닦은 것 등으로 미루어볼 때 선풍(仙風)이 성행하던 신라사회에 신선방술(神仙方術)을 곁들인 도교문화가 쉽사리 수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674년(문무왕 14)에 만들어진 경주 안압지의 세 섬은 삼신산(三神山)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되며,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은 유교와 더불어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설(說)을 섭렵했다고 하므로 그가 도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도가사상은 장생불사의 신선사상으로 관심을 끌었으나, 한편으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해 자연 속에 묻히려는 은둔사상도 발달하였다. 8세기 초 감산사(甘山寺)를 지은 김지성(金志誠)이나 당나라의 수도 장안 종남산(終南山)에서 도사로서 일생을 마친 당 진사과 출신의 김가기(金可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라 말기에 지방세력의 등장과 동시에 유행되기 시작한 사상에 풍수지리설이 있다. 이는 인문지리학의 지식에 예언적인 참위설(讖緯說)이 가미된 것이었는데, 이를 크게 선양한 것은 9세기 후반에 활동한 승려 도선(道詵)이었다.

그는 지형이나 지세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이른바 명당을 골라서 근거지를 삼거나 혹은 주택과 무덤을 지어야 국가나 개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수의 쇠왕과 순역(順逆)을 점쳤다고 한다. 이 설은 호족들 사이에서 크게 신봉되었으며,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3. 신라의 문학  

신라시대의 문학은 원시 심성(心性)의 가장 보편적인 정령관(精靈觀)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가무·제의에서 발생했는데, 크게 설화문학과 시가문학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설화문학과 시가문학 

설화문학에 속하는 것으로는 석씨 출신의 왕자 우로(于老)나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나물왕의 아들을 구출한 박제상(朴堤上) 등에 얽혀 있는 단편 사화(史話)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가 역사적 실존인물이고, 내용도 적국(敵國)인 왜에 대한 투쟁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일종의 영웅서사시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시가문학은 민요·향가 등 다양한 편이다. 민요풍을 띠는 시가로는「서동요(薯童謠)」와「풍요(風謠)」가 있다.

서동요는 백제무왕(武王, 혹은 東城王)이 신라선화공주(善花公主)와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 공주가 몰래 자신과 밀회를 즐긴다는 내용의 동요를 지어 신라 왕경 안의 민중들에게 모략적으로 유포시켰다는 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민중들이 어떤 왕실귀족의 떠들썩한 연애사건을 풍자해 지어낸 노래인 듯하다.「풍요」는 경주 영묘사 내의 조상(造像) 공사와 관련된 일종의 노동요로서 후대에까지 민중 사이에 불렸다.

향가의 발달  

시가문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진평왕 때 향가로 발전했으며, 통일기에는 많은 향가작가가 나타났다. 소박한 노래 속에 부드러운 가락을 담고 있어 국문학상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향가는 무격(巫覡)의 신가(神歌)에 대치되는 불교적인 노래였으나, 특히 주원적(呪願的)인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8∼9세기 경에는 많은 향가가 제작되어 888년에는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상대등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으므로 전체의 수를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삼국유사』에는 14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이름난 것이 승려 융천사(融天師)의「혜성가(彗星歌)」, 재가승(在家僧) 광덕(廣德)의「원왕생가(願往生歌)」, 낭도 득오(得烏)의「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 승려 월명사(月明師)의「제망매가(祭亡妹歌)」, 승려 충담사(忠談師)의「찬기파랑가(讚耆婆郎歌)」, 처용(處容)의「처용가」등이다.

향가는 주로 승려나 화랑과 같은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을 작가로 한 귀족사회의 소산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민중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어 국민 상하간에 널리 애창되었다.



음악과 춤의 발달 

시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악은 종교적인 성격을 농후하게 지녔다. 신라의 음악은 가야금의 전래를 계기로 크게 발달하였다. 본래 가야금은 대가야에서 만들어졌으나, 6세기 중엽에 악사 우륵(于勒)에 의해 신라에 전해져 마침내 대악(大樂, 일명 宮中樂)으로 채용되었다.

한편, 우륵은 12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가야지방에서 유행한 노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노래는 비록 지방색이 강한 시골음악이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대중의 속악(俗樂)은 아니었으며, 궁중이나 귀족들의 연회에 쓰일 만큼 세련된 음악이었다.

우륵의 제자 중에는 계고(階古)·법지(法知) 등이 유명했는데, 가야금에는 하림(河臨)·눈죽(嫩竹)의 2조(調)와 도합 180개나 되는 악곡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백결선생(百結先生)이 「방아타령(碓樂)」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야금 계통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통일기에도 가야금이 악기 중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으나, 이외에도 많은 악기를 사용하였다. 그 중 기본이 되는 악기는 가야금·거문고〔玄琴〕·향비파(鄕琵琶)의 3현(絃)과 대금(大笒)·중금(中笒)·소금(小笒)의 3죽(竹)이었으며, 여기에 박판(拍板)과 대고(大鼓)가 첨가되었다.

이 중 거문고는 본래 고구려의 악기였는데, 고구려가 망한 뒤 신라로 망명해온 일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전존되어 왔다. 이것을 옥보고(玉寶高)가 배워서 신조(新調) 30곡을 지었다고 하며, 뒤에 귀금선생(貴金先生)이 이를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

한편, 향비파는 서역의 악기였는데, 그것이 향악(鄕樂) 합주에 쓰이게 됨에 따라 향비파라 불리게 된 듯하다. 이른바 3죽은 향악기였는데, 당악(唐樂)의 합주에도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노래곡조에 맞추어 추는 춤은 음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신라시대의 음악은 악기와 노래에 춤이 가미된 일종의 종합예술이었다. 여기에는 농사의 풍작을 비는 축제 때에 징과 북 장단에 맞추어 요란스럽게 추는 군무가 성행했는데, 가야금이 전래됨에 따라 그 가무는 한층 세련되어갔다.

특히, 중국을 통해서 서역계통의 가면무용이 전해짐으로써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狻猊) 등 이른바 신라 오기(五伎)가 성립되었다. 산예는 사자춤이었다. 이 밖에도 헌강왕 때에 처용무와 상염무(霜髥舞)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가면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술의 발달  

신라시대의 미술은 크게 건축·조각·공예·회화·서예의 다섯 분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건축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릉·사찰·탑파(塔婆) 등이 있다.

① 왕릉 :

 삼국통일 이전 신라왕들은 생시의 지상의 주거생활을 그대로 지하의 무덤으로 옮긴다는 취지에서 고총(高塚)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현세의 생활도구가 고스란히 부장되어 있어 왕릉은 건축뿐만 아니라 공예 혹은 회화를 살피는 데도 보고의 구실을 하고 있다.

통일 이전 신라의 왕릉은 왕경 내의 평지에 수혈식(竪穴式) 적석총을 만들었다.

 6세기 후반경에는 왕경의 주변지역으로 흩어져서 산 밑이나 언덕 위에 만들어졌고,

 무덤의 양식 또한 횡혈식(橫穴式) 석실분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통일 후에는 무덤의 봉토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석제도(護石制度)가 크게 발전하였다

. 그밖에 무덤 둘레에 십이지신상을 비롯해 네 석사자, 방주석·난간을 배치하며,

무덤 앞에 석상(石床)을 놓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양쪽으로 문무석인(文武石人)과

석주를 배치하는 복잡한 형식이 완성되었다.



② 사찰 :

왕경 안에 흥륜사(興輪寺)·황룡사(皇龍寺)·영흥사(永興寺)·분황사(芬皇寺)·영묘사(靈廟寺)·

사천왕사(四天王寺)·황복사(皇福寺)·망덕사(望德寺)·봉덕사(奉德寺)·

창림사(昌林寺) 등 많은 거찰을 조영했다.



현재에는 모두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그 유지를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1970년대 황룡사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통일 이전 사찰의 가람배치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종래에는 황룡사가 백제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으로 보아 가람배치 역시 백제계통의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발굴결과 문·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것과 강당에서 회랑에 연결되는 것 등은

백제와 같으나, 금당만은 고구려계통의 삼금당식에 속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다만, 신라의 경우에는 세 금당을 탑의 동서와 북쪽에 배치한 고구려와는 달리

 이것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이밖에도 황룡사는 중문 남쪽에 남문을 또 하나 세웠으며,

 사찰의 경계에는 담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가람배치의 양식이 무척 다양해져,

사천왕사·망덕사·감은사·불국사 등은 금당 앞 양편에 두 개의 탑을 세워두는 이른바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중앙지향적인 느낌을 주고 있어

마치 당시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상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와 같은 경향은 경덕왕 때에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진 석굴암에서도 엿볼 수 있다.


③ 탑파 :

 탑파는 불교건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삼국통일 이전에는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때 백제사람 아비지(阿非知)가 2백여 명의 공장(工匠)을 지휘해

건축했다고 하는 황룡사의 구층목탑은 고려 때 몽고의 병란에 불타 없어졌다.

옛 기록에 의하면 목탑은 전체높이가 80m쯤 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탑의 기단에 배치된 거대한 심초석(心礎石)을 보더라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현재 통일 이전 탑파의 모습은 분황사의 모전탑(模塼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석재를 전형(塼形)으로 잘라서 전축(塼築)의 수법으로 축조했으며, 탑의 구조자체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번안했다.

통일기에 들어오면 대체로 기단부가 넓고 높아지며 탑신은 각층이 일정한 체감률을 가지고 조성된 균형 잡힌 방형 3층탑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덕왕 때에 건립된 불국사 석가탑을 비롯해 감은사터 삼층석탑, 고선사(高仙寺)터 삼층석탑, 원원사(遠願寺)터 삼층석탑, 갈항사(葛項寺)터 삼층석탑 등이 있다.

한편, 특수한 형태의 뛰어난 석탑으로는 석가탑(본래의 명칭은 무구정광탑)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불국사 다보탑과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화엄사(華嚴寺) 사자탑이 있다. 이밖에 독자적인 형식의 것으로 월성(月城) 정혜사(淨惠寺)터 십삼층석탑을 들 수 있다.

조각으로서는 불상과 각종 석조물이 있다.

① 불상 : 통일 이전의 불상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분황사탑에 조각된 8구의 인왕상(仁王像), 남산 장창곡(長倉谷) 삼화령(三花嶺) 미륵존상,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속칭 上人巖) 석굴의 마애상 등 모두 석불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574년(진흥왕 35)경에 만들어진 황룡사의 금동장륙삼존상(金銅丈六三尊像)은 신라 최대의 거불이며 동시에 걸작으로 이른바 신라 3보(寶)의 하나로까지 손꼽혔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국적을 분명히 알 수 없는 두 불상, 즉 탑형이 새겨진 높은 보관을 쓴 금동미륵반가상(국보 78호)과 얕은 삼산관(三山冠, 일명 三花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국보 83호)을 신라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통일 이전에는 조각가로 승려 양지(良志)가 있어서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을 비롯해 많은 불상과 와전(瓦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통일기의 불상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으나, 김지성의 발원(發願)으로 조성한 감산사의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은 중국·인도 불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라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는 걸작이다. 이는 굴불사(堀佛寺) 사면석불을 거쳐 석굴암의 불상에 이르러 그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② 석등·석조·당간지주 : 통일기의 조각작품으로는 불상 외에 석등·석조(石槽)·당간지주·비석·호석 등 다양한 편이다. 석등은 중흥산성(中興山城) 쌍사자석등과 법주사 쌍사자석등을 꼽을 만하며, 석조는 경주 보문동석조와 법주사 석연지(石蓮池), 당간지주로는 공주 갑사·망덕사터, 부석사터, 공주 반죽동(斑竹洞), 금산사(金山寺)의 것이 유명하다.

비석으로는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김인문묘비의 것으로 짐작되는 귀부가 남아 있다. 끝으로 원조(圓彫) 혹은 부조(浮彫)된 호석으로는 성덕왕릉 및 원성왕릉으로 짐작되는 괘릉(掛陵), 그리고 김유신묘가 대표적이다.

공예는 크게 금속공예와 도기·토기로 나눌 수 있다. 통일 이전의 왕릉은 구조상 도굴의 위험이 적기 때문에 많은 공예품을 남겨주고 있다. 대체로 5세기를 중심으로 이들 왕릉에서 나온 공예품들은 장신구·이기(利器)·마구 및 토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장신구 중에는 금관을 비롯해 금귀걸이·금띠·금가락지·금팔찌 등 순금제품이 많다. 이기에는 유리제품의 잔을 비롯해 금으로 만든 고배(高杯)·은잔·숟가락, 금으로 만든 바리〔盌〕·구리항아리·구리솥 등이 있다. 마구에는 금동(金銅)으로 만든 발디딤〔鐙子〕등이 있다.

통일기에 들어오면 불교의 융성 등 요인으로 공예기술이 더욱 발달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범종과 사리구(舍利具)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오대산 상원사종과 특히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속칭 奉德寺鐘)은 큰 규모에 기법이 너무도 완벽하여 한국종의 특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또한, 감은사터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구도 한껏 기교를 부린 뛰어난 것이다.

토기에 있어서도 모양이 다양해졌는데, 특히 유약을 바르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끝으로 와당은 종래의 수막새와당 일변도에서 암막새와당·서까래기와·귀면와(鬼面瓦) 등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고, 무늬도 연화문 일변도에서 보상화(寶相華)·인동(忍冬)·포도·봉황·앵무·원앙 등 다채로워졌다.

황룡사「노송도(老松圖)」와 분황사「관음보살상」, 단속사(斷俗寺)「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을 그렸다고 하는 솔거(率居), 8세기말경 당나라에서 활동한 김충의(金忠義), 신라 말기의 승려 출신인 정화(靖和)·홍계(弘繼) 등 화가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들의 작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통일 이전 신라의 왕릉은 내부구조상 현실(玄室)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고구려나 백제처럼 벽화를 남길 수 없었다. 다만, 1973년 천마총(天馬塚)에서 마구의 다래〔障泥〕에 그려진 천마도와 관모(冠帽)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환형(環形)의 화면에 그려진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와 서조도(瑞鳥圖)가 발견되어 옛 신라의 그림이 패기에 찬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영주 태장리(台庄里)의 한 석실묘에 연화도와 신장도(神將圖)가 일부 남아 있다. 통일기에는 불교회화 이외에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나 인물화가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는 755년에 완성된『화엄경』사경(寫經)의 불보살상도가 있는데, 석굴암 보살상들과 비슷한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통일 이전의 서예는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금석문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졸(古拙)한 것이었다. 통일기에 들어와 중국으로부터 왕희지체(王羲之體)가 전해지면서 한결 수준이 높아졌다.

신라시대 최고의 명필은 8세기에 활약한 김생(金生)으로 왕희지체에 따르면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의 서법(書法)은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와 서첩(書帖)인 전유암첩(田遊巖帖)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왕희지체의 대가로는 영업(靈業)이 유명한데, 그가 쓴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은 왕희지의 집자비로 오인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들어오면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해,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刹柱本記)」등을 쓴 요극일(姚克一)과 진감선사비문(眞鑒禪師碑文)을 쓴 최치원이 대표적인 명필로 손꼽히고 있다.

 


신라 연구사

1. 근대 이전 시기  

신라가 멸망한 뒤 그 왕조의 역사와 제도·전장(典章)·문물에 대한 첫 번째 정리사업은

고려왕조 초기에 시도되었다. 편찬시기와 편찬자를 잘 알 수 없는

소위『구삼국사』가 바로 그것인데, 다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전해오는 신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구삼국사』를 토대로 하여 여기에

중국 역대 정사(正史)의 한국 관련 자료를 크게 보충한 김부식의『삼국사기』(1145)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비록 유교의 도덕주의 사관에 입각해 종래의

고기(古記) 기록에 필삭(筆削)을 가한 혐의를 떨쳐버릴 수 없으나,

 불충분한 대로 신라의 역사와 지리·제도·문물 전반에 대한 일단의 집성으로 신라사 연구의 기본자료라 할만하다.

한편 이보다 140년쯤 뒤에 나온 일연선사의『삼국유사』는

 삼국 중 특히 신라시대의 불교신앙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적 기술이 풍부해 이 방면의 연구에서 거의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있는 각종 고기류와 사찰의 고문서, 금석문 자료를 보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신라시대의 자료가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자료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동국사략』(일명 삼국사략)이 편찬되고,『삼국사절요』에 뒤이어 그 일단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동국통감』등의 관찬 역사서가 편찬되었다.

하지만 주자학의 도덕적·교훈적 및 명분론적 윤리사관에 입각한 사료의 필삭과 사론(史論)이 행해졌을 뿐,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앞선 역사서의 불비(不備)를 보완하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조선시대 중기를 거쳐 후기까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흔히 실학의 시대라고 불리는 조선 후기에 이르면 옛 강역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어 고대의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가 크게 진전된 것은 사실이다.

이에 신라의 북방 한계선이 논의되고,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함흥 북쪽의 황초령(일명 草坊院)과 단천 소재의 마운령비가 이 문제를 검토하는데 있어 유력한 실마리를 제공해 그 뒤의 신라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신경준이『강계고』(1756)에서 이 점에 대해 언급한 뒤 김정희는 1816년과 1817년 두 차례에 걸쳐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 그 때까지 무학대사의 왕심비(枉尋碑) 혹은 몰자비(沒字碑)로 알려진 북한산비가 실은 진흥왕 순수비의 하나임을 확인하고, 이를 황초령비문과 대비하면서『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을 토대로 해 본격적으로 논한 것은 진정 신라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획기적 사건이었다.

현재 신라사 연구에서 금석문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임을 상기할 때, 김정희의『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阮堂先生全集 1)야말로 신라사 연구의 진정한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밖에도『삼국사기』신라본기에 매우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기록된 소위 박·석·김(朴·昔·金) 3성에 의한 왕실의 교립(交立)현상을 허목(許穆)이나 이종휘(李種徽)가 중국 삼대(三代)에도 없던 일이라고 예찬한 데 반해 정약용이 왕실 교체의 본질을 필경 권력에 의한 혁명으로 간파한 것은 초기 신라사의 실상에 근접한 해석으로 주목할 만했다.

2. 일제시대  

실학의 시대가 끝난 뒤 신라사 연구는 백년 이상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비로소 근대역사학의 성립 기반이 마련되기 시작하여 한국고대사 연구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라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저조했으며 더욱이 부정적이기까지 했다.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계열의 역사가들은 삼국 중 고구려의 상무적(尙武的)·자주적 기상을 찬양한 나머지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최고 지배층에 대해서는 사대주의자들이라 하여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 통치시대 신라사 연구에 종사한 것은 오히려 실증사학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본학자들의 연구활동에 맞서서 1934년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해 기관지를 발간하면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였다.

그 중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대표적인 성과를 보면, 이병도(李丙燾)는「삼한문제의 신고찰」(1934∼1937)이란 장편 논문에서 신라를 포함한 백제·가야의 국가 형성기반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고찰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상기(金庠基)는「고대의 무역형태와 나말의 해상발전에 대하여」(1934)에서 신라 통일기에 대외무역이 진행되는 가운데 9세기 전반 출현한 장보고의 해상왕국 청해진의 흥망사를 폭넓게 검토하였다.

또한 불교사 연구에서는 김영수(金映遂)가「오교 양종에 대하여」(1937) 및「조계선종에 대하여」(1938)에서 당에서 성립된 불교의 여러 종파가 신라에 전래된 뒤 교종의 5교, 선종의 9산으로 전개 발전해 간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한 것도 소중한 성과였다.

특히 최남선이 1929년 함남 이원군의 속칭 만덕산에서 조선 후기 이래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확인한 바 없었던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소위 마운령비를 답사하고, 학계에 정식으로 보고한 것도 그 후의 신라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한편 일본의 관학자들에 의해 진행된 신라사 연구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식민지 지배기구를 독점한 상황에서의 연구였던 만큼 그 성과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친 매우 포괄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에 의해 추진된

금관총(1921), 금령총(1924), 식리총(1924), 서봉총(1926) 등 신라시대 초기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라든지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 등에 대한 조사 연구활동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건축사학자 후지시마(藤島亥治郞)에 의한 경주의 신라 왕경(王京) 유지에 대한 조사연구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헌사학 분야에서는 이마니시(今西龍)가 1906년 최초로 경주를 답사한 이래 신라시대의 유물·유적이라든지 금석문·고문서, 그리고 골품제도나 갈문왕제도 등에 대해 꾸준히 연구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들은 그가 죽은 직후 정리되어『신라사연구(新羅史硏究)』(1933)로 간행되었다.

이 밖에도 이케우치(池內宏)는 삼국통일전쟁 시기의 역사지리 및 신라의 왕위계승과 무사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미시나(三品彰英)는 신라의 건국신화를 주변 여러 나라 혹은 민족의 신화요소와 비교해 연구하는 한편 민속학 내지 민족학의 지식을 원용해 화랑에 대한 전문 연구서를 내놓았다.

역시 스에마츠(末松保和)는 신라의 6부제도라든지 군사제도를 비롯해 신라의 건국문제, 상고(上古) 및 중고(中古)시기의 세계(世系)문제 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그 뒤 일본에서의 신라사 연구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3. 해방∼1960년대까지  

8·15 해방과 더불어 우리 민족은 비로소 한국사 연구의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다만 해방 직후의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한국사 연구를 위한 제반 여건은 매우 열악한 편이었다. 연구 인력은 부족했고, 연구를 위한 시설 및 자료 역시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는 신라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방 이후 3년간의 혼란 끝에 정부가 수립되어 차분한 연구분위기가 조성되어 갈 무렵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진행 중인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젊은 역사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학회가 결성되고 기관지로『역사학보』를 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장래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었다.

이와 동시에 일제시대부터 한국고대사 연구에 종사해 왔던 기성 연구자들(이른바 제1세대)도 잇따라 역작들을 발표하면서 학계를 이끌어 갔다.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였던 이병도는 신라시대의 원시집회소로부터 화백회의에 이르기까지 정치형태의 변화과정을 여러 방면에서 입증한「고대 남당고」(1954)를 비롯해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해방 이전 시기의 업적을 토대로 고대사 연구의 성과를 총정리해 진단학회 한국사 총서의 하나로『한국사-고대편-』(1959)을 세상에 내놓았다. 씨는 뒤에도 신라사를 비롯해 고대사에 관한 논문을 꾸준히 발표했는데, 이는『한국고대사연구』(1976)로 정리되었다.

또한 해방 전 고대 한·일관계사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이홍직(李弘稙)은『삼국사기』에 대한 엄정한 사료비판과 더불어 신라시대의 각종 금석문자료 및 고문서에 대한 면밀한 고증을 꾀하는 등 매우 견실한 학풍을 보여 주었다. 이 같은 업적은 씨가 사망한 직후에 나온 논문집『한국고대사의 연구』(1971) 신라편과 통일신라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나온 연구업적으로서 사회학을 전공한 이덕성(李德星)의 유고집 『조선고대사회연구』(1949)는 대학 강의안을 토대로 논문「신라왕계와 골품의 형성과정」(『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1, 1949)을 부록으로 싣고 있는 소품이지만 신라 초기의 왕위계승과 골품제도에 대해 흥미로운 견해가 엿보인다.

그러나 신라사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업적들은 해방 직후 학계에 새로이 등장한 이른바 제2세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개 역사학회 창립에 관여했고, 주로 그 기관지를 통해서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기백(李基白)은 「삼국시대 불교의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역사학보』6, 1954)를 통해 학계에 등장한 뒤「신라 사병고」(1957)·「신라 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1958)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의 정치제도와 신분제도에 대한 문제들을 일관성 있게 추구했는데, 이는 뒤에『신라정치사회사연구』(1974)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신라 지배세력의 변천과정과 더불어 국왕, 진골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상대등, 국왕 직속의 행정기관인 집사부 장관 시중을 정점으로 한 권력구조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뒤 씨는 신라사상사 연구에 착수해 유교사상 뿐 아니라 신라통일기의 정토신앙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는데, 그 성과는『신라사상사연구』(1986)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국가불교의 성립기로부터 민중불교의 대두에 이르기까지 신라불교사의 여러 양상이 전반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한편 김철준(金哲埈)은「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1952)을 발표한 이래 「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립과정」(1956)·「신라시대의 친족집단」(1968) 등 인류학적 방법을 신라사회사 연구에 적용한 논문을 발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뒤에『한국고대사회연구』(1975)로 정리되었다. 이 논문집에는 신라 상고(上古)의 세계(世系)와 기년에 대한 조정이라든가 녹읍(祿邑) 경영에서 볼 수 있는 귀족세력의 경제적 기반문제 그리고 후삼국시대 지배세력의 성격문제 등을 추구한 주목할 만한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변태섭(邊太燮)은 뒤에 고려시대사 연구로 주전공을 바꿨지만「신라 관등의 성격」(1954)·「묘제(廟制)의 변천을 통하여 본 신라사회의 발전과정」(1964) 등의 논문을 발표해 신라 관등제도에 있어서의 이른바 중위제(重位制) 문제라든지 골품제도의 사회적 변질 분화과정을 심도 있게 추구했다.

4. 1970년대 이후∼현재  

1970년을 전후해 이른바 제3세대 연구자들이 다수 등장해 앞선 시기의 연구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하려고 노력하였다.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신라사를 전공하는 연구자의 수효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것은 대학원 교육의 팽창 강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었고, 신라사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1988년 울진에서 봉평비가 발견되어 그 공동연구를 계기로 ‘한국고대사연구회’가 결성되고 머지 않아 한국고대사학회로 발전한 것은 당시의 제반 상황에 비춰볼 때 자연스런 추세였다.

이 같은 현상은 신라사 연구에서 세분화 내지 전문화 경향을 촉진했으며, 그 결과 1990년경을 전후해서 고도의 전문 주제를 선택해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향이 되었다. 이처럼 전문 연구자들이 급증함에 따라 2003년신라사학회가 조직되어 그 이듬해부터 계간지『신라사학보(新羅史學報)』가 발간되는 등 현재 신라사 연구는 크게 활기를 띠고 있다.

1970년경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40여 년 간의 연구성과를 개인별로 하나하나 검토해 볼 여유가 없으므로, 이를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몇 개 부문으로 나누어 각 주제별 역사학계의 문제의식이랄까 연구 상황을 개략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먼저 정치사 부문을 보면 해방 후 고고학계에서 이룩한 학문적 성과에 힘입어 신라국가의 형성 배경과 기원 후 5세기경까지의 상고시대 발전과정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점을 들 수가 있다. 이는 주로 경주와 그 인근지역의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가 기초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1970년대부터 국내 학계에 소개된 미국 신진화주의 인류학자들의 국가(State)사회에 이르는 과도적 단계로서의 수장제(首長制, Chiefdom) 사회론이 던진 충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밖에도 천관우(千寬宇)가 삼한의 국가형성을 다룬 일련의 논문에서 제시한 성읍국가로부터 영역국가로의 국가발달 단계론이 논의를 한층 활성화했다. 이에 따라 일부의 연구자들 사이에 『삼국사기』신라본기 초기 기사를 그대로 믿을 수 있다는 긍정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의 초기 연대기를 전면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이를 비판적인 입장에서 믿을 수 있는 것만을 가려내서 검토해야 한다는 수정론이 학계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정치제도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성과를 거둔 것은 역시 왕경 6부의 성립과정과 그 변화, 관등제의 성립 그리고 지방통치체제의 확립과정에 대한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68년경북 영천 청제비(菁堤碑, 536년 제작)의 발견에서부터 1970년 학계에 알려진 울산광역시 두동면 천전리의 서석명문(書石銘文, 525∼545년의 간지가 표시된 부분), 1978년 충북 단양 적성비(540년대 후반 건립)의 발견에 이어 1980년대 말에 잇따라 발견된 경북 울진 봉평리비(524년 건립), 경주 명활산성 작성비(作城碑, 551년 건립), 포항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비(503년 건립), 그리고 2009년 역시 포항 흥해읍에서 발견된 중성리비(501년 건립) 등 일련의 금석문 자료였다. 이들 동시대 자료의 발견으로 종래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던 520년(법흥왕 7)의 율령 반포를 전후한 시기의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실마리를 얻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대략 6세기 초 마립간시대로부터 대왕의 세기로 전환하고 있던 당시의 정치형태가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즉 5세기 말까지의 집권체제에 대한 평가가 종전에 비해 저하되어 이른바 6부체제설이 보다 힘을 얻게 되었고, 경위와 외위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관등제가 종전에 생각한 것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지방통치체제가 차츰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지방세력가로서의 촌주가 차지하고 있던 독자적인 위상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도 큰 성과였다.

정치제도 뿐만 아니라 각 시대의 구체적인 정치과정을 다룬 연구도 적지 않다. 통일 후 100년 간의 중대(中代)는 신라의 전 역사에서 보면 가장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볼 때도 가장 수준 높은 성취를 이룩한 황금시대였는데, 이 시대의 정치사 연구도 활발히 전행되었다. 일찍이 이기백은 이 시대의 정치형태를 전제왕권이라고 규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제3세대·제4세대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에 반론을 펴고 있어 논의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또한 종래 소홀하게 다루어져 온 하대(下代) 150여 년 간의 정치사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왕위계승의 문제라든지 지방세력가로서의 이른바 호족의 성장 문제가 깊이 있게 추구되고 있다. 특히 후삼국시대 동란기의 주역이었던 후고구려(일명 泰封) 궁예정권과 후백제 견훤정권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가 나오고 있다.

정치제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종래 주목하지 않았던 법당(法幢)군단이라든지 패강진(浿江鎭)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에 대해서도 이를 동아시아 역사의 전체적인 움직임 속에서 파악하려는 참신한 연구업적이 나오고 있다. 대외관계사 분야에서는 일찍이 신형식(申瀅植)이 숙위(宿衛)제도라든지 숙위학생 문제를 다루어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후속 연구자들은 근래 견당사(遣唐使)를 중심으로 한 한·중관계사를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재당(在唐) 신라인사회의 분석을 통해 장보고의 무역활동을 심도 있게 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 사회사 부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제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골품제적 신분 편성에 대한 문제이다. 실제로 골품제도는 신라 신분제도의 대본(大本)으로 일찍부터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왕실의 혈족집단, 특히 상속과 혼인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근래 6부제도의 변화와 관련해서 새롭게 파악할 필요성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그러니까 왕권의 성장에 따라 6부제도가 재편성된 결과 제도화된 것이 골품제도라는 인식인데, 다만 최고 골품으로서의 성골은 진평왕 때에 이르러 왕실의 독존적인 혈연의식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장된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또한 각각의 골품이 얻을 수 있는 최고 관등에 대한 법적 규제는 7세기 중엽 중국 율령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정비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나아가 삼국이 통일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왕경 6부인만을 대상으로 경위 관등을 부여했을 것이라는 데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異見)이 없는 듯하다.

경제사 부문에서 주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역시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있는 신라 촌락 장적(帳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는 1950년대 초의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된 뒤 일본인 연구자 하타다 타카시(旗田巍)에 의해서 기초적인 연구논문이 발표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제3세대 연구자들 사이에 이를 새롭게 재검토하자는 기운이 일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김기흥(金基興)·이인철(李仁哲)·이희관(李喜寬)·윤선태(尹善泰) 등에 의해 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하타다의 견해가 부분적으로 수정 내지 보완되었을 뿐 아니라 정전제와 녹읍제를 중심으로 한 통일기 토지제도 전반에 걸친 연구로 크게 확대되었다.

나아가 통일기에 들어와 정전 지급에서 볼 수 있듯이 종전의 인신적(人身的) 지배에서 토지에 대한 수취체제로 바뀌어갔다는 점을 들어 신라통일기를 한국사에서 중세사회의 출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대구분 논쟁도 제기되었다. 한편 토지제도 외에도 통일기의 수공업과 상업 그리고 대외무역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경제사 분야는 그 연구의 폭이 차츰 넓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문화사 부문에서 가장 활기를 띠고 연구가 진행되는 분야는 미술인데, 이는 새로운 자료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겠다. 1970년대 이른바 신라문화권 개발계획에 따라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곧이어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안압지에 대한 정화(淨化) 복원사업이 추진된 결과 많은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고분의 구조라든지 절터의 가람배치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대체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이 글의 문화편에서 간략하나마 기술했으므로 다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미술분야를 제외하면 문화사 부문에서 비교적 큰 연구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사에서 신라불교는 일종의 황금어장이라고 할 만큼 많은 연구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역시 문화편에서 간단히 기술했으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불교 교리를 중시하는 연구자와 불교사상 그 자체를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보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견해 차이에 대해서 조금 논의하고 싶다. 즉 이기백·안계현(安啓賢)·김두진(金杜珍) 등은 불교의 화엄사상이 중대의 전제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했다고 보는 반면 김상현(金相鉉)·김복순(金福順)·정병삼(鄭炳三)·남동신(南東信) 등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즉 화엄사상이 왕권의 안정적인 유지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삼국통일 이전 시기에 불교계가 한 것처럼 정치이념을 수식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한다.

신라 말기의 최치원에 대해서는 역사학계는 물론 한문학이나 사상사 특히 불교사 분야에서 변함없이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역사학쪽에서는 6두품 출신의 중국 유학생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유교정치이념과 더불어 역사가로서의 자세를 파고들고 있다. 그가 귀국한 뒤에 지은 불교 관계의 이른바 4산비문에 대해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 이지관(李智冠)·이우성(李佑成)·최영성(崔英成) 등에 의해 교감 및 주석 번역이 이루어졌고,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시문집인『계원필경집』은 『고운집』과 함께 2009년 한국고전번역원에 의해 국역 출간되었다. 최근 그에 대해서는 일본과 중국에서도 전문 연구서가 나올 만큼 구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끝으로, 현재의 신라사 연구 상황과 관련하여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항은 목간 자료를 활용하여 생활사 내지 심성사(心性史) 등 이른바 미시사(微視史) 분야로 심화되어가고 있는 점이다. 목간은 문서행정의 실무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문자 자료이므로, 아무런 가감없이 기록된 점이 특징이다. 금석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문이 대개 국왕 이하 지배층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송덕문(頌德文)의 성격을 띠고 있어 사실의 과장과 때로는 왜곡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것과 목간이 다른 점이다. 이처럼 당해(當該) 시대의 생생한 일차자료인 목간은 1975년 안압지 정화작업 때 처음 발견된 이래 월성 해자(垓子)를 비롯한 경주 시가지 여러 곳에서 출토된 바 있고, 1992년 이래 지금까지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6세기 중엽 무렵의 물품 꼬리표[荷札] 목간이 많이 나왔다. 그리하여 2007년에는 목간의 연구 및 학술조사를 목적으로 한 한국목간학회가 창립되어 기관지『목간과 문자』를 발간하고 있다. 앞으로 보다 많은 목간이 발견되고 또한 그 자체로 연구수준이 높아진다면 신라사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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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佛敎史序說』(鎌田茂雄, 東京大學校東洋文化硏究所, 1988)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鈴木靖民, 吉川弘文館, 1985)
•『朝鮮古代史硏究』(村上四男, 開明書院, 1978)
•『朝鮮鐘』(坪井良平, 角川書店, 1974)
•『新羅史基礎硏究』(井上秀雄, 東出版, 1974)
•『新羅文化論考』(齋藤忠, 吉川弘文館, 1973)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旗田巍, 法政大出版局, 1972)
•『古代朝鮮』(井上秀雄, 日本放送出版協會, 1972)
•『新羅·高麗の佛像』(中吉功, 1971 ; 增訂版, 二玄社, 1973)
•『朝鮮學論考』(藤田亮策, 藤田記念事業會, 1963)
•『滿鮮史硏究-上世篇 2-』(池內宏, 吉川弘文館, 1960)
•『新羅史の諸問題』(末松保和, 東洋文庫, 1954)
•『朝鮮の石塔』(杉山信三, 彰國社, 1944)
•『朝鮮上代建築の硏究』(米田美代治, 秋田屋, 1944)
•『新羅花郎の硏究』(三品彰英, 三省堂, 1943)
•『朝鮮の建築と藝術』(關野貞, 岩波書店, 1941)
•『新羅古瓦の硏究』(濱田耕作·梅原末治, 刀江書院, 1934)
•『新羅史硏究』(今西龍, 近澤書店, 1933)
•『朝鮮建築史論』(藤島亥治郎, 1930 ; 景印文化社 合冊, 1969)
•『桂苑筆耕集 校注』(党銀平, 中華書局, 2007)
•『七世紀中葉唐與新羅關係硏究』(拜根興,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3)


고려귀부 반대 저항한 칠원(漆原. 당시는 칠토 칠제국, 가야지역)의 자성이족



칠원(漆原)은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칠토현(漆吐縣)이었던 것을

757년(신라 경덕왕 16)이 칠제(漆隄)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 : 昌原)에 예속시켰으며,

고려 초에 칠원(漆原)으로 고쳐 1018년(현종 9) 김해(金海)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초기에 칠원현으로 고친 후,

선조 때 창원(昌原)에 속하였다가

광해군 때 현(縣)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관할의 칠원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칠원, 칠서, 칠북의 3면으로 편성되어

함안군(咸安郡) 칠원면이 되었다.



칠원읍(漆原邑)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함안군의 읍이다. 함안군의 동북에 위치하며,
북으로 칠서면, 칠북면과 접하고, 동남쪽으로 창원시에 인접하고 있다.
북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끼고, 남쪽으로 창원시와 인접하고 있다.

 칠서면, 칠북면과 함께
삼칠 (三漆, 칠원 (漆原), 칠서 (漆西), 칠북 (漆北)에서 칠 (漆) 자만 따서 만들어진 말)권을 이루고 있다.

칠원은 삼한시대에 변진 12개국의 하나인 접도국이었으며, 가야시대에 와서는 칠포국이었다.
신라시대에는 칠토현이라 하였으나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칠제현으로 개칭되었다.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칠원으로 칭하였으며, 1018년 현종 9년에 금주(김해)의 속현이 되었다. 1906년 함안군과 합병되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칠원면이라 칭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칠북면 운서리 및 운곡리의 4개마을이 편입되었고, 2000년 9월 29일 무기리 무기마을을 무기1리, 무기2리 마을로 분동하였다.(10개리 26개마을)



가야시대 낙동강 하류 및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안일대에 있던 8개의 소국.
8국의 이름은 다 전하지 않으나 《삼국사기》 물계자전(勿稽子傳)에 보이는 골포국(骨浦國 : 지금의 昌原 또는 馬山), 칠포국(柒浦國 : 지금의 咸安郡 漆原), 고사포국(古史浦國 : 지금의 鎭海 또는 固城), 그리고 《삼국유사》 권5 물계자전에 나오는 사물국(史勿國 : 지금의 泗川), 고자국(古自國 : 지금의 固城, 고사포국과 동일지역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보라국(保羅國 : 위치 미상) 등이 이에 속한다.

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8국이 가라(加羅)를 침략하려고 꾀하매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이 6부(六部)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잡아간 6,000명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이 때의 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국역삼국사기』(이병도, 을유문화사, 1977)
•「복원가야사」 상(천관우, 『문학과 지성』 28, 1977)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내립니다. 그 이유는 먼저 4세기에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 등에 의해 타격을 입어 중계무역의 주요 루트가 끊겼다는 점입니다. 고대 상업권은 고조선이 중국 한나라와 서로 차지하려고 무단히 애쓰던 대동강이 중계무역권이었습니다. 그 중계무역권을 장악하던 가야는 주요 무역국가들이 타격을 입자, 백제 및 왜와 연결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죠.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중계무역의 타격이 커지자 거제도 등 남해 지방에 있었던 8개의 소국들이 금관 가야의 지배에서 이탈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 8개 소국들을 통칭하여 포상 8국이라고 부릅니다.

   초기에 금관가야는 왜와 연결하여 무역경쟁국인 신라를 견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금관 가야가 위로는 아라 가야로부터 아래로는 포상 8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게되자 201년에 신라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죠. 결국 금관 가야는 신라의 도움으로 6 가야의 맹주국 위치를 다시 찾고, 포상 8국의 독립 의지를 꺽고자 하였던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신라는 김해 지방에 군사를 파견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라가 김해 지역에 진출하려면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와서 장산국이 있는 해운대를 거쳐서 김해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산국은 포상 8국과 연계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습니다. 이러한 장산국을 그대로 놔두고 신라군이 김해로 진출하면 중간에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장산국은 장산의 정상 부근에 있어서 공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죠. .

  따라서 신라군은 장산국 정벌을 위해 새로운 전략을 수립합니다.  신라는 어느 해 가을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기장에서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는 사신을 장산국에 보내서 감사의 선물을 바치고 물러갔죠. 이러한 군사 훈련을 매년 가을마다 수행하자 어느덧 장산국에서는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갑자기 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장산국을 기습하여서 멸망시켰습니다.

  209년 7월에는 포상 8국이 금관 가야를 침공하였고, 이에 신라는 내해왕이 태자를 중심으로 대병을 파견하여 금관 가야를 도왔습니다, 이때 잡힌 포로가 6천명에 이르렸다고 하니 이 전쟁도 큰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을 가르켜 삼국사기에는 포상 8국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상 8국의 난이 평정된 후의 금관 가야는 신라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고, 가야 연맹은 점차 쇠약해지게 되었죠.
 

   가야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왜와 연결을 시도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도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넘어온 왜를 격퇴하고, 가야까지 침공하면서 전기 6가야 연맹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 기사를 왜곡하고, 그것을 예로 들어 일본이 가야 또는 백제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가야사에 있어 일본이 점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고성군의 연혁



삼한시대에 변진12국 중의 고자미동국 또는 포상8국 중의 고자국으로 비정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6가야 중 소가야국이었으며, 그 유적으로 보이는 고분군이 고성읍과 동해면 등에 남아 있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고자군(또는 고자국)을 두었으며, 757년에는 고성군으로 고쳐 강주(진주)에 속했다. 이때 영현으로 사수현(사천시)·상선현(뒤에 영선현 지금의 영현면 일대)을 거느렸다. 고려에 들어 995년에 고주자사를 두었다가 1018년 현령으로 강등시켰다. 1266년 지주사로 승격되었으며, 공민왕 때 현령을 파견한 후 지속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고성현은 현재의 통영시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지금의 고성군보다 넓은 영역을 관할했다. 또한 당시 남해안의 방어상 중요한 요지였음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입증되어, 1604년 거제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거제현 두룡포(지금의 통영시)로 이전했다가 두룡포가 1617년 고성현으로 이관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진주부 고성군이 되었으며 수군통제영이 폐지되었다. 1896년 13도제 실시로 경상남도에 소속되었다.

1900년 통제영이 있던 고성군 남쪽 지역을 분할하여 진남군을 신설함으로써 고성군의 영역이 대폭 줄어들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 때 진주의 두입지였던 문선면·남양면·영현면·영이곡면·오읍곡면·개주면 등이 편입되어 면적이 다소 넓어졌으나, 남양면(지금의 사천시 중심가)은 1912년 사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용남군의 동해면이 편입되었다. 1938년 고성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함안군  咸安郡
개관
동쪽은 창원시, 서쪽은 의령군·진주시, 남쪽은 고성군, 북쪽은 남강과 낙동강을 경계로 의령군과 창녕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8°16′∼128°35′, 북위 35°09′∼35°23′에 위치한다. 면적은 416.64㎢이고, 인구는 6만 915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8개 면, 248개 행정리(88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말산리에 있다.
 

역사
이 지역은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두 강의 유역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함안면·칠원읍·군북면 등지의 지석묘군(支石墓群)이 있으며, 그 분포 지역과 양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활발했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삼한시대에는 변진 안야국(弁辰安耶國)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아라가야(阿羅加耶), 즉 6가야의 하나로 손꼽히는 유력한 나라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라가야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현재 가야읍 말산리·도항리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그들이 남긴 유적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함안군은 법흥왕이 많은 군사로 아시라국(阿尸良國, 阿那加耶라고도 함)을 정벌하고 그 땅으로 군(郡)을 삼은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법흥왕 때의 신라 세력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아시량국은 경주에 가까운 지방의 이름과 혼동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아라가야가 멸망한 시기에 대하여도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신라가 창녕지방에 진출하였던 진흥왕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신라는 757년(경덕왕 16) 이곳을 함안군으로 개칭하고 현무(玄武)·의령(宜寧) 등 2개 현을 영현으로 삼았다. 본래 현무현은 소삼현(召彡縣)이고 의령현은 장함현(獐含縣)인데, 이 때 각각 개칭한 것이다. 한편, 지금의 칠원지방은 본래 칠토현(漆吐縣)인데 이 때 칠제현(漆隄縣)으로 개칭하여 의안군(義安郡)의 영현이 되었다.

983년(성종 2)함주(咸州)로 개칭하여 자사(刺史)라는 지방관을 두었다가 1018년(현종 9)함안군으로 환원하여 금주(金州: 지금의 金海)의 속군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감무를 설치했다가 1373년(공민왕 22) 군으로 환원하였다. 칠제현은 고려 초에 칠원(漆原 또는 漆園)으로 개칭하고 1018년금주의 속현이 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현에 감무를 두었는데 이 때 금주의 영현이었던 구산현(龜山縣)이 칠원의 영현으로 편입되었다. 현무현은 소삼부곡(召彡部曲)으로 강등되었는데, 그 상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1413년(태종 13)칠원현에 현감을 두었다. 1505년(연산군 11)함안도호부(咸安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음 해 군으로 환원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의 호구수는 함안군 732호 3,266인, 칠원현 337호 1,330인, 구산현 104호 300인이었다.

단종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는 명망이 높은 선비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이곳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 곳 출신으로 중종 때의 학자인 주세붕(周世鵬)은 풍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43년(중종 38)순흥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뒤의 紹修書院)을 세웠다. 1587년(선조 20) 문명이 높았던 정구(鄭逑)는 함안군수로 있으면서 지방교화에 진력하였으며 그 때 사귄 인사와 문인들 중에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적지 않다. 『함주지(咸州誌)』는 그가 군수 재임 시 편찬한 읍지이다.

임진왜란 후 칠원현은 읍세가 약해져 1601년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에 병합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다. 지금의 창원시 삼진지방(진동면·진전면·진북면)은 1601년(선조 34)∼1617년, 1629년(인조 7)∼1639년의 2차에 걸쳐 함안군에 편입되었다가 창원부로 복귀하는 등의 복잡한 변동을 겪었다. 『함안군읍지』와 『칠원현읍지』에 의하면, 당시의 호구 수는 함안군 5,198호 2만 5362인, 칠원현 2,567호 1만 953인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의 지방관제 개편으로 칠원현이 군으로 개칭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에 따라 칠원군은 함안군에 통합되고, 진주군의 상봉·하봉·사봉 등 3개 면을 편입하였으며, 구산면이 창원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주군에서 편입된 3개 면이 다시 진주군으로 이관되고, 1933년죽남면이 군북면에 편입(10개 면)되었다. 1944년여항면에 산서출장소를 설치하여 10개 면·1 출장소가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낙동강방어선의 최전선으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 이 지역에서 전개되기도 하였다. 전란 후인 1954년 군청을 함안면에서 현 위치인 가야읍으로 이전하였다. 1969년 이후 낙동강 및 남강 상류에 다목적댐이 계속 건설되면서 지역개발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973년 남해고속도로가, 1977년에는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이 지역 교통사정이 크게 개선되었다.

1971년 5월 10일여항면에 산서(山西)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대산면 산서리가 가야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가야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0년군북면에 월촌(月村)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 2월 15일칠북면 운서리와 운곡리가 칠원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여항면 산서출장소가 의창군(지금의 창원시) 진전면으로 편입되었다. 1999년군북면 월촌출장소 폐지하였고 2015년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2읍 8면의 행정구역으로 오늘날까지 이른다.
 

유물·유적
불교문화재인 군북면 하림리의 방어산마애불(防禦山磨崖佛, 보물 제159호)은 801년(애장왕 2)의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어서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군북면 사촌리의 원효암칠성각(元曉庵七星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호), 함안면의 함안대산리석불(보물 제71호), 칠북면 영동리의 장춘사석조여래좌상(長春寺石造如來坐像,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호)·장춘사오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8호)·장춘사대웅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6호), 함안면 북촌리의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咸安主吏寺址獅子石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 등은 모두 고려시대의 작품들이다.

함안면 봉성리의 함안향교(咸安鄕校,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1호)와 칠원읍 용정리의 덕연서원(德淵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7호)이 있다. 또한, 함안면 괴산리의 무진정(無盡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은 조려의 손자 참(參)이 은퇴 후 정자를 세우고 연당을 파서 꾸민 한국식 정원이다.

이 밖에도 대산면 장암리의 낙동강변에 반구정(伴鷗亭), 용화산(龍華山) 기슭에 합강정(合江亭), 군북면 원북리에 채미정(菜薇亭) 등 유서 깊은 정자가 많이 있다. 산인면 운곡리에 오비각(五備閣,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2호), 대산면 서촌리에 악양루(岳陽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0호) 등이 있다.

함안면 봉성리·괴산리, 칠원읍 예곡리, 군북면 동촌리, 칠서면 회산리 등지에 지석묘들이 남아 있다. 가야시대의 유적은 가야읍의 함안도항리고분군(사적 제84호)·함안말산리고분군(사적 제85호)·가야리고분군 등이 있는데, 말산리 제3·4호분은 1917년에 발굴, 조사되었다. 한편, 우리 나라 서원의 창설자인 주세붕을 모신 주세붕묘역(周世鵬墓域, 경상남도 기념물 제33호)은 칠서면 계내리에 있고, 주세붕영정(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은 무릉리의 무산사(武山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3호)에 봉안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에는 많은 전적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칠서면 무릉리의 무릉잡고책판 및 수구집·구봉집책판(武陵雜稿冊板·守口集龜峰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가야읍 신음리의(謹齋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대산면 장암리의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澗松文集冊板·金羅傳信錄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 산인면 모곡리의 백운래홍첩(白雲來鴻帖,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칠원읍 무기리의 국담문집책판(菊潭文集冊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2호) 등이 대표적이다.

칠북면 화천리와 검단리에는(咸安化川農樂,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 등이 전해 온다.

칠원읍에는 함안무기리연당(咸安舞沂里蓮塘, 중요민속자료 제208호)·함안무기리주씨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 군북면 원북리에는 조선 단종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생가인 어계생가(漁溪生家,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하림리에는 그 일가 5대의 부부묘가 한 묘역에 설치되어 있는 조안묘소(趙安墓所, 경상남도 기념물 제34호)와 동산정(東山亭)이 있다.

『함주지』에서는 아라가야의 옛 궁터를 가야읍의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다. 산성으로는 함안면과 가야읍에 걸쳐 있는 함안성산산성(사적 제67호)을 비롯하여, 함안면 대산리의 동지산성(冬只山城), 가야읍 사내리의 봉산성(蓬山城), 칠서면 무릉리의 무릉산성 등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산성들이 있으며, 함안면의 함안읍성은 삼포왜란에 대비하기 위해 1510년(중종 5)에 축성한 것이다.

가야읍 검암리에는 조순장군비(趙純將軍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8호)가 있다. 군북면 명관리에는 도천재단서죽백(道川齋丹書竹帛,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 산인면 내인리에는 박진영장군유품(朴震英將軍遺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다.

또한 칠원읍 용산리에 있는 함안층의 새발자국화석(咸安層――化石, 천연기념물 제222호), 칠북면 영동리의 함안칠북면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319호), 법수면 대송리의 함안법수면의 늪지식물(천연기념물 제346호), 여항면의 함안외암리공룡발자국화석(경상남도 기념물 제68호)과 산인면 모곡리의 고려동유적지(高麗洞遺蹟址,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재들이다.
 

민속
이 고장에는 씨름·그네뛰기·소싸움·백중놀이·두레삼·유두놀이·달불놀이 등 농경지역의 특성을 살린 민속놀이들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단옷날에는 씨름대회나 그네뛰기가 성대히 열리며, 특히 소싸움은 중부 경상남도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기를 모으는 놀이이다. 백중은 이 지역에서 농부날·초연(草宴)·풋굿·호미씻기 등으로 불리며, 이 날 농사가 잘 된 집의 머슴을 우두머리로 삼아 삿갓을 씌우고 황소를 태워 마을을 돌게 하고 주인은 주식을 푸짐하게 낸다.

서부 경상남도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두레삼의 양속은 현재 그 흔적을 찾기 힘드나 두레삼의 각종 민요는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다. 유두에는 유두연(流頭宴)이라 하여 이웃·친척들이 냇가나 계곡에 나가 술과 음식을 차려 먹으며 하루를 즐긴다. 대산면 대사리에서는 마을사람들이 정월 대보름날 안곡산성(安谷山城)에 모여 달불놀이를 즐긴다.

삼칠지역(칠원읍·칠서면·칠북면)의 대표적인 민속행사인 삼칠민속줄다리기는 윗줄과 아랫줄로 팀을 구성하여 3전2선승제로 진행되며, 윗줄은 구성·유원·장남·오곡·예곡·용정·무기리 주민으로 구성하고 아랫줄은 용산·운서·운곡리와 칠북면 및 칠서면 주민으로 구성된다.
이 고장에서는 음력 10월 10일이나 정월 보름날 주로 노거수를 중심으로 동제를 지낸다. 그 대표적인 예를 칠북면 영동리의 회화나무, 가야읍 검암리와 대산면 서촌리의 느티나무, 칠서면 무릉리의 은행나무 등에 대한 동제에서 찾을 수 있으며, 특히 함안면 봉성리의 느티나무는 수나무로서 득남의 영험이 있다 하여 이를 바라는 부녀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무릉리의 은행나무는 주세붕이 심은 것이라 전하며 위인전설과 습합되어 제사의 대상이 된다. 대산면 장암리 장포(長浦)마을의 왕버들나무는 이무기의 승천설화를 간직한 것으로, 가뭄이 계속되면 동민들이 이 나무를 중심으로 기우제를 올린다. 그 밖에 대산면 서촌리의 느티나무는 잎의 발아를 보고 농사의 길흉을 점칠 수 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 옛말에 ‘울고 왔다 울고 가는 함안 원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부임하는 도중에 험한 산세를 보고 낙심하지만 살아보면 순후한 풍속과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서 이 고장을 떠나게 될 때에는 도리어 섭섭해한다는 것이다. 경상남도 사람들은 함안군을 두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땅’이라고들 한다. 즉, 이 고장은 서북쪽이 낮고 동남쪽이 높은 까닭에 물줄기가 모두 남강이 있는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 때문에 왕조시대에는 이 고장을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불경스런 땅인 ‘역수(逆水)의 고장’이라 하여 조정으로부터 무척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 고장에는 서부 경상남도처럼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는 구비전승보다 윤리적이고 교화적인 내용의 설화가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다. 가령 늙은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외아들을 삶아서 바쳤는데 나중에 보니 동자삼(童子蔘)이더라는 효도담이나, 병든 시어머니가 겨울에 전복을 원하자 하늘의 덕으로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는 「복정유래담(鰒井由來譚)」(산인면), 늙은 어머니를 위해 효자가 심은 앵두나무가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효자나무전설」(가야읍), 왜구가 겁탈하려고 달려들자 죽음으로 정조를 지킨 처녀의 화신이라는「절부목전설[節婦木(乳木)傳說]」(군북면) 등의 설화가 그 예이다.

또한 시화류에 자주 등장하는 장성기생 노아(蘆兒)의 이야기도 있는데, 고을 수령들이 노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나라에서 탄핵사를 파견, 치죄하려 했으나 오히려 노아의 꾐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이를 ‘함안차사’라고 하는 것은 ‘함흥차사’고사에서 음과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경상남도 전역에 퍼져 있는 「재산을 아끼기 위하여 지세를 바꾸다 망한 이야기」가 산인면 입곡리의 하천과 연결되어 전승되고 있으며, 칠원읍의 「장사바위전설」은 두 장사의 힘겨루기 유형을 표본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개운지복(開運之福), 파수(巴水)곶감에 얽힌 전설(傳說), 파산익삼(巴山翼蔘), 동자삼과 외아들, 부자공씨와 도사, 상사나무에 얽힌 전설 등이 있다.

이 고장에는 논이 비교적 많은 관계로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따라서 농업노동요가 발달하였는데, 이 고장에서는 모내기노래를 「정자」라고 한다. 점심참이 올 때가 되어 독촉하며 부르는 「모내기노래」를 들어 보면 “삼동이야 삼동이야 맛보느라 늦었는가/ 뒤축없는 신을신고 끄이느라 늦었는가……남산이라 저모롱이 점심이라 더디오네/ 미나리라 시금초라 맛보니라 더디온다/……늦었다오 늦었다오 점심참이 늦었다오……”처럼 부른다. “외와내자 외와내자 이모판을 외와내자/ 들어내자 들어내자 이모판을 들어내자……”는 「모찌기노래」이다.

「보리타작노래」는 구(句)마다 ‘에호’라는 뒷소리를 붙여 부르는데 “일꾼들/ 어이/ 도리깨 들게/ 어이/ 보리타작 우리하세/ 어이/ 에호에호 에호에호/ 에호/ 어깨가 지쑥/ 에호/ 오김이 주춤/ 에호/ 힘써 때거라/ 에호/ 넘어간다 보리도/ 에호/ 여기도 알보리/ 에호/ 저기도 알보리/ 에호/……뒤으로 물러서/ 에호/ 발로 골라라/ 에호/ 도리깨 돌려라/ 에호/ 에호에호 에호에호/ 자 우리 쉬어가지고 한잔 먹고 합시다.”처럼 한다. 앞소리꾼이 노동의 리듬에 맞추어 흥을 돋우기도 하고 동작을 지시하기도 하면서 앞소리를 메긴다.

이 고장에서 불리는 「망께소리」를 들어보면 “어이여라차/ 천근망께는 공중에 놀고/ 어이여라차/ 망께소리를 잘도하면은/ 술을 많이 준단다……”처럼 부른다. 부녀자들의 「베틀노래」는 “바람은 솔솔 부는날 구름은 둥실 뜨는날/ 월궁에 노던선녀 옥황님께 죄를 짓고/ 인간으로 귀양와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하실일이 전혀없어 금사한필 짜자하고/ 월궁으로 치치달아……”처럼 부른다.

경상남도 일원에서 전승되는 「담바귀타령」이 이 고장에서도 불리는데 “귀야귀야 담바귀야/ 너국을랑 어디두고 조선국에 나왔노/ 조선국이 병이많아 약줄라고 내가왔다/ 그씨좋다 씨를받아 담장안에 모를 붓고/ 단장안에 웽기내여 애숭대숭 전잎따서/ 애양애양 엮어내어 쎄글안에 걸었다가……살림맛이 요만하면 패가할이 뉘있을고……”처럼 담배씨를 재배하여 피우기까지의 정황을 노래하고 있다.



읍·면

1. 가야읍(伽倻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42.21㎢, 인구 1만 9409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말산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여항산 바깥쪽이 되므로 산외면(山外面)이라 하여 말산리 등 3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우곡면(牛谷面)·산내면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아라가야의 옛터가 되므로 가야면이라 하였다. 1954년 군청이 함안면에서 가야면 말산리로 이전되면서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1973년대산면 산서리가 편입되고,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동부에는 조남산(鳥南山, 139m), 북서부에는 천제봉(天祭峰, 225m)·계티고개·장고개, 동북부에는 배나무실고개가 있어 읍의 경계를 이룬다. 검안천이 읍의 동쪽으로 흐르고 광정천(廣井川)이 중앙을, 신음천(新音川)이 북서부를 각각 북류한다.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며 수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수도작이 발달하였으며,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며, 그 밖에 채소류와 참깨·들깨 등의 특용작물 재배와 배·복숭아·사과 등의 과수재배가 활발하다. 최근에는 수박 참외, 방울토마토 등 시설원예 농업으로 경제작물을 재배하여 수출에 활기를 띠고 있다. 교통은 읍의 북부를 남해고속도로가, 남부를 지방도 및 경전선철도가 동서로 달리고 있다.

문화유적은 말산리와 가야리의 고분군, 광정리의 성산산성, 사내리의 봉산성, 검안리의 조순장군비·동산정, 신음리의 근재집책판 등이 있다.

말산(末山)·검암(儉巖)·광정(廣井)·도항(道項)·신음(新音)·설곡(舌谷)·춘곡(春谷)·사내(沙內)·가야(伽倻)·묘사(苗沙)·산서(山西) 등 11개 리가 있다.

2. 칠원읍(漆原邑)

군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50.61㎢, 인구 2만 107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구성리이다. 본래 칠원군의 지역으로 칠원현청이 있었으므로 현상리면(縣上里面)이라 하여 용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원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서면 회문리·신산리의 각 일부와 내서면(內西面) 예곡리를 합하여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83년칠북면의 운서·운곡 등 2개 리가 편입되었다. 지형상 면의 동부와 서부가 모두 산지이며 중부에 있는 약간의 평탄지역으로 광로천이 흘러간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산지에서는 고령토가 약간 산출될 뿐 특산물은 없다. 교통은 구마고속도로와 대구∼마산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예곡리의 지석묘, 구성리의 성지·삼층석탑, 용산리의 사지, 무기리의 사지·석조부도·삼층석탑·연당·주씨고가·국담문집책판, 용정리의 덕연서원 등이 있으며, 용산리에 천연기념물인 새발자국 화석이 있다.

구성(龜城)·용산(龍山)·유원(柳原)·장암(藏巖)·오곡(梧谷)·예곡(禮谷)·용정(龍亭)·무기(舞沂)·운서(雲西)·운곡(雲谷) 등 10개 리, 26개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3. 군북면(郡北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80.47㎢, 인구 6,79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덕대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안도면(安道面)이라 하여 중촌리 등 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곡면(大谷面)의 신창리 등 7개 리와 남산면(南山面)의 봉남리 등 2개 리를 합하여 군북면이라 하였다. 1933년 죽남면(竹南面)의 10개 리가 편입되었고, 1980년 월촌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진주 경계인 남쪽에는 오봉산·괘방산(掛榜山, 451m) 등이 있어 대체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북쪽은 남강유역으로서 평야지대를 이룬다. 이 평야지대의 최저지대가 유현리의 유전늪인데 지금은 이 늪도 매립하여 공장이 들어서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배추·무의 생산이 많다. 교통은 남해고속도로가 면의 북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의령∼마산간 국가지원지방도 67호선, 지방도 1004호선등과 연계되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문화유적은 동촌리의 지석묘군, 명관리의 지석묘군과 도천재단서죽백, 하림리의 방어산성·조안묘소·방어산마애불, 사촌리의 원효암 칠성각·심원사지·삼층석탑, 영운리의 송방사지(松放寺址)·송방사지오층석탑, 원북리의 어계생가·채미정 등이 있다.

덕대(德垈)·중암(中闇)·소포(小浦)·동촌(東村)·사촌(舍村)·오곡(烏谷)·명관(明館)·모로(慕老)·사도(沙道)·장지(長池)·유현(柳峴)·월촌(月村)·박곡(朴谷)·수곡(藪谷)·영운(迎運)·하림(下林)·원북(院北) 등 17개 리, 37개동 120반 92자연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4. 대산면(代山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47.56㎢, 인구 3,94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평림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내대산면(內代山面)이라 하여 평림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대산면(外代山面)의 산서리 등 6개 리를 합하여 대산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73년산서리가 가야읍에 편입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남쪽은 안국산(安國山, 338m) 등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과 북쪽에는 남강과 낙동강에 면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토질이 사질 퇴적토로 이루어진 평야지대로서 수박하우스 재배지로는 천혜적인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655㏊ 수박하우스 집단재배지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다. 교통은 칠원면∼의령군 부림면 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대사리의 안곡산성(安谷山城), 서촌리의 아현사지(阿峴寺址)·악양루, 장암리의 합강정·반구정과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 등이 있다.

평림(平林)·부목(富木)·대사(大沙)·옥열(玉悅)·하기(下基)·서촌(西村)·구혜(九惠)·장암(長巖) 등 8개 리가 있다.

5. 법수면(法守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4.61㎢, 인구 3,19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우거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대산면(大山面)이라고 하여 걸산리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륜면(馬侖面)의 내(內)·외(外)·주물(主勿)·우거(于巨) 등 4개 리를 합하여 법수산의 이름을 따서 법수면이라 하고 9개 리로 개편하였다. 면의 남쪽에 천제봉 줄기의 산지가 있을 뿐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서북부를 남강이 둘러싸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교통은 가야면∼의령군 정곡면 간의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강주리에 조려묘, 윤내리에 한극검(韓克儉)의 정려가 있으며, 대송리에 천연기념물인 늪지식물이 있다.

우거(于巨)·강주(江州)·윤내(輪內)·윤외(輪外)·주물(主勿)·대송(大松)·백산(白山)·사정(沙亭)·황사(篁沙) 등 9개 리가 있다.

6. 산인면(山仁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6.89㎢, 인구 2,888(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모곡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화개산 아래라 하여 산익면(山翼面)이라 하고 입곡리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인면(安仁面)의 송정리 등 5개 리와 외대산면(外大山面)의 산서리와 옥지리 일부, 산외면(山外面)의 검암리 일부를 합하여 산익과 안인의 이름을 따서 산인면이라 하고 7개 리로 개편하였다. 대체로 동·남·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고, 서부는 약간의 평야지대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농공병진된 지역으로 2차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동부에는 1991년 산인특별농공단지가 조성되어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서부에는 수리시설이 용이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비닐하우스 시설을 통하여 각종 원예작물의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경전선철도가 동서로 면의 중앙을 횡단하고 있으며, 남해고속도로와 의령∼마산간의 지방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내인리의 박진영장군유품, 신산리의 포덕산성(飽德山城), 모곡리의 백운래홍첩·고려동유적지·문암산성(門巖山城), 입곡리의 성점산성(城岾山城)·자미정(紫薇亭) 등이 있다.

모곡(茅谷)·입곡(入谷)·신산(新山)·송정(松汀)·내인(內仁)·부봉(釜峰)·운곡(雲谷) 등 7개 리가 있다.

7. 여항면(艅航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28.35㎢, 인구 91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외암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두 골짜기의 물이 합친다 하여 병곡면(幷谷面)이라 하고 주동리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비곡면(比谷面)의 6개 리와 양전면(良田面)의 일부를 합하여 면 내의 산 이름을 딴 여항면이라 하고 8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71년 산서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9년 산서출장소가 의창군 진전면(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에 편입되었다. 동부에 광려산(匡廬山, 720m), 남부에 서북산(西北山, 739m)·봉화산, 북부에 여항산 등 비교적 높은 산이 솟아 있으며, 주동리에서 발원한 쌍계천은 검암천의 상류로 남강의 지류가 된다. 여항산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국토를 지켜주었던 요충지로 호국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성산이다.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진 이 고장은 농작물 수확이 다른 면에 비하여 뒤떨어지며 특산물도 없다. 수도작과 축산업이 주민의 주 소득원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다. 교통은 가야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간의 지방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주서리의 주리사지(主吏寺址), 외암리의 조곡사지(朝谷寺址)·조곡사지삼층석탑 및 공룡발자국화석 등이 있다.

외암(外巖)·내곡(內谷)·주동(主東)·주서(主西) 등 4개 리가 있다.

8. 칠북면(漆北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32㎢, 인구 2,11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검단리이다. 본래 칠원군 지역으로 북면(北面)이라 하여 봉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북면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서면의 구포리 일부, 칠원면 죽청리와 영산군 길곡면(吉谷面)의 사촌리를 합하여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83년운서·운곡 등 2개 리가 칠원면으로 편입되었다. 동쪽과 남쪽은 작대산 등 산지가 많고 북쪽은 낙동강에 면하여 약간의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에서 흘러온 광로천이 칠서면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낮은 구릉지대에서 생산되는 복숭아와 단감은 군내에서 생산량 제1위를 차지한다. 교통은 면내를 잇는 군도가 있을 뿐이어서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덕남리의 성지, 영동리의 장춘사·장춘사석조여래좌상·장춘사오층석탑과 천연기념물인 회화나무가 있다. 특히 1919년 3월 9일 이령 연개장터 일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했던 곳으로 1976년 독립기념비를 세워 매년 기념, 문화행사 등을 실시하고 있다.

검단(檢丹)·화천(化川)·덕남(德南)·이령(二靈)·봉촌(鳳村)·가연(佳淵)·영동(榮東) 등 7개 리가 있다.

9. 칠서면(漆西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5.95㎢, 인구 6,17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천계리이다. 본래 칠원군 지역으로 서면(西面)이라고 하여 용중리 등 13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08년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서면이 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9개 리로 개편되었다. 남북으로 긴 모양으로 남쪽에 약간의 산지가 있고, 낙동강과 면한 지역은 평야지대를 이루어 농산물의 산출이 많다. 이 지역은 대치리, 계내리 일대 107만평 규모의 칠서지방산업단지가 조성되어 함안군을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의 산업단지로 거듭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특히 복숭아·포도 등의 과일 생산이 많다. 교통은 구마고속도로와 대구∼마산 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회산리의 지석묘, 구포리의 고분, 계내리의 주세붕묘역, 무릉리의 무릉산성·주세붕영정·무산사와 무릉잡고 및 수구집·구봉집책판 등이 있다.

천계(天界)·회산(會山)·무릉(武陵)·구포(龜浦)·태곡(泰谷)·대치(大峙)·계내(溪內)·용성(龍城)·이룡(二龍) 등 9개 리가 있다.

10. 함안면(咸安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8.92㎢, 인구 2,64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성리이다. 본래 함안군 지역으로 상리면(上里面)이라 하여 신교리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내면(山內面)의 동촌리 등 5개 리를 합하여 읍내면(邑內面)이라고 하여 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8년함안면으로 개칭되었다. 지형은 대체로 동부와 남부가 신지로서 여항산·광로산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발원한 하천이 봉성리를 거쳐 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 등이 있으며, 특용작물로 마늘의 생산이 많다. 그리고 주요 특산물은 파수곶감으로 이 고장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 하고 있다. 파수농공단지 등에 29개 기업체가 입주하여 가동되고 있다. 교통은 가야면∼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간의 지방도가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은 함안읍성을 비롯하여 괴산리의 지석묘, 봉성리의 지석묘군, 대산리의 동지산성·사지·석불, 강명리의 영대암지(靈臺庵址), 북촌리의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 봉성리의 함안향교, 괴산리의 무진정 등이 있다.

봉성(鳳城)·북촌(北村)·괴산(槐山)·대산(大山)·강명(康命)·파수(巴水) 등 6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함안통계연보』(함안군,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함안군지』(함안군지편찬위원회, 1992)
•『아라의 얼과 향기』(함안군, 1988)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경남교육사』(경상남도교육위원회, 1980)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0)
•『경상남도지』(경상남도지편찬위원회, 1978)
•함안군(www.㏊man.go.kr)

 
 

가야(加耶)의 멸망(滅亡)과 그 영토의 후속처리 문제


신라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투항해왔다.

540년에 신라가 대병으로 아시랑국(阿羅加耶:咸安)을 멸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관산성 전투 다음해인 16년(555)에 비화가야(非火加耶)인 창녕에 완산주를 설치하였고

561년에는 진흥왕이 하주(下州)인 창녕에 친행하였는데 현재에도 화왕산성과 목마산성 밑에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다.

 

진흥왕 23년(562)에 이사부,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멸하였다.
정약용의 {강역고}에는 지증왕 6년(505)에 신라가 이사부를 보내 소가야를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천관우(千寬宇)는 이 년대가 잘못된 것으로 고성의 소가야는 562년에 대가야가 멸망할때까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본다.


 

백제가 가야와 동맹관게를 구축하게 된것

 

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이 왜에게 공격 당한 신라를 구하고 그들의 후원세력인 금관가야를 공격하고

404년에는 일본의 구주와 본토를 공략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야의 전기연맹이 무너지고 후기연맹이 성립되고 백제는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당해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공주(公州)로 천도하였다.


 그당시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들어간 신라는 내물왕 37년(392)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인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으며 실성왕 11년(412)에는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눌지왕 8년(424)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눌지왕 34년(450)에 고구려의 변장이 실직원에서 사냥하자 하슬라성주가 군사를 보내 그를 공격해 죽인이후 38년(454)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공격해 왔다.

이로서 여제동맹은 깨어지고 39년(455)에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신라가 군원병을 보냄으로서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성립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내물왕은 자기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인 실성을 인질로 고구려에 보냈으며 고구려의 세력을 업고 귀국한 실성에게 피살되었는데 왕위에 오른 실성은 내물왕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미사흔은 왜로 추방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도피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내물왕의 장남인 눌지는 실성왕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고구려의 세력을 극복하려고 나제동맹을 결성하게된 것이다. 소지왕 3년(481)에는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백제와 가야가 구원병을 보낸 사실을 보면 신라, 백제, 가야가 동맹관계를 유지해 고구려의 남침을 막고 있음을 볼때

백제와 가야가 동맹관계 유지해 오다가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나고자하는 신라가 이들과 제휴하게 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렇게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벋어난 신라는 의성, 안동, 경산, 대구, 칠곡, 성주, 선산, 창녕, 울산, 양산, 부산(동래)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시켜나가 가야의 서쪽 경계를 조여들어왔다.

이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가야는 백제와 계속적으로 결속하게 된다. 예를 들면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의 성왕을 도와 고구려를 밀어낸후 백제의 한강 유역마저 빼았음으로서 나제동맹이 결렬되고 백제(百濟)의 성왕이 554년에 신라의 관산성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에 가야, 왜의 구원병이 참전하고 있음을 볼때 가야(加耶)는 백제, 왜와 연결된 동맹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으로부터 562년 대가야가 멸망 당하기까지 신라가 가야의 서쪽을 조여왔는데 대가야가 멸망당한 후 그 땅은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으로 변하게된다.백제의 무왕 3년에 신라의 아막산성(雲峰)을 공격하였고 17년에는 신라의 모산성(운봉)을 공격했다.

25년네 신라의 석함(咸陽) 등 6성을 쳐서 빼았았다.의자왕 2년 7월에는 백제 의자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40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았았으며 8월 윤충장군을 보내 신라의 대야성(陜川)을 쳐서 성주 품석을 죽였다.

 

4년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백제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5년 신라를 쳐서 7성을 빼았았다. 7년 백제의 의직 장군이 신라의 무산성(무주군 무풍면)에 밑에 진군하여 감물(금릉군 개녕면),동잠성을 쳤으나 김유신에게 패하여 돌아왔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가야가 멸망한후 신라(新羅)는 합천, 거창, 고령, 함양, 고성, 함안, 창녕, 김해지방을

백제(百濟)는 남원, 임실, 순창, 진안, 장수, 구례, 무주, 진주, 남해, 하동를 차지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당시 백제가 신라가 차지한 옛 가야 땅의 가장 깊숙히 침공해 들어간 것은 신라 40개의 성을 빼았은 후 합천에서 벌어진 대야성(大耶城) 전투였다. 이것은 이미 차지한 함양과 남쪽의 거점인 진주에서 공격한 것으로 40개의 성은 주로 이들 지역과 합천 중간에 위치한 거창과 산청지역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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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조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윤시영(尹始榮)은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윤황(尹璜)은 판태사국사(判太史局事)를 지냈는데, 이후의 수대는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알 수 없다. 따라서 고려에서 칠원현의 호장보윤(戶長甫尹)을 지낸 윤거부(尹鉅富)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신라 말기의 반란과 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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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호족세력 
 
지방 호족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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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귀부한 경순왕(敬順王. ? ~ 978년)

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재위: 927년 ~ 935년)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1]

신라 김씨(또는 계림 김씨) 시조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27세손이며
, 문성왕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존(追尊)된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다.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그는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과 경애왕의 친척 동생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 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그의 친척 동생인 경순왕을 왕으로 세워 왕위에 올라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935년 11월 그는 재위 8년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군되었다.
또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지고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고,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

본관

《삼국사기》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을 삼았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손국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 초기

경순왕은 이름이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飡)을 지낸 김효종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3]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가계는 신라 문성왕(文聖王)-상대등 '김안'(金安)-각간
 '김민공'(金敏恭)-추존 의흥왕 '김실홍'(金實虹. 일명 仁慶)-추존
신흥왕 김효종(金孝宗)-경순왕(敬順王)으로 이어진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황(굉,나주김씨)왕자이다.

927년 신라를 침공한 견훤에 의해 경애왕이 강제적으로 목숨을 끊게 되고,
그가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 927년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피살 당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배경은 미상이며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있었는지,
화백 회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 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大阿飡) 효종을 신흥왕(神興王)으로, 할아버지 각간(角干)
김실홍을 의흥왕(懿興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시에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4]

931년 고려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4]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그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고려 귀순 및 멸망[편집]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두왕자는 양국(讓國) 반대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태자(太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며, 둘째아들 황(굉,나주김씨)
왕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고려 귀순 후

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또 태조 왕건은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 하고, 시호는 효목(孝穆)이라 했다.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도 아내로 삼게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1904년작 경순왕 영정 초본
978년(고려 경종 3)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였다.[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영조 22) 10월 14일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현 연천군 장남면)에서 경순왕의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하고 묘비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748년(영조 24) 1월 29일에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하여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을 유지 보존할 수 있었다.[1]

경순왕릉비는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있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 경주 김씨 김빈(金礗)과 김굉(金硡) 등이 발견한 것으로, 비문 내용은 10여자 정도 남아 있는데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다.[1] 이후 한국전쟁 당시 경순왕릉에서 300m 떨어진 고랑포리 시가 지역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87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석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크기는 높이 132cm, 너비 65cm, 두께 16cm 이며, 상태는 1면만 겨우 남아 10여개의 문자만 판독되고, 내용은 거의 알 수 없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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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귀부반대 경순왕 왕자(敬順王 王子) (마의태자)


, 912년? ~ ?)는 신라 하대의 왕족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죽방부인(竹方夫人)

소생의 첫째 왕자(王子)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는다.




그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왕자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태자(太子) 또는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935년(경순왕 9) 10월 부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왕자(王子)가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다.

그의 동생 덕지(德摯) 및 이순유(李純由) 등도 이에 함께 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아래와 같이 말을 하며,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하였다.(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삼국사기》

이에 그는 통곡(痛哭)을 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麻衣)를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마의(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그의 동생 김덕지(金德摯)도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화엄종(華嚴宗)에 귀의(歸依)하여 중이 되었는데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면서 도(道)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고 하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에는 경순왕에게 '왕자(王子)가 있었다'고 할 뿐, 그가 세칭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기록은 없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도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왕자(王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것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서(史書)에 이름은 전하지 않고 다만 왕자(王子)라 하며,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왕자 이름 대두[편집]



그런데 1784년(정조 8)에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근기한 《김은열 묘지문》과 이를 원용하여 1785년 김사목(金思穆)이 경주김씨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추기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에 제1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 한다.[1] [2]

이후부터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는 경순왕 '태자'(太子)와 제1자 '김일'(金鎰)이 동일인이라 주장한다. 또 작금에 와서는 신라계 어느 김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을 마의 태자(麻衣 太子)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의 족보에다 마의 태자(麻衣 太子)를 시조로 표기해 놓고 슬하에 두명의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적자가 세칭 마의태자이신 분이고 둘째(막내)가 범공이다(-국사편찬위원회).

사서(史書)에 신라가 망할 때 태자(太子)가 몇 살이었고, 부인과 자식이 누구인가 하는 것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만약 그때 처자(妻子)를 죽이지 않았다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자라서 후손을 두었을 것이고 그 후손들은 본관 제도가 등장한 고려에서 어느 김씨 성을 가진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의 기록은 그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3]




김은열 묘지문 진위 여부




《김은열 묘지문》에 등장하는 경순왕 제1자 '김일'(金鎰)'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 묘지명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만 수록되어 있을 뿐이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일부 내용도 왜곡되어 있다.

또 배위(配位) 관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죽은 해와 장례일, 형제와 아들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친(母親) 관계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제2자 '김황'과 제4자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유공지신(有功之臣)이어서 특사장지(特賜葬地)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 건립 때 각 성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에, 그의 증조부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개성유수 김정집(金鼎集)이 근기(謹記)한 《김은열 묘지명》을 모두 배척하고 있으며, 여기에도 '김일'(金鎰)'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또 조선조 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도 《김은열 묘지문》을 원용하여 추기하면서 경순왕 '태자'(太子)와 제1자 '김일'(金鎰)'을 별도 인물인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세 평가


왕자(王子)의 이름은 역사서에 전하지 않고 있으며, 그는 태자(太子)의 신분으로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부왕 경순왕과 고려에 맞서 결사 항전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은 조선의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자수(金自粹)의 《상촌집(桑村集)》과 조선 중기 문인들인 신흠(申欽)· 윤증(尹拯)등은 그의 행적에 대해 읊었던 한시 작품에서 '초의(草衣)' 또는 '신라 왕자'로만 서술하고 칭찬하였을 뿐, '마의 태자'(麻衣 太子) 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
오운(吳澐)은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 왕자(王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778년(정조 2)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태자(太子)가 없었더라면 천년의 군자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이광수가 『동아일보』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을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이 '마의 태자'(麻衣 太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이후 '마의 태자'(麻衣 太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신라부흥 운동설

신라가 멸망한 뒤 금강산에 들어가서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이외에는, 마의 태자(麻衣 太子)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의 태자(麻衣 太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관련한 민간 전승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 태자의 무덤이라 전하는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고, 바로 옆에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변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크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하는 바위), 김부리(金富大王洞)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신라 경순왕(김부대왕)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김부리의 대왕각(大王閣)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새겨져 있는데, '김일'(金鎰)이라는 이름은 1940년대 이후에 위패에 새로 추가한 것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단지 은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은 스스로 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 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4]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맹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개골이라는 마을이름이나 신라 부흥 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였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 태자(麻衣 太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주시로, 마의 태자(麻衣 太子)와 그 누이동생 덕주 공주(德主 公主)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德住寺)가 있다.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마의 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들 마의 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지난 2000년 답사 취재하고 마의 태자의 북행(北行)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에서는 2000년 4월 15일에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라는 부제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 방송분에서 금강산으로 갔다는 마의 태자의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 굳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교통로가 아닌 내륙에 남아있는 것에서, 경주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으로,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마의 태자의 북행 루트를 상정한 뒤,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는 제2의 수도로 불렸다는 점(충주의 경우), 그리고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 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가운데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거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일단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강원도 각지의 전승에 대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남아있는데, 휘하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삼고 대궐 동쪽에 있는 신란궁(新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는 한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해당 지역의 연고자에게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사심관 제도의 취지이지만, 이 경우 지방에서 올라온 연고자에게 자신의 연고지 행정을 맡겼다고 해서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으며, 경순왕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에 마련되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추정한다고 해도 그 루트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5] 점을 보더라도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그리고 인근의 관련 지명들은 김부대왕이라 불린 경순왕 자체를 가리킨다기 보다 경순왕과 관련된 주변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대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는 실제 경순왕을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다).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戶長)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 지방의 민심을 보살폈다는 내용의 전승이 있는데 마의 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진 갑둔리 5층 석탑은 김부라는 사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구의) 집안이 길이 보전되기를(金富壽命長存家)」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을 전하는 탑의 비명(碑銘)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김부'도 실은 신라의 김부(즉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김부의 부(富)와 김부대왕각에 모셔진 일(鎰)에 쓰인 한자는 똑같이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김부를 김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의태자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에 모셔진 위패의 이름이 정말 마의태자의 본명 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갑둔리 5층 석탑도, 요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 16년 병자(1036년)」라는 연호가 탑에서 확인되었고 이것이 탑의 조성시기로 여겨지는데 태평 16년 즉 정종 2년은 마의태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년이나 뒤의 것으로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 이러한 지명들은 실제 마의 태자라 불린 신라의 왕자와 관련된 유적이라기보다는 거란, 또는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마의태자가 등장한 작품//이광수, 「마의태자」(1930년)   var articleno = "18";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09/2012020901977.html

 

 


 


 




 

나무위키 출처(2018.09.10)



신라 멸망 직후 부흥운동 소고

935년에 후삼국시대의 패권이 고려 쪽으로 흘러가자, 신라는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했다. 당시 신라 조정 내에서는 마의태자 등 신라의 고려 병합을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으나 이미 국운이 다한 상황에서 이들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다. 신라가 고려에 귀부한 이후에도 1000년 간 국체를 존속한 신라를 하루아침에 없앤 데에 대한 『이런저런 반발이 있었고 옛 신라 지역이었던 경상도 지역에선 고려에 대항하는 일부 계층들의 반란』들도 있었지만, 신라의 국가적 역량은 견훤의 서라벌 함락 후에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망가져 있었다. 게다가 왕건은 이미 이런 일을 아주 일찍부터 예상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요소요소에 정예 부대를 배치했었고, 때문에 소소한 소요 사태에 그치고 만다. 2.2. 경주 별초군의 난 2.3. 동경의 반란(동경민란) 동경에서 6, 7차례에 걸쳐 일어난 반란으로 주도자는 이비, 패좌 등이 알려져 있다. 2.4. 김사미 · 효심의 난,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이자 십팔자위왕 소문에 의거해 왕좌를 노리고 있었던 이의민과 내통하여 일어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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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金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7월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의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였다.[2]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도 존재 한다.[3]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고, 별명은 미륵(彌勒), 일목대왕(一目大王[4][5])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 으로 변경하였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해, 호족들,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불교 세력,유학자들과 갈등하던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 의해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생애 초반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 제47대 국왕 헌안왕(혹은 신라 제48대 국왕 경문왕)의 빈어(嬪御) 소생, 즉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이름은 '김궁예'다.[6]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경참문에 의하면 궁예는 丑년생인데 그러면 857년생, 혹은 869년생인걸 알수 있다. 궁예가 891년 절을 떠나 처음 봉기에 참여한 시기로 미루어 짐작할때 869년생, 그러니까 경문왕의 서자인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음력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일관(日官)이 왕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했는데,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다. 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유모가 밑에서 받아서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가 되었다.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

궁예가 10여 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주위와 말썽을 일으키고만 있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며, "너는 왕자로서 태어났고, 살해당하는 것이 안 되게 생각되어 그래서 너를 목숨을 걸고 길렀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다. 너의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는 살해당할 것이니 슬프다." 라고 했다. 궁예는 울면서 "그러면 제가 집을 나가서 더 이상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집을 나와서, 세달사(世達寺)에 몸을 기탁해 스스로 성명을 선종(善宗)이라 했다.

궁예의 승려 시절에 대해 《삼국사기》는 그가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고 전해, 견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궁예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작하고 왜곡했어도 그의 승려 시절의 모습과 이후 그가 출가해 혁명가로서 활동할때의 초반 행적들에 대해서만큼은 미흡하나마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태조 세가에는 궁예 정권의 핵심인물로서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즉위한 지 7일만에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와 함께 주벌된 소판 종간이라는 인물에 대해 "젊어서 승려가 되었던 자"라고 적고 있어, 일찍부터 궁예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종간이 궁예의 승려 시절, 즉 세달사에서 궁예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7]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궁예가 어느 날 재(齋)에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게 되었고, 이때부터 궁예는 자신이 장차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8]




출사



진성여왕 5년(891년)부터 신라의 각지에서는 거듭되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 징수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도적이 된 자들의 봉기가 잇따랐는데, 궁예도 절을 떠나서

 죽주(竹州)의 적수(賊帥) 기훤(箕萱)을 찾아가 그의 휘하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기훤이 궁예에게 오만하고 무례한 자세로 대하자 이에 반발해, 다시 죽주를 떠나

 북원(北原)의 적수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갔다.

《삼국사기》는 이때 기훤의 휘하에 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이 궁예를 따라 함께 북원으로 왔다고 적고 있다.

 기훤과는 달리 양길은 궁예를 신임해 그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며 북원 동쪽 땅의 경략을 맡겼고,

궁예 자신은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에 머무르며 진성여왕 6년(892년)까지 주천(酒泉) · 내성(奈城) · 어진 등 명주 관내의 10여 군현(《삼국사기》 신라본기. 같은 책 궁예전에는 주천과 내성, 울오, 어진의 4개 군만이 기술되어 있으며 시점도 본기와 열전에 차이가 있다)을

공략하여 모두 항복시켰으며,

진성여왕 8년(894년)에는 드디어 명주를 점령하였다.



《삼국사기》 궁예전은 이때 궁예가 거느린 무리가 3,500인(신라본기에는 600인)에 이르렀으며[9], 궁예는 이를 14대(隊)로 나누어 편재하고 김대(金大) · 검모(黔毛) · 흔장(昕長) · 귀평(貴平) · 장일(張一)[10] 등을 뽑아 사상(舍上), 즉 부장으로서 임명하여 지휘하였다고 적었다. 나아가 궁예는 명주에 들어간 뒤부터 장군(將軍)을 자칭하였는데, 하대 신라에서 반란의 지도자나 호족 세력이 장군을 자칭한 것은 궁예가 최초였다.[11]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신라에 등을 돌린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현신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이라 자처했고, 백성들은 그런 궁예를 자신들을 구원해줄 대상으로 삼았지만,

궁예가 이때부터 자신을 미륵으로 여겼다는 학계 일부의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때의 궁예는 아직 양길의 부하로 있었던 시절이었고, 또 명주를 장악한 후

황제나 왕도 아닌 장군만 자처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미륵으로 자처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명주를 장악한 궁예는 진성여왕 9년(895년),

동해를 끼고 북상해 영서 지방으로 넘어와 저족, 성주(화천), 부약(금화), 금성(금화군), 철원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여

세력 기반을 다졌고, 지금의 강원도 전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이듬해 철원을 자신의 도읍으로 삼았다.




즉위와 전쟁[편집]



후고구려 선포[편집]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浿西),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송악(松嶽)의 해상 호족이었던 왕륭 · 왕건 부자가 진성여왕 10년(896년)에 궁예에게 투항해 오자



궁예는 세조의 아들인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했다.

왕륭의 제의를 받아들인 궁예는 효공왕 2년(898년)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건을 시켜 양주와 청주(淸州)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겨울 11월에 궁예는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



효공왕 3년(899년)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은 궁예는



 송악의 성을 중수한 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3월에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궁예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북원의 양길은 자신의 관할 및 한산주 지역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공격하지만

거꾸로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자신도 몰락하고 말았다.[4]



비뇌성에서 양길을 패배시킨 뒤인 효공왕 4년(900년)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 · 국원경(충주) · 청주 · 당성(唐城) · 괴양(槐壤) 일대를 정벌하여[4]

광주를 우선 평정하고, 국원경과 청주 · 괴양의 적수 청길(淸吉) · 신훤(莘萱) 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효공왕 5년(901년) 7월에 스스로 고려왕(후고구려왕)을 칭하였다

(《삼국유사》 연표에는 고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당병을 청해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평양의 옛 도읍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내가 갚겠다"고 선언한 궁예의 발언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분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고,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칼로 쳤다는 일화도 함께 전하고 있다.



효공왕 6년(902년)부터 왕건을 서해안에 파견해 당시 후백제의 해상으로의 대중 교역로를 차단하게 했고,

효공왕 7년(903년) 3월, 수군으로 후백제의 후방에 위치한 중요한 해상 거점이었던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 지역)지역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넓혔다.

나아가 왕건은 금성 공략과 함께 양주(良州)의 호족이었던 김인훈(金忍訓)을 구하여

돌아온 공으로 궁예로부터 알찬의 관등을 받았다.




마진[편집]

신라 효공왕 7년(904년) 7월에 궁예는 신라의 제도를 참작해 관직을 설치하고, 국호를 마진[12] 으로 고쳤으며 연호를 정하여 무태(武泰)라 했다. 또한 공주(公州) 지역의 호족으로 장군을 칭하고 있던 홍기가 궁예에게 귀부했다.



이보다 앞선 903년부터 궁예는 수도를 이미 송악에서 자신의 첫 거점이었던 철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철원과 부양 등지를 친히 돌면서 산세를 살피기도 하고,



청주의 민호 1천여 호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이듬해인 무태 2년(905년)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13]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한 뒤에 세운 궁터는 구 철원 북쪽 30리,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의 지명은 풍천원(楓川原)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철원의 궁궐과 누대는 크고 화려하게 세워졌으며,

연호도 무태에서 성책(聖冊)으로 바뀌었다.

또한 평양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했고,

증성(甑城)의 적의(赤衣) ·

황의(黃衣)의 도적 명귀(明貴) 등이 복속해 왔는데,



《삼국사기》는 이때부터 궁예가 강성해졌다며 자만하고는 신라를 병탄하고자 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면서 신라에서부터 귀순해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고 적고 있다.



성책 2년(906년), 궁예는 왕건을 보내 견훤의 군대를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맞아 싸우게 했고

 왕건의 군대는 견훤의 군대와 여러차례 치열하게 싸워 결국 크게 이겼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은 궁예 성책 5년(909년) 다시 나주 지역에 대한 공략을 실시하여

지금의 영산강 하에서 영광 서쪽 해안인 염해현까지 진격하였다.

 6월에 왕건의 수군이 광주(光州)의 진도(珍島)를 쳐서 차지하고 고이도(皐夷島)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의 수군을 화공(火攻)으로 대파했으며,

압해현의 해상 호족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붙잡혀 궁예에게 보내져 처형되었다.



성책 6년(910년) 후백제의 견훤이 다시 3천명의 군사를 내어 나주를 포위 공격하자,

궁예는 포위 공격 10일 만에 수군을 내어 견훤을 쳐서 몰아내고

나주 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 무렵 궁예의 판도는 남으로는 공주와 상주,

동북으로는 증성(甑城),

서북으로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남도 남부까지

이르러 국세를 크게 떨쳤다.




태봉[편집]



911년(효공왕 14년) :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12]



《삼국사기》는 궁예가 태봉을 선포한 때부터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彌勒)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에,

행차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세워 걷게 했으며,

자신의 두 아들도 청광보살 · 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다.



또한 직접 불교 경전 20권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總)이라는 승려가 이 불경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서 입에 담기도 어렵다"고 혹평했고,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때려 죽이고 말았다.

 이 외에도 917년에 선종 계열의 승려로, 후백제 지역에서 건너와 활동했던 형미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져,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유학자들의 경우도 본래 궁예의 최측근이였다가 궁예에게 죽을뻔한 왕건을 살려준후, 궁예를 등지고

왕건의 최측근이 된 유학자 최응과 궁예 정권 시절 궁예의 태자인 청광보살의 사부의 벼슬이였던

 동궁기실로 있다가 궁예의 왕비 강씨와 강씨의 두 아들이 처형된 전후에 궁을 탈출해 승려가 되었다가,

역시 왕건의 집권후 돌아와 왕건의 신료가 되어 왕건에게 최초로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유(본명 박유.)의 경우와 궁예가



몰락한 해인 918년 3월,



왕창근이 한 기이한 노인에게서 얻은 거울에 적힌 왕건이 궁예를 멸망시킨후 삼한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내용의 은어로 된 글들을 해석한후, 왕건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서 왕건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궁예의 문인들이였던 송함홍,백탁,허원 등의 경우들을 봐도,

대개의 유학자들과 유학 계열의 문인들 역시,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신으로서의 숭배를 강요하는 궁예의 행동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덕만세 3년(913년)

왕건을 파진찬 겸 문하시중으로 임명해[14]

 수도로 불러들인지 1년만인 정개 원년(914년)에, 견훤이 나주를 공략해 오자 "수군의 장수가 지위가 미천해서 위엄을 널리 보일 수 없다."며 다시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하고 백선장군으로 삼아 나주로 내려 보냈다.

이는 왕건 자신 또한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지위가 시중에 이르면서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고[14]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해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스스로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나갈 것을 청했던 것이다.[14]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했고,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와 나주 지역의 해상 군소 해상 세력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은 나주 지역을 안정시키고 돌아와 해전과 해상 무역에 대한 계책들을 진언하자,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며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14]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정개 2년(915년), 그의 포악함을 보다 못한

 왕후 강(康)씨가 자신에게 간언하자,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관심법으로 보아서 다 알고 있다."며

쇠꼬챙이를 가져다 왕후의 음부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해서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행했다.[14]




정변과 죽음[편집]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을묘일), 궁예의 숙청에 위기의식과 반감을 느낀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의,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 세력들이 주동이 되어서



패서 지역(경기도 북부와 황해도,평양과 평안남도 남부 지역의 옛 고구려계 지역) 호족들과



최응,송함홍,백탁,허원 등의 유학자 관료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한밤중에 정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다.[15]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객지에서 죽었다. 《삼국사기》는 화전민들에게 발각되고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는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15],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자살바위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했지만,

한동안 왕건에 반대하는



 친궁예 세력들이 건재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했다.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은 처음에는 왕건의 정변에 적극 가담해 큰 공을 세웠으나

이후 아내의 권고를 받고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아내의 권고를 받고

환선길이 그의 동생과 함께 왕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왕건의 정변 성공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소외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의 동생과 함께 왕건 즉위 직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해 그의 동생과 함께 처형되었고,



이후 궁예 정권 말기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으로써 웅주(熊州)를 쳐서 차지하고 주둔하던



이흔암은 천수 원년(918년) 6월 왕건의 즉위를 찬탈로 규정하고 정변을 일으킬 목적으로

부임지인 웅주를 무단이탈해 당시 수도인 철원으로 마음대로 돌아왔고,

 이후 한찬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이었던 염장(閻萇) 등이

웅주를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뜻이 있음을 탐지해 밀고했다.



 이에 이흔암은 시장 바닥에 끌려나가 공개 참형을 당했고,

 2개월 뒤 공주는 운주(運州) 등 10여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해 버렸다.



9월에는 순군리였던 임춘길(林春吉)과 그의 일당들이 반역을 꾀하다 처형당했고

그 다음달인 10월달에는 청주의 진선과

선장 형제도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되었다.

 대부분 공주, 또는 청주 지역의 옛 백제계 지역 호족들이었다.



명주의 성주 김순식도 왕건이 즉위한 뒤로도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아,



왕건이 천수 4년(922년) 7월에 김순식의 아버지로 승려로서 출가해 있던 허월(許越)을 보내 타일렀을 때에도

장자 수원(守元)만 보내고 자신은 오지 않았다.



천수 9년(927년) 8월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 장명(長命)만을 보내어

숙위하게 했을 뿐 김순식 자신은 오지 않다가,

 이듬해 1월에야 직접 왕건을 찾아와 알현함으로서 완전히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전설[편집]



《삼국사기》 및 《고려사》는 궁예를 몰아낸 세력에 의해 편찬된 텍스트, 또는 그 텍스트를 저본으로 편찬된 것이다. 특히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 미복차림으로 도망치던 중에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민간의 전승에서는 궁예가 오히려 왕건을 상대로 항전을 벌이다 죽었다고 하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유명한 것이 포천 산정호수 인근의 명성산 전설로,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해서 산새들이 울었다고 해서 명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명성산 주변에는 궁예가 피신해서 이름이 붙었다는 개적동굴,



궁예가 왕건의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살폈다는 망무봉의 지명 유래담이 내려오고 있다.[16]



또한,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에는 궁예가 왕건에 맞서 항전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패주골은 궁예가 싸움에 패한 고을이라 붙은 이름이고,



궁예와 그의 군사들이 한탄하며 도망쳐서 군탄리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평가[편집]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대부분 궁예를 축출한 왕건 세력에 의해 편찬된 텍스트를 저본자료로 삼은 것이며,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흥망사관에 입각해 왕건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그 쿠데타로 인해 추방된 궁예가 얼마나 잔인하고 난폭하였으며

의심을 많이 품었고 폭정을 일삼았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궁예 자신의 개인적인 결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으며

기존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전제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신라 정책과 신라 출신 귀순자들의 학살[편집]

우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하는 기록부터,

 기존의 학설은 《삼국사기》 궁예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 왕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행한

감정에 치우친 행동으로만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처음 일어날 당시의 지지 기반과 왕건과의 차이점,

 나아가 신라로부터의 귀순자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궁예의 행동에도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



궁예가 처음 거병할 당시의 지지기반은 신라 말의 초적으로,

이들 초적들은 극심한 천재지변에 신라 왕실과 진골 귀족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무장화하여

도적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들로서 신라 조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정통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이 신라 귀순자들을 너그럽게 다 받아주었던 것과는 달리,

초적을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룬 궁예로서는 신라 조정이나

그로부터 귀순해온 세력들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일 수만은 없었다.




개인적인 신격화[편집]



궁예가 지은 경전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 교훈거리가 될 수 없다."고 혹평하여

궁예에게 살해된 석총이라는 승려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해, "진표의 제자인 석충(釋忠)이 간자 108개를 태조에게 바쳤다."고 적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석총과 《왕대종족기》의 석충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궁예가 지향했던 불교와 석총의 불교가 같은 법상종 계열이면서도

궁예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중심이었던 데 반해서 석총은 미륵보살, 지장보살 중심이었던 차이점이 지적되어,

양자간에 알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며 적어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감정적으로 울컥해서 죽이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앞서 이야기되었듯이 근본적으로 석총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종파를 떠나서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정통 불교의 승려로서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외에도 917년에 선종 계열의 승려로, 후백제 지역에서 건너와 활동했던 형미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져,

 궁예가 억지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짓고, 미륵으로 행세하는 식의, 정통 불교 교리를 파괴하는 억지스러운 자기 신격화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불교계가 거센 반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유학자들의 경우도 본래 궁예의 최측근이였다가 궁예에게 죽을뻔한 왕건을 살려준후, 궁예를 등지고 왕건의 최측근이 된 유학자 최응과 궁예 정권 시절 궁예의 태자인 청광보살의 사부의 벼슬이였던 동궁기실로 있다가 궁예의 왕비 강씨와 강씨의 두 아들이 처형된 전후에 궁을 탈출해 승려가 되었다가, 역시 왕건의 집권후 돌아와 왕건의 신료가 되어

왕건에게 최초로 왕씨 성을 하사받은 왕유(본명 박유.)의 경우와 궁예가 몰락한 해인 918년 3월, 왕창근이 한 기이한 노인에게서 얻은 거울에 적힌 왕건이 궁예를 멸망시킨후 삼한을 통일하고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수복한다는 내용의 은어로 된 글들을 해석한후, 왕건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거짓으로 꾸며서 왕건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궁예의 문인들이였던 송함홍,백탁,허원 등의 경우들을 봐도,

대개의 유학자들과 유학 계열의 문인들 역시,

자신을 신으로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격화시키고

 신으로서의 숭배를 강요하는 궁예의 행동들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건과의 관계[편집]

《삼국사기》에는 궁예와 왕건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마침 처벌된 자들로부터 몰수한 물품들을 점검하고 있던 궁예는 왕건을 보자 성난 표정으로

 "경이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데 사실인가?" 라고 물었고,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보리라." 하고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이 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가만히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스스로 자복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지나갔고, 왕건은 곧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거짓으로 자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오히려 "경은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며 왕건에게 주연까지 베풀어 주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 한 덩이를 왕건에게 특별히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흔히 궁예의 폭정과 왕건의 기지를 보여주기 위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처자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가족에 대해 왕비 강씨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청광과 신광이라 불린 아들은 강씨 소생인 것으로 비정하는 데 이견이 없다. 조정이 편찬한 기록 외에

후대의 철원 궁씨가 궁예의 아들이라는 신광의 후손임을 자처했으며, 순천 김씨나 광산 이씨도 궁예의 후손을 자처했다.

가계[편집]

    헌안왕(憲安王)
경문왕)(景文王)    후궁 장씨
(後宮 張氏)[17]                 

       궁예(태봉 1대)(弓裔)    강비(康氏)        
       김청광(金淸光)    김신광(金神光)    김순백(金順百)       


발해, 대위해 (895년 - 907년)
대인선 (907년 - 926년)

신라 효공왕 (897년 - 912년)
신덕왕 (912년 - 917년)
경명왕 (917년 - 924년)

후백제 견훤 (900년 - 935년)

===========

각주[편집]

1.이동 ↑ 김궁예(金弓裔)의 어머니가 장보고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2.이동 ↑ 《삼국사기》권 제50 열전 제10 궁예편. 궁예에 관하여 가장 기본적인 사료로, 여기서 인용되는 문장은 특별한 표시가 없다면 이곳에서 인용된 것이다.
3.이동 ↑ “궁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3년 9월 5일에 확인함. 
4.↑ 이동: 가 나 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7/2008121701603_3.html
5.이동 ↑ 20세기 초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붙인 별명이다.
6.이동 ↑ 신라왕의 서자이긴 하지만 정확히 어느 왕의 서자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헌안왕설을 채택했고, 전남대학교 정청주 교수 또한 아들이 없고 딸만 두 명이었기에 맏사위였던 응렴(경문왕)이 즉위하게 된 상황에서 궁예가 태어났으며 이때 응렴의 아버지로 앞서 헌안왕의 즉위에도 힘을 보탠 바 있는 시중 계명(啓明)이 자신의 아들인 응렴을 즉위시키기 위해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를 제거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궁예와 호족 세력」 『신라말 고려초 호족 연구』, P.65~67. 1996). 한편 2000년~2002년에 방송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경문왕의 왕자로 설정하였다.
7.이동 ↑ 정청주, 같은 책, p.75
8.이동 ↑ 궁예가 승려로서 출가한 세달사는《삼국사기》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남면 흥월리 흥교동 대화산 서상복에 그 절터가 남아 있다(정영호, 「신라 사자산 흥녕사지 연구」 『백산학보』7, 1969, p.27). 또한 세달사는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에도 등장하며 《삼국유사》의 세규사(世逵寺)와 같은 곳으로(김상현 「신라 화엄학승의 계보와 그 활동」 『신라문화』1, 1984, p.56) 정청주는 세규사의 장원이 위치해 있던 명주(溟州) 나리군(奈李郡)을 나성군(柰城郡)으로 보고, 세규사(세달사)가 위치해 있었던 소백산(小白山)과 당시 나리군의 태수(이기백 「신라 정토신앙의 다른 유형들」 『신라사상사연구』 1986, p.164)였던 김흔(金昕) 집안(김주원계 강릉 김씨)과의 연고를 들어, 지금의 영월과 그 인근 지역인 평창 · 단양 · 제천 등지에 장원을 가지고 있었던 세규사에서 멀지 않은 명주 지역의 강릉 김씨 일족으로 김흔의 방계에 해당하는 후손들이 일찍부터 궁예와 연결되어 그를 비호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까마귀가 '왕' 자가 적힌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세달사에서 그가 왕자 출신임을 알아본 세달사의 사원세력, 또는 영월 일대의 호족 세력들이 궁예에게 장차 거병하여 왕이 될 것을 부추긴 한 일화로서 해석되고 있다. 이후 궁예가 명주를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던 것이나, 궁예가 축출되고 명주가 한동안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사실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정청주, 같은 책, p.71~74, p.78~79).
9.이동 ↑ 궁예의 이 병력은 당시 실직(삼척)에 배치되어 있던 옛 신라군도 가담했을 가능성이 이기백에 의해 지적되었으며(이기백, 「고려경군고」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1956 ; 『고려병제사연구』, 1968, p.47 ; 「고려 초기 중앙군의 조직과 역할」, 『고려병제사』, 1983, p.20) 처음 명주를 출발할 때의 수가 600이고 명주에 들어가 모집하여 증가한 수가 3,500이라는 해석도 있다(박한설, 「궁예성명고 - 고구려 계승 표방과 관련하여」, 『이선근박사고희기념 한국학논총』, 1974).
10.이동 ↑ 정청주는 이들 인명을 김대검(金大黔) · 모흔장(毛昕長) · 귀평 · 장일로 떼어 읽었는데, 귀평의 경우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의 음기(陰記)에 「귀평 일길간 제주(貴平一吉干提州)」로 되어 있는 점을 들어 당시 제주 지역의 호족으로, 김대검(김대)의 경우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당시 강원도 평창군의 토성(土姓)으로서 김씨가 등장하는 점을 들어 평창(당시에는 나성군의 영현이었던 백오현) 출신의 호족으로 추정하고, 나아가 김대검(김대)가 몰락한 김흔계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하였다(정청주, 같은 책, p.75~76).
11.이동 ↑ 궁예 외에 장군을 지칭한 것은 904년과 905년에 공주장군(公州將軍)을 칭한 홍기(弘奇)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을 칭한 검용(黔用)을 제외하면 경명왕 2년(918년)까지 거의 20년이 넘도록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장군은 신라에서는 당(幢)이나 정(停) 등의 군단을 지휘하는 최고 지휘관으로서 진골 귀족이 독점했던 무관직이기에 함부로 자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궁예가 이를 자칭한 것은 그가 신라 왕족, 즉 진골 귀족 출신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정청주, 같은 책, p.77).
12.↑ 이동: 가 나 안정복은 궁예의 국호 '마진'에 대해서 당시 후고구려 북쪽에 있던 발해(진국震國)를 의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마진을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로 보아,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뜻하는 것으로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까지 아우르는 대동방국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7/2008121701603_4.html
13.이동 ↑ 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굳이 청주의 민호를 택해서 사민한 것에 대해서는 당시 새로운 왕도가 될 철원의 문화적 수준을 고려해 과거 신라의 지방 행정 중심지인 소경(小京)이 설치되어 있던 청주(서원경)를 택한 것이라는 설(김광수, 「나말여초의 지방학교 문제」, 『한국사연구』7, 1972, p.121)과 함께, 과거 백제의 세력권에 있었던 청주를 완전히 지배하여 후백제에 붙지 못하게 한다는 일종의 '집단 인질'의 성격을 띤 사민이었다는 설(김갑동, 「고려 건국기의 청주 세력과 왕건」, 『한국사연구』 48, 1985, pp.36~42), 과거 신라의 몰락한 귀족들이 낙향해 왔던 곳이기도 한 소경의 옛 신라계 호족세력을 끌어들여 전제왕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설(정청주, 같은 책, p.83~86) 등이 있다.
14.↑ 이동: 가 나 다 라 마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9페이지
15.↑ 이동: 가 나 《고려사》권1, 태조 총서
16.이동 ↑ 유인순, 《전설에 나타난 궁예왕》, 2006
17.이동 ↑ 김궁예(金弓裔)의 어머니가 장보고(張保皐)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참고 서적[편집]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동사강목
•신채호, 《일목대왕의 철추》(19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4)

외부 링크[편집]




후백제 견훤왕
後百濟 甄萱王

견훤(甄萱, 867년~936년 9월 27일(음력 9월 9일) 재위:892년/900년~935년 음력 3월)은 후백제를 건국한 후백제의 시조이다.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국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新羅)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제(百濟)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였고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를 도읍으로 하여
후백제의 군주가 되었으며 935년 음력 3월에 첫째 아들이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神劍)이
일으킨 정변으로 보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935년 음력 10월 17일에 비로소 후백제의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나
이듬해 936년 음력 9월 8일에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일으킨
거병으로 후백제는 끝내 멸망하였고 등창을 앓던 그는
 그 다음날인 936년 음력 9월 9일에 훙서하였다.

「甄」의 읽는 법에 대하여

조선조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견훤의 거병을 기록하면서
「남해(南海)의 수졸(戍卒)인 견훤(甄萱)이 반란을 일으켜
무주(武州)를 근거로 하고 스스로 한남군 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칭하였다.」고 적고,
 견훤의 이름에서 「견(甄)의 음은 진(眞)이다」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
견의 한문 발음은 질그릇 견, 질그릇장인 진 두가지이고, 병음은 전(Zhen)이라는 설이다.



출생 및 가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원래 농사로 먹고 살다가
 광계(光啓) 연간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을 일컬었다고 하며,
견훤 자신의 성도 원래 이씨(李氏)였으나 뒤에 견씨(甄氏)로 고쳤다고 한다.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의 왕비인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숭부인(白 夫人)이다. 셋째 아들은 구륜공(仇輪公)이고, 그 아들은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이고, 선품의 아들은 각간(角干) 작진(酌珍)이다. 작진의 아내 왕교파리(王咬巴里)가 각간 원선(元善)을 낳았으니, 이 사람이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이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장자가 바로 상보(尙父) 훤(萱)이고, 둘째 아들은 장군 능애(能哀),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龍蓋), 넷째 아들은 보개(寶蓋),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李磾家記云 眞興大王妃思刀 諡曰白 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珍干善品之子角干酌珍 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是爲阿慈介也 慈之第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尙父萱 二子將軍能哀 三子將軍龍蓋 四子寶蓋 五子將軍小蓋 一女大主刀金

이같이 《삼국유사》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에 대해 《이제가기》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계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아자개가 거병했다는 광계 연간은 서기로 885년에서 887년에 해당하며, 889년에 '원종 애노의 난'이 일어나는 등 신라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속출하던 시기와 겹치며, 아자개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일어난 지배계층의 성씨로 호족의 일원(6촌성, 경주 이씨)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견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견훤이 아직 아기였을때, 아버지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식사를 갖다 주려고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 두었는데, 그 사이 범이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여준 적이 있다는 이야기와 자라면서 체격과 용모가 웅대하고 빼어났으며 뜻과 기상이 활달하여 범상치 않았다고 기록해, 궁예와 마찬가지로 비록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의 적이어서 그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또 많은 부분들에서 사실과 달리 나쁜 쪽으로 조작하고 폄하했지만, 이 부분과 이후 견훤의 해적 토벌 부분만큼은 미흡하게나마 그의 영웅적인 면들을 인정했다. 견훤이 태어난 상주 가은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갈전 2리 아차(아채) 마을로, 문경에는 오늘날에도 견훤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새가 와서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고 읊고 있는데, 실제로 견훤이 태어났을때 온갖 날짐승이 날아와 몇 년에 걸쳐 아이를 보호해주어서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짐작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출생설화

《삼국유사》의 <후백제> 견훤 조에 다음과 같은 견훤의 출생담을 적고 있다. 광주(光州) 북촌(北村)의 어느 부호에게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자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만 되면 딸의 방에 와서 동침하고 새벽이 되면 사라졌다. 딸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자 아버지는 딸에게 밤에 그 남자가 다시 오거든 남자의 옷에 몰래 실을 꿰어 둔 바늘을 꽂아두라고 당부했고,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아버지는 딸과 함께 실을 따라가 보았는데, 북쪽 담장 밑에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밤마다 딸을 찾아온 남자의 정체는 바로 지렁이였던 것이다). 이후 딸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견훤이었다.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完山郡), 즉 지금의 전주(全州)에 도읍을 정했다.
이때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 당(唐)은 소종(昭宗) 경복(景福) 1년이었다.

이러한 류의 설화는
야래자(夜來者)형 설화로 분류되며,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에까지 흔적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의 함경북도 회령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누르하치 아버지의 출생설화를 비롯해,
일본 《고사기》의 오호타나네코(意富多多泥古),
《일본서기》의 오오모노누시 신(大物主神) 신화, 서구의 에로스 프시케 신화가 대표적인 야래자형 설화로 꼽힌다.
가은읍 아차마을에는 견훤이 지렁이의 자식으로 묘사한
《삼국유사》의 설화와 관련해서 금하굴(金霞窟)이라는 이름의 동굴이 남아 있다.

 후백제 견훤에 관련 전설이나 설화 견훤구인생설화 문서 참고



신라군 생활

견훤은 장성하여 군을 따라 왕경(王京)에 들어갔고, 서남해(西南海)의 방수(防戍)에 배정되었다. 《삼국사기》는 견훤이 서남해에서 군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잘때도 창을 배고 적을 대비했다. 그의 용기는 항상 다른 사졸들을 앞섰으므로."라고 적었고, 이후 "이러한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고 적어서 그가 서남해에서 군생활을 했을때 매우 뛰어난 군인의 자질을 보였다고 인정했고, 또 실제 전투에서도 뛰어난 공로들을 세웠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견훤이 임명된 '비장'이라는 지위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장군의 보좌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단순히 보좌관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장군 예하의 부장(副將)이나 장군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한다. 견훤이 복무한 서남해에 대해서도, 견훤이 처음 거병했을 때 무진주 동남쪽의 군현이 일제히 그에게 항복하여 따랐다는 기록이나, 견훤 자신의 측근 세력이자 혼인관계까지 맺은 인척이었던 무진주(武珍州) 성주 지훤(池萱)과 순천 출신 박영규(朴英規), 그리고 인가별감(引駕別監) 김총(金摠) 등이 모두 지금의 전라도 광주와 순천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대체로 순천과 여수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순천은 신라 시대에는 승평(昇平)이라고도 불리며 남단 내륙교통의 요충지이자 대중국 교역의 주요 항로였으며, 광주 및 나주, 목포 지역과 지금의 경상남도 연안을 연결하는 위치로 무진주(광주)에서 서라벌(경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땅이기도 했다.



거병과 후백제 개창

견훤의 거병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892년(진성여왕 6년)에 있었는데, 《삼국유사》에는 900년이라고도 적고 있다. 이 해는 신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난 때로, 이 기록을 따른다면 견훤은 원종과 애노의 난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신라 조정으로부터 군사적인 독립을 이룬뒤,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신라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부 체제를 수립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는 그가 처음 거병한지 열흘 만에 5천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무진주를 점령한 견훤은 섣불리 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대신 스스로 '신라 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를 칭하였다.
중국 강남의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었다.

 

후고구려와의 전쟁

금성 전투

견훤은 지금의 전라남북도 지역을 석권하고 후백제를 선포한 이듬해에 진출방향을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으로 돌려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견훤으로부터 비장의 지위를 받기도 했던 양길은 899년 7월에 궁예를 치기 위해 국원경 등 10여 성의 성주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으나 거꾸로 비뇌성 아래에서 패하고,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後高句麗. 후고구려는 한국의 현대 역사학자들이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만든 용어에 불과할뿐, 실제로 당시 궁예가 처음으로 나라를 정식으로 건국하면서 정한 국호는 5세기때부터 고구려라는 국명을 대신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고구려를 부르던 용어인 '고려.'였고, 궁예의 멸망후 왕건이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면서 선포한 국호인 '고 려.'도 궁예의 고려와 같은 뜻이였다.)를 선포하였다.

903년에는 후고구려의 해군 기습에 의해 금성(錦城,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패전하였다. 907년 견훤은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장악하였다.

나주 지역을 후고구려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후방이 고려에 노출되어서 후고구려와 신라 방면으로 세력을 마음대로 확장할 수 없다는 것 이외에 자칫하면 후고구려에게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될 수 있고, 또 바다를 통해 중국과 외교 교섭과 무역을 주고 받고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는 후백제로서는 중국과의 외교 교섭과 무역 거래, 더 나아가 중국과 일본과의 중계 무역까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사태로서 후백제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었다. 실제로 909년 영광군 염해현(鹽海縣) 앞바다에서 견훤이 오월에 보내는 선박이 왕건에게 나포되어 후백제의 사신은 물론 가지고 있던 물건들까지 모두 빼앗기기도 했다. 나아가 왕건이 이끄는 2,500여 명의 수군은 진도를 지나 고이도를 장악하였다. 909년부터 910년까지 견훤은 나주를 놓고 마진(摩震)과 육지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는데, 910년에는 견훤 자신이 몸소 보병과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열흘 동안 나주를 포위하기도 했다. 왕건의 선단은 911년에 나주를 거쳐 무진주로 진격했지만, 견훤의 사위였던 지훤에게 막혀 물러나야 했다. 912년 덕진포(德津浦)[4]에서 왕건(王建)의 화공에 패하고 견훤 자신은 작은 배를 타고 겨우 도주하였다고 한다. 궁예와 왕건의 이러한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은 고려 시대 당시와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의 한국 역사학자들에게서 왕건의 고려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건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받고 있으나, 실제로 이후의 후고구려,고려와 후백제의 쟁패 과정을 보면 궁예와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의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우선, 후백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인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을 받은 일이 없었고, 해상 봉쇄를 통한 후백제의 외교적,경제적 고립과 충청남도 북부 지역과 나주 지역을 통한 앞뒤로의 대규모 동시 협공 우려를 견훤에게 심어줘, 후백제의 신라 지역과 후고구려 지역 진출을 억제해 후백제의 국력을 더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 이외에, 기존의 후백제의 국력을 근본적으로 쇠퇴시키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후백제는 궁예 시절과는 달리 중국과의 자유로운 교역에 성공했고, 심지어 중국뿐만이 아니라 북방의 거란과도 자유롭게 교역을 하는 모습을 보여, 애초의 나주 지역 점령의 가장 중대한 목적중 하나였던 후백제의 외교적,경제적 고립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여전히 나주 지역을 고려에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궁예 시절보다 훨씬 국력이 강해져서 신라 지역으로 활발히 진출해 결국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함락시켰고, 이 직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한 왕건의 친정군까지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전멸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 929년 후백제의 나주 지역 탈환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930년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이후 후삼국 통일 전쟁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보였고, 후백제는 나주를 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창 전투 대패 이후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또 고려는 929년에 나주를 후백제에 빼앗겼는데도 불구하고,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당시 신검의 쿠데타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을 구출해 고려로 데려올려는 목적으로 나주 지역을 공격해 탈환하기전까지 6년 동안 나주 지역을 탈환할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과, 936년, 왕건이 견훤을 대동하고 고려의 국력을 총동원해 신라의 낙동강 지역을 통한 최후의 후백제 공격때 1년 전에 점령한 나주 지역을 이용해 낙동강 지역과의 대규모 동시 협공 공격을 시도하지 않은 점 등으로 봐서 궁예와 왕건의 나주 지역 점령 활동의 군사적,경제적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918년 6월에 태봉(泰封)에서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바꾸자, 견훤은 일길찬 민합(閔合)을 축하사절을 보내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왕건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한편으로 오월에도 즉각 사신을 보내 말을 바쳤고, 오월은 답례로 견훤에게 중대부(中大夫)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궁예 휘하의 이흔암이 지키고 있던 웅주(熊州)는 이흔암이 철원(鐵圓)으로 상경한 사이 운주(運州) 등 10여 개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 9월에는 상주의 아자개(阿慈蓋)가 왕건에게 항복하고 있다.

신라 방면에 대한 공략

920년 9월에 견훤은 다시 아찬 공달(功達)을 고려에 보내어 다시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 화살을 바치며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고서, 10월에 대야성에 이어 구사성(仇史城)까지 함락시켰고, 다시 곧 진례성(청도군)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구원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한다.

921년 여름에 도선의 제자인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가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후백제의 수도 완산에서 멀지 않은 임피군에 도달했고, 이때 견훤은 경보를 맞아들여 남복선원(南福禪院)으로 올 것을 청했다가 다시 경보가 스승의 옛 거처인 백계산 옥룡사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말에 후백제의 궁창과 명권이 고려로 투항하고 있다.

924년 7월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은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애선과 왕충중, 애선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냈지만 조물성 사람들의 거센 저항으로 성을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견훤은 8월에 절영도(絶影島)의 총마 한 필을 왕건에게 보내고 있다(후술). 한편 신라에서는 경명왕이 죽고 경애왕이 즉위하였으며, 925년 9월부터 발해에서 대규모 망명자들이 고려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10월에 견훤은 다시 3천 기(騎)를 이끌고 친히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지만,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양측이 서로 화친을 하기로 결정하고(여기서 누가 먼저 화친을 요청했는지는 기록들에 따라 서로 엇갈린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왕건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고 나오지만,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는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 국서를 주고 받은 문서에서는 이때 견훤이 먼저 화친을 청한 것으로 나온다. 현재 한국 역사학사들 다수의 의견은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이 먼저 화친을 청했다고 기록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조차 견훤과 왕건이 서로 주고받은 국서에서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쓰여있는 것으로 봐서 견훤이 먼저 화친을 요청했다는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서로 왕건의 사촌아우 왕신(王信)과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함으로써 화친이 성립되었다. 12월에 견훤은 다시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후당으로부터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 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 백제왕 식읍 2천 5백 호의 관작을 제수받았다.[2]

고려와의 전쟁

926년 음력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하여 견훤은 웅진 방면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자신이 보냈던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고, 이에 왕건은 웃으며 견훤이 보낸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주었다고 역사 기록들에 전한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6]. 이는 궁예나 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산 전투
본문은 공산 동수 전

927년 정월에 왕건은 후백제의 세력권인 용주(龍州)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고, 견훤은 후백제에서 죽은 왕신의 시신을 고려로 송환하였다. 3월에 고려는 다시 운주성주 긍준(兢俊)의 군을 격파하고 이로부터 사흘 뒤에 근암성을 함락시킴으로서 죽령의 길뿐 아니라 계립령의 길을 장악하였다. 4월에는 고려의 수군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康州)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여 전이산, 노포평, 서산, 돌산을 쳐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사흘 뒤 왕건이 웅주를 공격했다가 실패하지만, 7월에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金樂)이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의 장군 추허조 등 3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강주의 북쪽인 대야성이 함락됨으로써 고려는 강주로 가는 길을 열었고, 8월에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고 있다. 이 순행에서 또한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을 비롯해 흥달을 감시하기 위해 견훤이 현지에 파견했던 후백제 관리들까지 고려에 투항하였다. 고사갈이성의 고려 귀부는 고려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수운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수운교통로를 끊기 위해 9월에 견훤은 근품성을 쳐서 파괴하고 고울부(영천)을 함락시켰다. 당시 친고려 정책을 펼치던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왕건의 군이 오기도 전에 단숨에 서라벌로 단숨에 들이닥쳤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사로잡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고 부하들에게 궁녀들과 간음케 하였으며 병사들을 풀어 약탈을 마음대로 하고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약탈하여 돌아갔다고 적었다. 또한 왕의 외종제인 김부(金傅)를 새 왕으로 임명하였는데, 견훤 자신은 왕건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이때의 일을 "국상 김웅렴(金雄廉) 등이 족하(태조)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고 메추라기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 반드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사(宗社)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었기에, 내가 먼저 조적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금호의 도끼를 휘둘러서, 백관들에게는 밝은 해에 맹세코 6부를 의리 있는 풍도로 설득하리라 했는데, 뜻밖에도 간신은 도망가고 임금(경애왕)께서는 돌아가셨으므로 하는 수 없이 경명왕의 표제이며 헌강왕의 외손 되시는 분을 받들어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니, 위태로운 나라가 다시 세워졌고 없던 임금이 다시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동수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ㆍ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7] 이 전투를 공산 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구미시 인동)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11월에는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장군 색상을 전사시킨다. 이렇게 다시금 서라벌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11월 7일에 오월에서 반(班)씨 성을 가진 상서가 도착해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화친할 것을 권하는 오월왕의 조서를 전했는데, 이 조서를 베껴 왕건에게 보내면서 견훤은 따로 왕건에게 보내는 글을 지어 함께 보냈다. 이 글은 최승우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서 고려군을 상대로 거둔 전승들을 열거하면서 승패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한편으로 "내 활을 평양성의 문루에 걸고 내 말에게는 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라고까지 하는 등 자신감을 드러내는 견훤에게 928년 정월 왕건은 다시 장문의 답장을 보내 마찬가지로 고려가 후백제를 상대로 거두었던 승전 사실들을 열거하며 "아직 승패는 알 수 없다"며 응수하고 있다.

928년 1월에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과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에서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5월엔 강주의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은 강주를 습격하여 진경의 군 3백여 명이 전사하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 왕건은 공격 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는 가운데 4월에 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고 7월에는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후백제군에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김훤, 애식, 한장 등이 이끄는 후백제군은 청주를 공격했으나 탕정군에서 지원군을 거느리고 출정한 유금필의 반격으로 3백여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독기진까지 물러났다.

왕건은 8월에 충주(忠州)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이에 맞서 왕건은 명지성 원보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쫓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차지하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조물성 일대의 정찰을 명하고 있다.

10월에는 후백제군이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고(《삼국사기》) 11월에는 견훤 자신이 정병으로 오어곡성(《고려사》, 《삼국사기》에는 부곡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고려군 1천여명을 죽였으며, 이 무렵에 고려의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고려사》는 이때 왕건이 군사들을 왕궁 구정에 불러모으고 양지와 명식 등 여섯 장수의 처자식들을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린뒤 저자에서 참형을 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2]

고창 전투에서 운주성 전투까지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한 견훤은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929년에는 고려로부터 나주를 다시 빼앗아 장악하고, 7월에 견훤이 친히 갑사 5천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죽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 했다고 한다. 나아가 후백제군은 10월에 고사갈이성 공격을 시도했고(《고려사》)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930년 1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1개월여간의 대회전 끝에 견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여명에 이르렀고, 자신의 참모인 시랑 김악이 고려군에 포로로 잡히기에 이른다. 유금필이 고창 전투 직전에 공훤과 홍유와는 달리 후백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을 왕건에게 강력하게 요청해 승락을 얻은 후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저수봉으로 진격하여 저수봉을 빼앗은 이후로 계속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8]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패권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932년 6월에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고려에 투항하였는데, 공직은 왕건을 부추겨 일모산성(연산군)을 공격하게해 왕건은 그해 7월에 군대를 거느리고 일모산성을 직접 공격해 11월에 일모산성을 함락시켰다. 공직이 항복하자 견훤은 완산에 남아있던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한 명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9월에는 후백제의 일길찬 상귀가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전함 100척을 파괴하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였으며, 10월엔 해군장군 상애가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해 고려의 당시 수군 총사령관이었던 대광 왕만세까지 패퇴시키기도 했지만, 이들은 결국 당시 고려 조정 내부의 참소로 곡도로 귀양 와 있던 유금필에게 격파당했고 이후 다시는 해군을 동원해 고려의 내해와 섬들, 육지를 침략하지 못했다. 후삼국 시대와 고려시대에 대한 정사들인 삼국사기 견훤 열전,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는 932년 9월과 10월 이후 후백제 해군의 고려 내해와 섬들,내지의 침공 사실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935년, 왕건의 명을 받은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군이 929년에 후백제군에게 빼앗긴 나주 지역을 탈환했다고 나온다. 933년 5월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을 통군으로 하는 후백제의 군대가 혜산성과 아불진(경상북도 경주시 부근)을 공략하면서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함락 위기에 몰리자, 이를 막기 위해 왕건이 당시 의성부(경북 의성)를 지키고 있던 유금필을 긴급히 출동시켰고, 유금필은 당시,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중 급히 추려 출정한 결사대 80명의 병력과 사탄(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위치한 여울)을 건너 신검의 군대와 마주쳤지만, 신검의 군대는 유금필군의 기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났고(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결사대의 지휘관인 유금필은 두렵지 않고 그의 부하 병력들만 매우 두려워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당연히 유금필도 그의 부하 병력들과 함께 두려워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의 부하 병력들보다 유금필을 더 두려워했을 것이다.)이후 유금필은 경주에 도착해 경주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고, 이후 유금필과 그의 결사대가 돌아오는 길에 사탄에서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신검의 후백제군이 자도에서 유금필과 그가 거느린 80명의 결사대를 공격했지만 금달,환궁 등 후백제 장군 7명이 사로잡히고 그외에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사로잡히는 굴욕적인 패배를 다시 당했고, 자도에서의 유금필군의 전설적인 승전 소식을 접한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유금필에게 매우 크게 감탄했다고 고려사 유금필 열전,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934년 9월, 왕건이 운주 일대를 빼앗을려고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갑사 5천명을 뽑아 운주로 진군했지만 고려군의 기세가 강성해 승산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양군이 서로 싸우는데 세를 온전하게 갖추지 못하여 무지한 병졸들이 많이 살상될까 걱정입니다.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자 영토를 보전하도록 해야겠습니다."라며 왕건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고려군이 자신의 영토를 빼앗을려고 진군해왔는데도 화의를 청해, 평소의 패기 있고 자신만만해하던 견훤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근본적으로 930년 고창 전투때부터 지금까지 고려군에게 전체적으로 패배를 거듭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후백제군과 견훤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고려군에게 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고, 견훤의 이런 약해진 모습을 간파한 유금필이 왕건에게 견훤군을 공격할 것을 요청해 왕건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유금필은 강력한 기병 수천명을 이끌고 돌격해 후백제가 미처 진을 치지 못한 사이에 후백제군을 쳐서 대패시키고 후백제측의 술사 종훈과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고, 후백제군 3000여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웅진 근처의 30여개의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2]

후사벌과의 전투

929년에는 박언창을 공격하여 후사벌국을 멸망시켰다. 917년 신라 본국과 연락이 두절된 후 사벌대군 박언창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나라를 세워 자치 정권을 운영하였다.



생애 후반
신검의 정변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 · 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도독과 무주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나가 있었고 신검만 완산주에 남아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935년 3월, 견훤의 나이 69세 때의 일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신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던 때의 모습에 대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혼미한 상태에서 멀리 대궐의 뜰에서 고함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은 견훤이 "이것이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신검이 견훤에게 "왕께서 연로하시어 군무와 국정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에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곧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파달 등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9]



고려 망명

4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해 6월에 고려로 망명하였다(이 해 4월에 유금필이 나주를 다시 점령한 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 같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견훤이 자신보다 10살이 더 많다하여 견훤을 상부(尙父)로 부르고 별궁인 남궁을 주었으며 '정승.'으로 봉해 직위를 백관들은 물론 심지어 태자인 왕무보다 위에 두었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10]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을 그 아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1월에 신라의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귀순한데 이어,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도 내응할 뜻을 밝혀왔다. 6월에는 견훤이 직접 후백제 정벌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은 태자 무(武)와 박술희로 하여금 천안부로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왕건은 3군을 이끌고 9월에 천안부로 나아가 군을 합쳐 일리천(선산)으로 나아가 신검과 대치하였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10만 7천 5백 명(《삼국사기》), 또는 총 8만 6천 8백 명(《고려사》)이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왕건과 함께 전군을 사열했으나 전투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없으며, 《고려사》에는 기병 1만을 친히 견훤이 이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군세가 엄정한 것과 견훤이 함께 출정한 것을 본 후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병기를 던지고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후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던 것 같다.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투항한 후백제 장군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후백제군의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의 목을 베었으며 후백제군 내부에서는 자신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후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너머 마성에 주둔하였다. 신검은 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본심이 아닌 능환과 양검,용검 등의 협박(?)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하지만, 2000년~2002년까지 KBS 1TV에서 최고의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태조 왕건.'의 마지막회의 나래이션에서도 나왔듯이 학계에서는 신검이 비록 벼슬을 제수받았다고는 하지만 동생들인 양검과 용검이 항복한 이후, 왕건에 의해 진주로 귀양갔다가 얼마뒤에 모두 처형된 점, 신검 자신도 왕건에게 투항해서 벼슬을 받은 이후의 행적이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같은 고려시대를 다룬 권위있는 역사서들에서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고려하면 신검 역시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왕건에게 투항한지 얼마후 동생들과 같이 처형되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죽음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극도의 고뇌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생겨 며칠만에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9일이라고 하는데, 대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 되기에는 9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중국의 경우 항우와 손권의 참모였던 범증과 육손의 경우를 비롯해 극도의 분노와 울분으로 인해 단기간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사망한 사례들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무신 정권기의 청렴하고 유능한 무신 권력자였던 두경승과 구한말의 이준 등의 경우들이 있어서 실제로 있었음직하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견훤이 쓸쓸하게 사망한 곳은 연산현에서 동쪽으로 5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개태사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은진현조에는 현의 남쪽 12리 되는 풍계촌에 왕묘라 불리는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산 18번지로 왕묘를 견훤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가족 관계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에게는 장남 견훤(甄萱) 외에도 능애(能哀),
 용개(龍盖), 보개(寶盖), 소개(小盖)의 아들과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삼남 용개(龍盖)부터 이름 끝자가 개(盖)라는 점 때문에
 이들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의 소생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능애(能哀)부터 소개까지는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百濟)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 고려(高麗)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11]

《삼국유사》에는 10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금강(金剛)[12], 그리고 고려(高麗)로 함께 망명한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쇠복(哀福)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의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신검, 양검, 용검과 금강이 서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이름 때문에 행하는 추정이지 다른 증거는 없다.[13]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제가기》의 10남 2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14].
아버지 : 아자개(阿慈介)
어머니 : 상원부인. 이는 견훤의 제1모친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1부인을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인 것 같다. 이하 9인 모두를
 이 소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제가기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국왕 : 견훤(甄萱, 867~936) 재위:892?/900?~935)
왕비 : 왕비 박씨(王后 朴氏) 장남 : 견신검(神劍,885~936 재위:935~936)
차남 : 견양검(良劍, ? ~936)
3남 : 견용검(龍劍, ? ~936)
장녀 : 국대부인 견씨 (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에게 시집감.
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차녀 : 견애복(衰福),정령공주(貞逞公主)
사위 : 지훤(池萱)

후궁 : 고비(古比女)
4남 : 견금강(金剛, ? ~935)
막내 : 견능예(能乂)


한편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서는 애첩 고비(故比)및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이 등장한다.
특히 비록 고비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내아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의 견훤을 위로하기 위해 신검측이 견훤과 함께 있도록 허용한,
견훤이 귀여워하던 인물들이 금산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비는 견훤이 말년에 총애하던 애첩이지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오래전에 결혼을 하였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가

현전하는 견훤 관련 기록 대부분은 그와 적대했던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견훤을 가리켜 원래 신라의 백성으로 신라의 벼슬을 하던 그가 신라 말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수도 서라벌을 쳐서 군신을 짐승이나 잡초 대하듯 죽인 천하의 원악(元惡)이요 대죄(大罪)라 비난하고, 그가 결국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것도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궁예와 마찬가지로 「(숱한 악을 행하느라) 태조(왕건)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었을 뿐」이라며 조소하고 있다.
관련 문화재[편집]
전 견훤묘 -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
상주 견훤사당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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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의 연원, 비조 이자성 기록 검토 廣州李氏의 淵源 鼻祖 李自成과 記錄 檢討, 槪論  1/21회


글을 올리는 理由와 동기,




(자성李族의 수장, 이자성等 동시대 무렵의 사로국 부족연맹장회의, 다음이미지 출처)


고대 신라부터 한 핏줄로 불사이군과 충효, 학행과 현칙의 이리를 근본으로 삼아
내려온 우리 광이가
1700년, 갑진에 우리는, 당시  석탄 암탄공파와 諱한과 諱당의 의 총 4파이며

석탄 암탄 율정 둔촌과 둔촌의 형제파로, 

4파가  族譜를 편수함에 있어서 합보동성보(합보當志론)를 論하였으나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여, 둔촌공과 율정 석탄 암탄공이 따로 譜書를 刊하였다,
이에 율정공 후손 諱인흥과 석암탄공후손 諱명련은,祖先에 哭하며 비통한 절곡을 남기고
전말을 석암탄율정공가의 광이 동성보(을사보)에
記錄하여 始祖 명자를 克明하고, 석암율 삼파는, 별도의 동성보인 석율암公家의 을사보를
 간하였고,


둔촌공파 후손 諱 하원공은 갑진년에 둔촌공가의 동성보 편수시
사대파의 상대 선계의 명자와 대수의 불명함이라든지,
율정공세전보의 비조 명자의 특신의 전의함등,
합보不意 이유로, 이러한 "합보지설을 배척함에 있어서
사의가 명정하고 변의지서를 만듬에 있어서
원고가 상세하게 하면서"  변설(총 13조)로 부기 하고,
둔촌공가 單獨의 同姓譜를 간하니 둔촌공家의 갑진보이다.



遁村의 兄弟 십운과공가는 별파라 홀로서 멀리 長興 退村에서 家乘譜로 이어갔고, 
경선고사公과 지군사공,보현公 후손들은 이런 전차로, 스스로 소원,
멀리갔으니, 어디서 찾으리,


 이로부터 우리 廣李는 갑진년 이래 同本의 兩斷이라는
비통을, 이래 300年을 지내왔다,
한 핏줄임에도 서로가 서로를 本子와 別子로 구분하고,
한 根源임에도 疎遠하여
宜情의 否陷에 率하였으니
날마다, 2000년 祖先에 죄를 짓는 悽의 斷想에 流하는,
이 어찌 부끄럽고 슬픈 일이 아니던가,



恒用, 동성보의 編과 修는 항상 胄孫에게 의무가 있었고
멀리하고 가까이함은 주손의 책임이라 할 것이니,
광릉 삼익의 주손가의 派는 이 점을 重知하여
반드시 合一의 遺業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1. 史的認識의 출발은 史料에 있고 사료는 가장 오래전에 傳承된 것들이 가치의 우선에 있고  기록된 당시의 시대상을 도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새로운 金石文과 銘文의 발굴은 史學者들에게 움직일 수 없는 사실증거로, 모든 異說을 지배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 廣이의 家乘과 族系譜의 사적사실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1720년

 갑진보 을사보 편수시에,양대 문중의 의견충돌(승산하원공과 휘 인흥공)이 이었던 바,

 낙하종회 이전의, 가장오래된 史的資料만 가치고, 분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찌기 우리 『광이가승과 족보』중 지금까지 알려진 最古本은
 여말선초의 통판공 諱 지부터 내려온 『세종 成宗조 율정가 세전초보』와


익제 문충공 慶州李氏 이제현의 6世 女壻孫이요

용제 李行이 문간공死後에 신도비를 讚한 정국공신 한원군 시호 문간공 李蓀의 祖父이자.

世宗조 원종공신 한원군 李守哲의 父 묘지석 금석銘文 명문인  『高麗조 사온주부贈좌찬성 諱李遇生 공의 묘지명 家系도』

라고 할 수 있고(용제 이행 조선초의 상신, 이제현은 고려 대학자이자 遁村의 學文譜)


한음공은 보지 못하였으나 갑진보 시에 가져온 한음상공 동시대의  族系譜 사료史料인

『光海조 당시 『정곤수家의 광주이씨 선대도』『이명징家의 광주이씨 선대도』 와


新羅末과 高麗, 高麗末과 鮮初의 광주이씨 역사를,  金石文으로 남겨 보존된

 『중종조, 박상의 문호공 신도비명의 광주이씨 사적기록』


한음상공이 어렸을때 대부거소에 가서 보았다(경술보기록)는

『중종 명종조의 동고상공때의 인보』이고, 또한


한음상공이 경술보 편수시에『언전과 잡기』라 보았던,

 『이이만가의 선대부터 이어져 온 가승보』(후에 이이만家 갑진 별보초본 즉, 諱 후징과 諱 필행家에 記錄 保存되어온 『광이 오자 구등과 』, 『호송산 전설』, 『광주태수 따님 인화이씨와 생원공 』,『비조 이자성과 신라부흥운동, 이당의 비탄, 칠원이씨』『최사간과 둔촌』 『생원공 묘지』『고덕동 유래』 『왕숙탄 설화』등

,(이를 근거로,  1970년 둔촌공家의 인사동 廣李 대종회 에서는 『광이세적』으로 통합 발간)

이라 할것이다 .



『參考,李 知(광주인) 고려말 조선초 세종조의 판관,향공(鄕貢)문과로 통적(通籍)하였다, 이어서
구분죽사부(九分竹使符. 태수로 임명받아 임지로 가는 신분증, 부는 신표.마패이다)로
몸가짐을 염간(廉簡)히 하고 임지(任地)로 가매  사람들이 전부 청백(淸白)하다고 일컬었다.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근무시에는,중국(中國)사람이 뇌물을 두터이 하여 장사를 밀행(密行)하려

 하였으나 공(公)은 홀로 받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上官)에 누(累)가 될까 하여 감(敢)히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조정(朝廷)에서 그 상황(狀況)을 알고 조사한 결과 판관 이모(李某)는 비단 열 필(匹)을 물리쳤다하니
그 청절(淸節)이 조정(朝廷)에 드러남이
이 같은 고(故)로 세종(世宗)께서 포창(襃彰)하여 의복(衣服)을 하사(下賜)하고
 그 뇌물을 받은 자들은 죄(罪)주고 공(公)에 대해서는 정려(旌閭)로써 특별히 표(表)하니
탐부(貪夫)가 족(足)히 청렴(淸廉)해 지더라. 그러나 공(公)은 물러가기에 과단성이 있어
 비록 한위(韓魏)의 부(富)를 당(當)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놀랍지 않게 여기고
수석(水石)에 노닐고 나물밥을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었다.
  그 아들이 관의(寬義)다..』
*이지의 통적은 고려말이다. 고려시대는 통적(과거급제)을 하여야만 반가이고 비로서 사람이다.
 조선조말에는 유학도 사람구실로 여겼으나 고려말조선초기에는 통적하지않으면 본관이 없다,
이지의 통적시에는 반드시 상대 4조 내와를 올리게 되었다
율정초보는 이지가 만든 것인데 이것을 보아도 당시부터 전해오는  선계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參考,李浚慶 /1499(연산군 5) -1572(선조 5)  /자,원길(原吉)  .호,동고(東皐)
조선 중종 때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원길, 호는 동고, 남당,

홍련거사, 연방노인이며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사되면서 함께 연좌돼 괴산으로 유배됐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으며 조광조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중종 26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으나

 권신 김안로 일파에 밀려 파직 당했다.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돼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565년 영의정이 된 후

국정을 주도해 소격서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선조 5년 국가 경영에 관해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를 올리고 사망했다.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치권력이 옮겨가는 과도기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할아버지는 세좌(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이다. 6세 때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사사되었으며 그도 이에 연좌되어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李延慶)과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에 밀려 파직당했다.

이후 문밖 출입을 끊고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정진했다.
1537년에 김안로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직제학·승정원승지·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0년 정적이었던 이기(李芑)의 탄핵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지중추부사로 복귀했다. 1553년에 함경도순변사로서 북방여진족의 반란을 진무했다.

1555년 을묘왜변 때는 전라도도순찰사로서 내륙 깊숙이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돌아와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1558년 우의정에 오른 이후 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기간에 국정을 주도하여, 척신 윤원형(尹元衡)을 축출하는 한편 조광조를 신원하여 문묘에 배향하고,

소격서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1572년(선조 5) 국가 경영에 관하여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를 올리고 죽었다.

그중 붕당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나 이 예언은 몇 년 후 동서분당으로 현실화되었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東皐遺稿〉·〈조선풍속 朝鮮風俗〉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2.
 현재로 전해진 것중, 가장 오래된 보는『高麗조 사온주부贈좌찬성 諱李遇生 공의 묘지명 家系도』,『중종조, 박상의 문호공 신도비명의 광주이씨 사적기록』과

  『 둔촌공가 경술보로  광해 경술(光海庚戌)에
첨추공 시정공이  속수(續修)하고 한음상공(漢陰相公)께서
 교열서문(校閱序文)한 것으로 생원공 唐 이상의 상대 선대에 대한 기록이 있었던 바,
이는 안팍의 親族들이 가져오거나 諺傳과 세전 초보와 각記에서 求한 것』이라 할것이고, 광이 上代追考의 보충자료는

『광이 사돈인 이천인 서견家 족보』 『정곤수家 족보 외손기』 『이명징家 족보의 외손기』와 『여말학자 둔촌유고 -잡영 詩文의 개성.염현.이천일대의  詩的背景 연구』 가 있다할 것이다.


지금 족보는 대부분 同姓譜이나, 新羅高麗  시대는 母系위주이고 8조고도처럼 外孫가 本孫이 同等히 올리는 풍습인지라,

『염주서씨 서자번의 족보』『 남양인 홍순의 족보』『. 경주이씨 이제현 가계』『 강주이씨 이지효』

『광이사돈 유창의 족보』 가계를 보면

 고려말 우리 광이를 유추할 수 있고, 유추는 先代를 上考하는 길인 것이다.


  우리 광이족보 근원을 상고하면, 고려 시대와 선초는 과거 응시序로 가문의 내력이 필요한 바
『 사가의 禮에 준한 8고조도가 집집 마다에 있었고, 이를 가승가첩(족보)이라 불렀다. 가승은 대부분 필사한 것으로,
친손들이 주관하지 않고, 친손과 외손들이 합작하였다.첫머리에 상고시대의 원시조와 득성의 유래가 알 수 있도록,
중흥한 선대와 관작을 기록하고, 파로 갈라져 온 내력을
후서하고, 본가에 이르러서는, 휘의 조를 쓴 다음, 나를 중심으로 한, 내외가의 8조고를 기록하는 것이니,
이름과 자와 호와 생몰일시와 등제 입격과 관작과 모시는 장지의 위치를  기록하는, 집안의 역사보로,
보통 20매의 매수이고, 차자가 분가를 하거나, 출가할 때는 여서에게 필사 한 부를 주었다.
종가 전체가 동성보를 편수하고자 수단을 모을 때는, 또 필사하여, 종 유사에게 제출한 것』이니,
여말 선초부터 시작한 이 풍습은, 해방후 1970년대 까지 내려온, 우리 동방 해동국의 풍습인 것이다.


   당연 『 국자감 휘녹생의 율정 家에도,遁村공가 參議 휘 지직,지강,지유의 家에도, 십운공 판서 휘두신의 家에도,
암탄공 찬성 諱우생의 家에도, 형의 석탄공의 家에서도,
고려말부터 성리학의 본가인 유학을 선지로 한, 班家이기에, 안동권씨성화보나  유씨가정보처럼, 조선 세종조 때부터
   "멀리 상대 시대부터의 원조와 득성 내력"을 기록하고, 중조와 본조의 고조에서, 나로 이르는 내외가의 이러한
가승 가첩(세보)은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갑진년 합가 시도의  편수당시에
4대파  제종들이 가지고 온 수단과 가승에서
나타난 신라 내사령의 휘 자성호 또한 이때부터 유래한 것이다』 할 것이고 ,이를, 동성보로 여러 일가가 合本하였을 때,
  오늘날,이야기하는, 『족보이자 동성보 만성보 세보라 한 것이다.우리 광이 族譜를 발간한 연유는
1412년(태종 12)에 왕실에서는≪선원록 璿源錄≫·≪종친록 宗親錄≫·≪유부록 類附錄≫을,
서얼차대법을 제정, 종실의 적서(嫡庶)를 명확히 구분, 명분하여, 종부시(宗簿寺)에서
≪국조보첩 國朝譜牒≫·≪당대선원록 當代璿源錄≫·≪열성팔고조도 列聖八高祖圖≫ 을
돈녕부(敦寧府)에서는 외척과 부마를 대상으로 한 돈녕보첩(敦寧譜牒)을,
충훈부(忠勳府)와 충익부(忠翊府)에서는 각기 역대공신과 원종공신들의 족보를 작성, 비치하자,
士家에서는 宗法에 의거 동성 族譜를 간하고  너도 나도 족보편찬에 나서는데.
세종조 부터 명종조로. 이때의 족보가≪ 율정공가 광릉세전초보(성종조)≫와,
≪ 동고상공 광릉이씨인보(명종조)≫≪안동권씨성화보 安東權氏成化譜(성종 7, 1476)≫
 ≪문화유씨가정보 文化柳氏嘉靖譜1565년(명종 20)≫가  간행,타 사가들도, 너도나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들 족보는, 자녀의 기재를 출생순으로 하되 부→자로 이어지는 친손계는 물론,
부→여로 이어진 외손계까지 대수에 관계없이 등재하였으니,
대부분 당대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띠는 기실 이 족보도, 내외조고의 『가승보인 것이다

 우리 광이는 <석암탄공 둔촌공 선대를 포함시킨 성종조>의 『율정공가  광릉세전보』와
명종조 동고상공의『동고상공 광릉세보 인보』가 그것이다.
그래서, 율정공가에서는 1724년 갑진보 편수시 까지 보존된 성종조 『광릉세전보(필사보)가 있었고, 
『동고상공의 광릉세보 인보는,
임진 병란을 당해 실화] 되어 갑진 당시는 볼 수가 없었고, 
『율정공가  광릉이씨세보 필사보만, 갑진 낙하종회 회합시까지, 보존되어 온 것으로,
갑진보 편수시에야 全宗家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율정공가에 전해진 율정가승세보에는
 『우리 조상은 신라 내물왕조 내사령 諱자성이 시원인데 그의 아들이 諱군린 諱용수가 있으며
대대로 칠원지방을 군령하는 호족이다. 이후로는 어느 대를 이어오다가 
諱한희 -諱방린이고, 諱방린 이후로 대와 휘를 알 수가 없으나, 현손이 고려조 익비 익준 익강이며
諱익준은 고려 벼슬이 합문지후인데 후손이 없다, 휘 익비 익강의 손들이 국자생원 한당과 석암탄 공이다.
우리 이족은 본관이 칠원이씨로 신라의 영웅 호걸로서, 신라 부흥을 이루기 위해, 봉기하였는데,

힘이 부족하여 고려 태조에 의거 강계 이속이 되었다, 회안의  광이선조들은 이속과 망향, 충절의 절의를 기리기 위하여
畿內 이속된 지역 산정에, 천도와 이속, 조상의 내력이 적어서 그 내용을  팔면비석으로 세워 남겼다.』


   일가 전체의 동성보,세보가 없다고 하드라도, 유학 士人은 학문을 위해

당서와 國學을 거쳐서 과거를 보아야야하고, 과거를 통하여, 8조고(내외 4고)를 기록하는 것이

응자의 禮이므로, 각 율정공 둔촌공 십운공 석탄공 암탄공 후손 長孫가마다 
『가승보 또는 8고조도라는 家乘을 간직하고 있었다
 임진병화 이후로 둔촌공가에서는 동고상공광릉세보 인보가 유실되어 없어진 관계로,
이에, 만력 경술에 이르러, 동성보를 편수하자는 주장이 있는바, 이것이 동고공손자 『사온 사수공의 경술초보』다.
당시 명종조부터는, 대부분의 班家는 일가 전체의 동성보를 편수한 宗事들이 상례인지라,
오늘날 傳하여지는 士家들의 동성보라는 것이, 대부분 이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동고공 손자인 사수(士修,) 사온공이 주축이 되어 성보(姓譜)를 중찬하였는데,
『옛날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댁에 갔다가 광릉세보』를
보았는데 활자로 인쇄되어 있었으나
 아들과 사위만 기록하고 외손은 기록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간단하여 한스럽게 여겼는데
자라서 옛사람들의 종법(왕실의 선원록등을 참고한 당시의 동성보)을 자세히 검토해 본 뒤에야
이 족보의 깊은 뜻을 깨달았으니 모두가 동고상공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더라.

임진란 때 나라의 서책들도 다 불타고 없어졌거늘 하물며
족보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 종중의 어른이신 이사온(李士溫)씨께서는 우리나라 여러 집안의 계보를 잘 아셔서
『사온 사수공의 경술초보, 가승보』를 아주 자세히 편찬하여

여러 번 나에게 교정하기를 청했으나,
그러지를 못했었다. ....  근자에 문소(聞韶*경북 의성 옛 이름) 이사군(李使君*수령의 다른 애칭)
 사수(士修)씨가 기록한 족보 한권을 보내 왔는데, 모두가 동고상공의 옛책을 그대로 적었고,
또 소씨(중국 성씨) 족보의 자세함과 간략함을 본 떴으니 전에 내가 교정하지 못했던 것과,
그 뜻이 같고 믿을 수 있음을, 한번에 알았으며, 그 기록을 대대로 남길만하였다.
한두군데 틀리고 빠진 것이 있어 들은바 대로 고치고 바로잡아, 그 전말을 서술하여 다시 보냈다./경술보 한음상공 서문)』에서
보듯이 한음때의 경술보는 사수공의 중찬을 중심으로 만든 일종의 가승보이다


  사수 公 집에는 <전래 동고시대의 세첩(世牒)광릉세보>이 없었기 때문에
선대인 <저 멀리 신라시대의 내사령(內史令)이 있고 없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던 실정』이고,


즉, 한음 상공 또한,소시적에 동고상공의 인보를 보았으나,
 경술년 동수할 때에 이르러서야, 광이 전체 일가가 모이고 나서,
안과 밖의 손들이 가져온 가승과 수단과 세전을 보고나서야


『한희 -광릉 삼익과 4대 명휘 등, 선대들의 휘가 있었고, 이렇게하여 다른 집안과의 친족이 연하는 것을 알겠으나,

선대의 명자와 대수가 불명함으로  다만 둔촌 이후는 명확하고 본시 방친의 손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닌,
둔촌공 후손의 동성보이므로,둔촌(遁村)으로 위시(爲始) (둔촌부터 시작한다는 뜻)하여

둔촌 이전의 각 파에서 번성하고 현달한 분들이 역시 많지만,(본 족보는 둔촌공 후손의 동성보)이므로

 (遁村以前各派之繁盛而顯達者亦多有之而本譜以遁爲始故付于別譜) 보첩을 발간한 것이다.


즉 둔촌이 시조가 아니고 시작되는 조라는 것이다, (원래부터 둔촌공가는 생원 諱 당을 시조라 하였는데
『알 수 있는 증좌가 있으니, 생원공 휘 당(唐)의 묘비명(墓碑銘)으로
『갑진보』가 발간되기 55년 전인 현종 10년(1669년)에 건립된 생원공 휘 당(唐)의 ‘
묘비 음기(陰記)’를 보면, “生員公 휘 당(唐)이 시조(始祖)”라 기술되어 있다.휘 당(唐)의 ‘묘비
음기(陰記)’를 보면, “이 나라 조정에 많은 인물이 번성하였으나, 이 가운데에서도 廣州李氏가
가장 으뜸이었으며, 公은 그의 시조(始祖)이시다.”라고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
휘 당(唐)의 묘비명(墓碑銘)은 당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었던 원정(元禎)公이 撰하였다.)

즉, 멀리 신라 원대나 4대 명휘 이전을 논고할 필요성,이 당시는 없던 것이다


그 예로 광해조나 조선 중기 이후의 반가의 성씨 동성보는, 대부분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파 중심"이었다
그것은 경주, 광산, 김해김씨, 경주이씨, 여주이씨,문화유씨, 안동권씨, 등등 전 동성을 아우리지 않고
각기 중시조를 특정하여, 이후를 포함하는 성보이다,  


 상고 하건데 경술년 당시, 수단과 동수가 전 종문에 전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돈촌의 형제파에게도 통문하지 않는 『순수한 둔촌공가의 성보』 인 것인데

집안 내에서 4대 명휘 이전의 기록을
가져왔기에 별보에다가 , 이전의 방계를 부기하고, 방친을 알게 한 다음에 정확한 것은
전의 구정을 당부한 것이다.


그래서
『둔촌공 후손만을 취한 것』이고 한음 상공께서는, 이미 석암탄과 율정의 후손들이 사대부를 이루어

 조정에 있던 것은 아는 지라
그 방친의 친족은 밝히고자 했으니,둔촌의 형(경선고사파)과 세 동생(십운공파 보현공파 등)

및 백부(伯父)인 한(漢) 자(율정공,파), 
종백부인 석암탄공의 파는 권말에 기록하면서(이를 別譜라 하고)
  권말에 "원조(遠祖)로 휘 한희(漢希)라고 쓰고, 그 아래는 중절(中絶)이라
썼으며, 그 뒤의 세계(世系)는, 방친(傍親)으로 연계(連繫)의 맥을 얻게하여,
방친 율정공 석암탄공 모두가 동종(同宗)의 사이 임을 알게 하고 북백에서 인쇄』하니, 오늘의 경술보이다.
즉, 임진왜란후 처음 동수한 경술보는 "둔촌위시의 손"을  손록하기로 작정한 것인데, 한음상공에 의해서,
율정공과 석암탄공과의 방계 혈족임을 밝히었으니 중한 경술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율정공 석암탄공 십운공파에서는, 동수 합보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

 한음상공은
둔촌을 위시하고,  4대명휘 이전의 기록은 서문이 아닌 부록 범례에 부기하면서
"『안과 밖의 선대 家乘과 內容이 일부는 가거할 만하다 할것이고,

일부는 名字와 대수가 不明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두서하지 못하고  권말에 부기한다, 그러므로, 傳해진  이의 전부를 버리는 것은
오히려,진실한 事實을 버리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니, 疑心스러운 것은, 나중 근거가 나오면 바로 잡자는,
 "전의 求正"을 當付하는 글을, 경술보에, 남긴 것이다,라며 꼭 두서하고 4대명휘와 상대를 기록하여 생원 이당과 둔촌을

연결하는 보서를 하여야하는데 구하지 못하여 구정을 당부한 것이다

만약 그 당시에 한음상공께서,

눌제 박상의 문호공 비문을, 정곤수 이명징가의 광이 상대도를, 고려조 사온주부 우생공의 묘지명을, 율정공가에서 통찬공부터 내려온 율정세전초보를 보았다면, 즉각, 단숨에, 『비조 이자성』부터 생원공 이한, 생원공 이당,- 둔촌 형제의

『계보도』를 두서하셨을 텐데, 아,그때는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부기하고 전의구정한 것이다.
 진지하고 학자적인  태도이신 것이다.



  ....이후, 기백이 흐른 뒤 광이의(본별자) 손들은, 다른 姓本의 사가들은 전부 일가를 동본 동수하는
세보를 만드는 데, 유독 광이 일가는 『종가 합보가  없으므로.



『『參考, 고송정 연구시회의 둔촌 석탄 율정공의 돈수
(고송정회동지사연구(孤松亭會同志士聯句)


       운곡 원천석 (耘谷 元天錫) 原州人 학자
            옛 나라의 석잔 술에                          고국삼배주 (故國三盃酒)
            은근 하게 모였네                              은근공합잠 (慇懃共합簪)

       고송 허  견 (孤松 許  絹)
            여윈 대나무는 눈속에도 의젓 하고      피황영설은 (疲簧迎雪은)
            늦게핀 국화는 서리앞에 향기롭네       만국오상암 (晩菊傲霜암)

       야은 길  재 (冶隱 吉  再) 海平人 성균박사
            하늘에 해가 둘이 있을수 없고            천일원무이 (天日元無二)
            사람에겐 삼강(三綱)이 있도다            인생진유삼 (人生진有三)

       도은 이숭인 (陶隱 李崇仁) 星州人 밀직제학 
            억센 고사리로는 폐부를 맑게 하고      강미징폐부 (剛微澄肺腑)
            모지랑 버들가지로 람삼을 짜네          독유직람삼 (禿柳織람삼)

       둔촌 이  집 (遁村 李  集) 廣州人, 학자
            진귀하고 흠없는 구슬은                      진중무하옥 (珍重無瑕玉)
            세상이 浮沈해도 물들지 않는 쪽이라네 부침불염람 (浮沈不染藍)

       석탄 이양중 (石灘 李養中) 廣州人 참의
            외로운 신하는 옛 친구로 남았는데   고신여고구 (孤臣餘故舊)
            어진 벗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도다    양우진서남 (良友盡西南)

       상촌 김자수 (桑村 金自粹) 慶州人, 대사성
            나랏일은 춘추의 대의를 따르고           곤월춘추의 (袞鉞春秋義)
            농사는 조석으로 논해야 함이러라        농상일석담 (農桑日夕談)

       여와 서  견 (麗窩 徐  甄) 利川人,사헌장령, 율정 관의 증고모부.통판이지의 고모
            슬픈 회포 낙조에 의지하고                  창회빙낙조 (愴懷憑落照)
            엎드려 솔과 쑥대밭에 숨노라               전칩엄송암 (전蟄掩松菴)』



 한음상공과 ,제종파, 어른들(석탄,암탄,둔촌,율정의 서견)의 遺訓을 쫓아서,

3. 광이 4파  同姓譜 合譜 위한 노력,


  통판공 휘지 율정의 후손, 휘 인흥과 석암탄공 후손 명이 전 종문에 통문하여, 광이 전체 합보를 주장하고
경술보와 기타 보에서의 선조 두서와 4대 문중 분보와 시조 불일치의  부당을 장하면서
통합하기로 하고, 석율암 3파는, 둔촌공 후손들이, 보를 만든다고 하니,
4파 동성보의  동수와 수단의 件으로 모여, 會合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경성의 낙하 종회이다.


  그 자리에서 합보 문제를 논의 하였는 데, 이때 참가한 분들이 둔촌공 후손으로『교리 諱승원과 참판 諱하원과
"율정공 후손 휘인흥, 석탄공 후손은  휘명련공 휘 홍공과 십운공 후손 공등과
4파의 경향 제종』들이, 전부, 낙하 宗會에 모이게 된것이다. 
    합보를 하게 됨은, 爲始의 存本이 같아야하고,
동조 근원의 일치를 보아야하므로, 경술보를  刊할때 나왔던 동조동본의 始原을 밝히는 문제 (전의)에
대한, 제종들의 토론이, 廣李가 생긴이래 처음으로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율정공파 諱 인흥과 석암탄공  명린, 명등과,  종중의 다수가 율정공가에 내려온 세첩과 각 문파의
가승을 토대로, 비조의 내력을 설명하고, 합보를 주장하였으나,
 예참 하원은 전의구정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결국, 둔촌공 후손들만의 보첩을

만드니 이른바 둔촌공파의 갑진보다
합보를 못한 이유로, 변설13조를 써서 둔촌공가 보서에 부기 하였다 (첨부)


당시, 석율암 3파는 광이 동성보의 합보의 이유(합보지론)와 사적증거및 사료등으로


  (가) 우리 광이가 신라시대 내사령 이자성으로 내려온 근거는

다음과 같고 이 사실은 멀리 둔촌 석탄 암탄 십운공 통판공의 생존시에

이미 통류된 사실로 낙하총회시 당시에도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인 바
상고하면, 신라기원과 내사령공 자성-군린-용수와 이한희에 이르는 선대가 맞고

이는 칠원-회안에 전래된 유사인데


  (나) 승선(李承宣) 하원(夏源)은 자성- 군린-  용수- 한희-  아래 자자자자, 이 네 자[四字]의 자(子)만을 가지고 이어
대수로 삼는다면, 둔촌 이상 내사령 이하의 세계(世系)는 합쳐야 十四代 이고
또 내물왕 초년으로부터 둔촌이 처음 태어난 해 까지를 계산하면 천 년이니,
천년 사이에 어찌 十四代 뿐이겠는가".본조의 “여지승람(輿地勝覽) ‘廣州李氏

조에는 본주(本州)에 향리(鄕吏)가 되었다고만 말하고, 이속(移屬)한 내용이 없고, 동방에
또한 칠원(漆原)의 李氏는 없지 않은가 .의문하자,


(다) 율정 후손 휘 인흥과 휘 명련과 석탄공 후손 휘 홍은, 석탄 암탄 율정과 일부 둔촌 형제파의 사람들
 당시 낙하 종가에 모인 경향의 종친들에게,『 통판공의 가전보와 선세 팔면비 사적, 이이만공의 가승보와
정곤수 이명징가의 광이 족보, 증 좌찬성 휘 우생공 묘지명, 휴징공 가의 가승보, 문호공 비문과
율공가에서 보존된 이씨 세전보를 가지고 종친들에게 보여주면서,

선대의 기록가 제 종파에서 보관된 사증이 내사령 시조가 맞으니,


  이번에 간하고자하는  우리 광이 동성보(姓譜)를 상중하 세권으로 나누어서,
매 권 머리에 내사령을 본원 비조(本源鼻祖)라 두서한 뒤,
 중절(中絶)된 곳에는 중절이라 쓰고, 이어진 곳에는, 차례 차례
휘(諱)를 이어 써서, 각 파가 문호(門戶)를 일으켜 세운 곳에, 이르러서는 중시조
(中始祖)를 삼는다면(둔촌공파는 둔촌으로 시조를,, 율정공과 석암탄공 십운공등은 각각의 파조로 )
파는 파의 조로 시조를 삼고, 또한 각자가 이미 추존할  조상이 있으니,
이와 같이 수보(修譜)한다면, 위로는, 본원의 할아버지(내사령공)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목종(睦宗)의 도리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강정을 하니,


『낙하에 모인 종친들의 중론(衆論)이 찬동』하고,그렇다면, 위와 같이,


『광이 합보로 "강정(講定)하자는 뜻"을 모으고, 둔촌공파 교리(校理) 승원(承源) 公도 이뜻에 찬동하여,
 세 권의 족보로 합보하자』고 하였었다. 
   그러나 승선 하원은

『비조(鼻祖) 諱 자성(自成)과  한희와 생원공 휘 당(唐)이상 四代祖’의 명휘 이상은
대수가 불명하고 시조 자성은 고신할 수가  없고, 염주徐씨와 칠원李씨는 만성에 없는 성본이고,
문호공 비문에 고려에 항거하였다고 하나, 칠원에서 회안의 이속 기록이 불명하다, 그래서 두서에
특기할 수가 없는데 자성비조를 대수로하여 족보의 머리에 두고 어히 동수 합보할것인가 하고,
율정세전초보는 “언전과 잡기에 근거하여 비조(鼻祖)로 삼아 보첩(譜牒)의 첫머리에 기록을 해두었으니,
위로는 선조께 죄를 짓는 일이요. 아래로는 세상의 비웃음을 살 일이로다”하며,
“별보의 여러 파를 본보에 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별보에도 또한 포함시키지 말아야 하니, 한희 이하 4대(생원공 이전)는
동고 선생의 옛 족보를 그대로 따라서 기록하지 않는것이 마땅하다』 하며  혼자서 합보를 거부하고,
둔촌위시의 경술(舊譜) 의해  갑진보를 간할 것으로 독변 하면서,

 결국 둔촌공가만 독자적으로 족보를 만드니 이가 1724년 갑진보이다.


4. 광주이씨의 시조가 신라 내사령 휘 자성과

    군린-용수, 한희-방린, 광릉 삼익에 이르는 世系 史實과
   기타 광이 기원 유래 史實


가. 광주이씨의 비조, 이자성(자성이족은 기원전 부터 서라벌 분황사지 역 발흥,內史의 令 )


  (1)諱 인흥, 낙하 종회 합보 토의 시에 제출한 증거,

우리 이족은 자성이족으로 기원전 서라벌에 살았다.
상고하건데 초기신라시대는 각부족들의 연맹체 집단의 나라로 서라벌 9部族과 자성족등 기타 部族들이 웅거한 시기로서,
연맹체를 대표하는 부족을 선임, 소위 首長으로 임명한 것이,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에 이르는 신라王號이며,
내물왕시기 이전부터 豪族長들을 이사금, 이리, 님금이라고 호하였다.


나. 우리의 시조 자성이족은 서라벌 분황사인근에서 대대로 발흥한 족으로
당시의 족장이 자성 이사금이며 칭호는 이리, 니사금,님금, 이사군이다
즉 분皇사지 域伐의 이라고 불렀고(三國史記.遺事, 傳記, 域의 이리는 후에 伊벌찬, 伊찬이라고 職名이 변동됨)
그래서 신라는 서라벌을 중심으로, 여러 족의 이사금들이, 다스리는, 부락 연맹체의 집단인데
 집단적인 연맹 왕체제로 국가적인 체제를 갖추니
이가 내물 마립간이다. 내물 마립간은 자성이족의 자성 이사금 등등 화백들의 회의를 거쳐서
옹림된 최초의 왕이다, 이가 김씨계이다.(간-왕)


다.자성李族의 자성 이사금은 이후 내물마림간(간, 한, 서불한의 한, 한국의 한은 오늘날 연맹체의 수장, 즉 왕의 최초칭호이다)
  의 후손들이 신라 왕 추대에 적극 개입하였고, 자성이족은

 내물왕대와 이후 칠포국과 칠체 칠토지역의 가야를 복속하였는다.

이로부터 함안의 동북의 지역의 족장이 된것이다. 분들로 諱 군린 諱 용수이다.

(당시는 칠원으로 부르지 않고 포상8국, 가라, 함안,칠제, 칠토국으로 불렀으며

칠원은 고려태조의 명에 의거 서라벌은 경주가 되고 필포는 칠원현이 된다)


후에 통판공 휘지의 기전에, 우리 광이의 시조가 신라 내사령으로 기록된 것은
자성이족이 지방의 호족장이고(니사금) 내물왕 부터 왕궁에서 왕의 조칙을 담당하고 왕립 사찰을 관리하고
 비서와 같은 부서가 있는 바,

이를 內史라고 했으며(三國史記,정창원 문서, 古代 新羅 전적 제도.이차돈 전기,최치원 전기등에 내사의 관부가 나타남)
내사의 우두머리가 內史令이다, 이차돈의 원래 성은 朴씨이나 벼슬은 內史의 使人으로
진평왕때 왕을 근간에 보조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內史部는 내물왕대부터 있었던 관부로 추정이 가능

(내사부의 하는 일은, 왕의 조칙, 왕 직접 운영하는 국사의 절, 사찰을 관리함)하고
이의 우두머리는 내사령이다, 통일신라시대의 학인, 최치원은 고려 초기에 신라 내사령으로 추증된 바
신라시대에 일종의 관부로 존재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그렀다면 우리 시조의 관직이 내사령으로 기록되고
 이의 내용이 傳聞으로 世宗組 통판 이지의 家乘까지 記錄으로 남아져 있는 것으로
보아  內史令 이자성은 맞다고 할 수가 있다.



라. 대대로 정확한 이름은 알 수가 없지만 휘 군린, 휘 용수가 있었고
 휘 군린, 휘 용수 모두 존칭의 의미인 이름이기에 우리 선조는 족장이 맞다.
그러다가, 우리 자성이족은,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당시 지방을 분점 중이던 자성의 이족들은
 일대에서 대규모로 고려에 대항 봉기하고  함락 된 뒤에도 신라부흥군과 기내와 회안으로 이주하여

경순왕을 따라온 호종 유민과 일대 봉기 세력과 합하여

경순왕이 죽기전까지 부흥을 하였으나 고려의 위무로  결국 망하니. 이것이 이속의 과정이다

이것이 신라 경애왕- 경순왕- 고려왕건- 고려경종- 광종시대의  신라말 고려초의 지방 호걸시대의 풍경이다


 (결국 궁예 견휀 등이 항복하고, 신라부흥을 봉기한 자성이족도 고려에 의해 고려 통합된 것으로,

회안으로 이속이 되니 이른바 문호공 비문의 이속 기록이다. )


마. 당시 우리 자성이족들은 지방 盟主(이사금)의 지위에서, 지방의 향장인 戶長의 지위로 格下 된 것이다,
그래도 우리 자성이족들은 신라 부흥을 외치며 기내에서 항거하다가

당시에 선대묘와 신전을 짓고, 매년 10월에 전 종족이 모여서
선조를 추창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자성 이족의 한을 추억하고 지친을 강호하였으니,
이가 漆原에서 온 자성이족의 八面石碑 祭壇 說話이다, 칠원은 고려왕건이 칠토.가야지역을

평정한 후에 칠원현이라고 칭했다.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기록은, 좌찬성 諱 우생과 기타 광이 둔촌공의 후손 필행과 휴징의 기록,
복암가의 세전기록, 기타 기록에 나타난 기록이다,


 원래 팔면비는 신라의 황복사나 ,분황사지의 國師들의 기념비 석등 팔면비와 같은 것으로,
호국불교적인 신앙의 하나로, 일종의, 제단인 것이다 (초기 원효등 신라 고승들의 기념비및 석등팔면비 연구 참조)
우리 조상들은 단군 시대부터 신전을 세우고, 종족들이 제사를 지냇고, 대부분 신전들은 산의 頂上에 세웠다
초기에는 고인돌의 형태로, 삼각층으로, 사각층으로, 팔면층.(단군사. 환단고기등 전설 화)

고려조에 이르러 호장으로, 지내오다가 중기이후, 무신 정권이 들어서면서, 출사하기 시작하였고,

대표적인 분이, 유명한 先祖 廣陵 三益이고,
이후에 세계되신, 이른바 4대 명휘이상의 고려말의  선조들이다.

우리 자성 칠원이족의 기원과 내사령 이자성에 대한 고증기록으로는
대부분 석탄공, 암탄공, 율정공가에서 보관된 것으로, 조선조 초중기에 휘 휴징, 휘 이이만,복암선생의 가장
등등에 보존 유래 되었다


바.다음은 신라 내사령 자성시조에 유전된 족보기록등의 자료이다
                   (율정공파, 석탄공파 암탄공파 대종회 /기타 근거,제공)


(1). 이이만가의 가승보 갑진초보별보

『參考,李宜晩 선응(善應), 농은(農隱), 정정(靖貞)

1650년(효종 1) `1736년(영조 12) 사간원정언, 충청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한성판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응(善應), 호는 농은(農隱). 충정공 이준경(忠正公 李浚慶)의 5대손이며, 이사수(李士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필행(李必行)이다. 아버지는 이후징(李厚徵)이며, 어머니는 송휘길(宋暉吉)의 딸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 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가 하사되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 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청선고(淸選考)』

     -시기, 하원공의 갑진보를 만들기전에 이이만가에서 내려온 가승을 토대로 광주이씨 둔촌공가
족보, 이를  별보초보라 함,
-당(唐) 자의 후손 중 고인(故人)이 된 승선공(承宣公) 이만(頤晩)이 기록한 가승(家乘)을 들어보니
또한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가 있으니, 결국 사파(四派) 휘한,휘당 석암파가 다 같이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이이만(李頤晩) 公은 숙종 15년 증광시(增廣試) 문과로서
승선(承宣)  즉 승지를 지낸분으로. 父는 이후징(李厚徵)이며 <갑진보 변설13조>의 諱하원(李夏源)의 숙부이다.
아울러 <갑진보>를 간행(刊行)한 북백 휘 이의만(李宜晩)의 형이다.
-즉 조선조 초기 4대파의 가마다 내사령선대로 시작되는
가승을 유래한 것처럼 둔촌공 후손들의 가승(家乘)에도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가 수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정곤수 이명징 가의 광주이씨 선대족보기록


『 연안인(延安人) 이명징(李明徵) 公과 충주인(忠州人) 정곤수(鄭崑壽.청백리) 公은
한음상공과 동시대 같이 국사를 담당한 조신으로 유명한 선비이자 반가로, 이 집에
보관 중인 廣州李氏 선대도에 관한 족보 기록 “한희(漢希)의 윗대에
 자성(自成). 군린(君隣).용수(龍壽)의 三代가 있고. 문(文)에 이르러,
 염주(塩州) 서자번(徐自蕃)의 딸을 배필로 삼았고, 울(蔚)은 강주(江州) 이지효(李之孝)의 딸을
배필로 삼았다.“』는 기록을 제시하고,
 (시록서증, 이명징(李明徵) 公과  정곤수(鄭崑壽.청백리) 公 가 보관 광주이씨 선대도

*이명징(李明徵)은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수광주부윤(守廣州府尹)인 문과 급제자 이회(李禬)다.
정곤수(鄭崑壽)는 본관은 청주(淸州)로,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별시 문과(別試文科) 장원(壯元)이다.
관직은 좌찬성(左贊成)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봉호되었다.
아버지는 대호군 정승문(鄭承門)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형이다.
이명징(李明徵) 집안과 정곤수(鄭崑壽) 집안과 같은 명문가에 존재하는
족보기록에 廣州李氏 관련 기록이 존재


(3) 중종조 박상의 문호공 이점의 신도비명에서의 신라말 후삼국 고려초 조선개국까지 광주이씨의 역사기록


  『중종조의 청백리이자 이조 참판, 눌제 박상의 문호공 이점의 신도비명에,
 우리 광이의 연원을 근설한 신도비 명이 있는 바
廣陵李石灘諱養中玄孫文胡公諱坫。字崇甫。年七十有七。以疾卒。卽帝明易元以嘉靖元年春三月也。越夏五月。卜得日。歸全于利川府治之西陽嶽山坤向原先塋之側。以遺命。遷其貞夫人柳氏之墓。合厝。遵禮文也。克葬之六年。其孤今公州判官宗箕。訪予於客館。拭淚以告曰。先公之卒。凡其所以較德焯行者。莫不粗完。有幽室之誌。以圖陵谷之變遷。有太常之諡。以 019_087a著不沒之實。獨神道刻文有缺。屢俯伏仰請於翰苑大手。則職鉅務穰。力不遑及。敢布心腹。乞詞以顯後。言甚懇。姑許之。南來。公牒一埤。卒卒無須臾之間。炎涼將再易矣。復授使者狀。踔三百餘里。扣且督益勤。烏可以不文固讓乎。謹按東國史。三國之季。豪傑蠭起。各據土地爲君長。號令一方。高麗太祖統合。分屬州府郡縣。吏其人。及本朝改玉。仍其制。其苗裔之以文武出身登將相者。往往而有。於公家世可徵。初有廣吏諱知。鄕貢通籍。九分竹使符。持身廉簡。所莅 019_087b以淸白稱。嘗通判義州也。上國之人。厚行賄賂。潛相和市。通判獨不受。然累在上官。不敢發。後朝廷得其狀。移咨詰之。且云判官李某。却綃十端。其淸節之聞於朝廷如是。故我世宗賜褒。服誅其受賕者。以旌異之。貪夫足以廉矣。然果於恬退。雖富之以韓,魏。自視欿然。泉石逍遙。飯疏食飮水。樂在其中矣。其子寬義積學爲文。待聘英陵朝。初試爲司馬。學問日造。發解十六擧。卒不中第。知其命之不偶。懷抱利器。遯于荒野。遡濂洛關閩之餘波。以探洙泗之淵源。劘格 019_087c性理。擺落詞章之陋。蕭然一室。相對黃卷中聖人。願安承敎者。坌集門下。公卿以逸士交薦。起家爲栗峯道察訪。非其志也。卽辭歸舊隱。成宗十四年。布告國內。搜訪明經行修者。畿使以察訪聞。驛召入對便殿。破達性命之蘊奧。剖析天地日月星辰之度數。纚纚如貫珠。上亹亹不厭。自朝至夕而罷者數日。仍下敎曰。寬義。理學精熟。果副所聞。將欲顯用。自以年老。乞還田里。予嘉其志。賜衣許還。其令所在官。賜米豆。以示予褒奬之意。嗚呼。父子以淸德學術。見重於 019_087d二宗如彼。古今天下有幾人哉。公。察訪之子。通判之孫也。受詩禮於鯉庭。襲淸風於祖考。志存弘毅。學究篤實。餘事文藝。宣陵卽位。別試擧司馬。入學館。儕輩知其大人。遂擢巍科。分屬成均館。例遷至博士。授掌隷院司評。滯案若掃。以選轉兵曹佐郞。秩滿。出佐畿使幕。無疵。改調世子侍講院文學。書筵諷勸。不出文王世子一篇。俄遷兵曹正郞。軍機庶事。皆就其緖。顧念春萱。日迫西山。乞就養。得郡印去。庭闈近割鷄。治暇。往來省問。忠以奉上。孝以事親。公私兩全。苽 019_088a未熟。艱變疊臻。泣血三年。哀禮殫盡。曁服除。敍與司宰監僉正。旋改爲成均館司藝。學生相慶。會諫院闕司諫。選部難其人。奪諸學生而陞置大諫之左。朝議以爲不可師表闕然。學生缺望。於是以司成。再入學。學生復相慶。執經問難於函丈間者。不知其幾。而左酬右答。若決江河。然選法。重在臺諫。不獲已復除執義。卒以劾權貴罷。有命收用。拜司導寺正。時逋逃者。窮竄海島。招納中國邊氓。聚據爲窟。出入洋中。肆行劫掠。蔓延難圖也。奏請天子搜討。制曰可。乃以田霖 爲招討使。副以公以往。人皆危之。公無幾微見於言色。談笑受命。開帆廿日。直擣其穴。不戰而服。盡刷男女若干人以還。燕山主錄其功。特加三資。移拜奉常寺正。明年。超拜弘文館副提學。居無何。入政院。累遷至都承旨。摠統六曹。無招權之謗。擢拜刑曹參判。卽古之小司寇也。貳贊上卿。刑罰得中。未幾。持節嶺南道。觀察七十州。黜陟幽明。遞爲漢城府左尹。五部內。無冤訟。逮燕山主大失君道。禍及搢紳。誅流相續。公亦編管扶安縣。武宗皇帝元年丙寅秋。今上奉 019_088c皇帝詔。入承成宗之統。加恩區內。竄配者悉敍召還。拜公爲大司成。遷戶曹參判。充謝恩副使。入覲天子。東還賞其勞。賜資憲階。超拜判漢城府尹。燕山時枉屈者。繄公是賴。得以自直。愚夫婦無不以手加顙稱賀。乙亥。以七十致仕。不得謝。待以西樞閒職。蓋優老也。公弘中和表。言遜氣溫。內遇親戚。外待交遊。終始一心。未嘗變節。位非不高。而不爲集翕傾動。心非不廉。而亦不爲崖異斬絶。俸祿入門。分其半以周歉。衣裳在笥。出其餘以濟寒。過逢必具酒衣。盡其歡。 019_088d疾病必買藥餌。活其命。其治官守身。又極謹愼。不掛過差。生無招毀。歿無遺怨。豈所謂豈弟君子耶。臨絶。且以淸勤誠信四字。勉其子宗箕。爲家傳靑氈。非有得於平生。能如是乎。柳碩人。郡守孟沂之女。高麗寶文閣提學克愿之後也。舅姑如事父母。夫子如奉賓客。閨梱肅穆。親戚退無一言。不幸早世。有一女一男。女監察姜世矩妻。男卽判官宗箕。司果柳承孫女壻也。公不再聘。側室之出。女一。歸宗室瀛山監信。男一幼。銘曰。
019_089a義州拒綃。淸徹天王。見奬英陵。有煥褒章。栗峯談理。成廟嘉歎。寵貺便蕃。歸來考槃。父子種善。秀發三葉。奕奕京兆。纘戎德業。內植忠厚。外施寬假。納汚海量。無可不可。至執國論。援理證明。操履之篤。學問之精。敭歷卿相。四十六年。光風瀏瀏。霽月娟娟。鮐背黃耇。神仙中人。自少及老。眉不一顰。屬纊一言。丁寧四字。盍入貞珉。遐詔千祀。
 嘉靖七年己丑三月。朴某。撰。)』

『한성판윤 문호공 휘 점(諱 坫) 신도비명 한글 전문
광릉 이문호공 (廣陵 李文胡公,
 휘점(諱坫)의 자(字)는 숭보(崇報)니 나이 칠십칠(七十七)에 병(炳)으로 돌아가니 가정원년(嘉靖元年) 춘삼월(春三月)이라. 여름 오월(五月)에 이천부(利川府) 서쪽 양악곤향원(陽岳坤向原) 선영(先塋)곁에 장사(葬事)하고 유명(遺命)으로 그 정부인(貞夫人) 류씨(柳氏)의 묘(墓)를 함평(含窆)하니 예문(禮文)을 따른 것이다. 장후(葬後) 육년(六年)만에 그 아들 공주판관(公州判官) 종기(宗箕)가 나를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선공(先公)께서 돌아가심에 그 덕행(德行)을 나타내는 것을 대략 갖추어서 묘지명(墓誌銘)이 있어 능곡(陵谷)의 변천(變遷)을 예비(豫備)하고 태상(太常)의 시호(諡號)가 있어 불몰(不沒)의 실적을 나타내었으나 다만 신도미명(神道碑銘)이 없으므로 여러 번 한원(翰苑)의 대가(大家)들에게 청(請)하였으나 지금까지 듯을 이루지 못하고 감(敢)히 마음으로 통(通)하는 분의 뒤를 받아 나타내 고저 한다.』하고 말이 심(甚)히 간절하거늘 허락(許諾)하였으나 남(南)쪽으로 오게 됨에 공문서(公文書)가 한결같이 밀려서 잠시 여가도 없이 두 해를 넘긴지라 다시 사람을 보내 삼백여리(三百餘里)를 와서 재촉하니 어찌 글 못한다고서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동국사(東國史)를 살펴보건대 삼국말(三國末)에 호걸(豪傑)들이 각각 땅을 웅거하여 군장(君長)이 되어 한 지방(地方)을 호령(號令)하다가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이를 통합(統合)함에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나누어서 그 사람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조(李朝)에서 혁명(革命)하여 그 제도에 의(依)하니 그 후예(後裔)들이 문무(文武)로서 출신(出身)하여 장상(將相)에 오른 사람이 왕왕(往往)이 있으니 공(公)의 집이 가히 증거가 된다. 처음에 광이(廣李) 휘(諱) 지(知)가 있었는데 향공(鄕貢:進仕)로 통적(通籍)하여 구분죽사부(九分竹使符)로 몸가짐을 염간(廉簡)히 하고 임지(任地)로 가매 청백(淸白)하다고 일컬었다. 의주판관(義州判官)이 됨에 중국(中國)사람이 뇌물을 두터이 하여 장사를 밀행(密行)하려 하였으나 공(公)은 홀로 받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上官)에 누(累)가 될까 하여 감(敢)히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조정(朝廷)에서 그 상황(狀況)을 알고 조사한 결과 판관 이모(李某)는 비단 열 필(匹)을 물리쳤다하니 그 청절(淸節)이 조정(朝廷)에 드러남이 이 같은 고(故)로 세종(世宗)께서 포창(襃彰)하여 의복(衣服)을 하사(下賜)하고 그 뇌물을 받은 자들은 죄(罪)주고 공(公)에 대해서는 정려(旌閭)로써 특별히 표(表)하니 탐부(貪夫)가 족(足)히 청렴(淸廉)해 지더라. 그러나 공(公)은 물러가기에 과단성이 있어 비록 한위(韓魏)의 부(富)를 당(當)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놀랍지 않게 여기고 수석(水石)에 노닐고 나물밥을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었다. 그 아들 관의(寬義)는 학(學)을 쌓고 문장(文章)을 해서 영릉조(英陵朝)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학문(學問)이 날로 나아갔으니 마침내 급제(及第)하지 못함에 때를 만나지 못함을 알고 좋은 그릇을 품고 황야(荒野)에 은거하여 정주(程朱)의 학문(學問)을 닦고 공맹(孔孟)의 연원(淵源)을 탐구(探究)하여 성리(性理)의 원리를 연마하고 사장(詞章)의 누습(陋習)을 벗어나 숙연(肅然)한 일실(一室)에서 책 가운데 성인(聖人)을 날로 대하니 배우고저 하는 자(者)가 문하(門下)에 모여들었고 공경(公卿)들은 유일(遺逸)로서 천거(薦擧)하여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삼았으나 그 뜻이 아니므로 즉시 사양하고 옛 집으로 돌아왔다. 성종(成宗) 십사년(十四年)에 국내(國內)에 널리 알려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行實)이 높은 자(者)를 찾음에 경기감사(京畿監司)가 공으로써 들리니 역마(驛馬)로 불러서 편전(便殿)에 입대(入對)케 하니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강명(講明)하고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의 도수(度數)를 분석(分析)하여 구슬을 꿴 듯이 하니 상(上)이 듣기를 즐겨하여 아침부터 저녁가지 이른지가 수일(數日)이 되었다. 인하여 상(上)이 하교왈(下交曰) 관의(寬義)는 이학(理學)이 정숙(精熟)하다더니 과연 듣는 바와 같도다 하고 장차 현용(顯用)하고 저 하였으나 스스로 늙었다 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옷을 주어 돌아감을 허락(許諾)하고 그 고을 원으로 하여금 미두(米豆)를 주어서 왕(王)의 포장(襃獎)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으니 아! 부자(父子)가 청덕학술(淸德學術)로 두 조정(朝廷)에 중(重)히 보임이 이 같으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몇 사람이 되겠는가? 공(公)은 찰방(察訪)의 자(子)요 통판(通判)의 손(孫)이라. 리(鯉): 孔子의 子 정(庭)의 시례(詩禮)를 듣고 청풍(淸風)은 조부(祖父)로 부터 이어받아 뜻은 넓고 씩씩한데 두고 학(學)은 독실(篤實)히 연구(硏究)하고 문예(文藝)는 여사(餘事)로 엮었다. 선릉이 즉위(卽位)함에 별시 사마시(別試 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학관(學館)에 들어감에 동료들이 큰 인물(人物)로 알았다. 이어 대과(大科)에 올라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어 예(例)의 박사(博士)로 옮기고 장례원(掌豫院)의 사평(司評)이 되어 체류(滯留)된 안건(案件)을 모두 처리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전임되었다가 경기감사(京畿監史)의 보좌관(輔佐官)으로 나가 막내(幕內)에 잘못됨이 없었고 세자시강(世子侍講)으로 옮겨 서연(書筵)에서 풍자(諷刺)해서 권(勸)함이 문왕세자(文王世子) 일편(一篇)에 벗어나지 않았고 조금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서 군기서(軍器庶)로 옮겨서 매듭짓고 늙으신 부모(父母)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군(郡)으로부터 집 가까운 곳으로 가서 다스리는 여가(餘暇)에 집에 왕래(往來)하며 부모(父母)를 성문(省問)하고 충성(忠誠)으로 임금을 받들고 효도(孝道)로 어버이를 섬겨 공(公)과 사(私)가 다 온전함을 얻었도다. 임기(任期)가 차기 전에 부모상(父母喪)을 연거푸 당하여 삼년(三年)동안 애례(哀禮)를 다하고 다시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이 되고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옮기니 학생(學生)들이 서로 경사(慶事)롭게 생각하였고 조금 있다 사간원(司諫院)에 사간(司諫)이 결원(缺員)되어 좌사간(左司諫)으로 승치(陞致)함에 조의(朝議)가 사석(師席)이 궐(闕)함이 불가(不可)하다 하여 다시 사성(司成)으로 돌아가게 하니 학생(學生)들이 다시 좋아하여 책을 잡고 어려움을 묻는 자(者)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는데 좌수우답(左酬右答)하기를 강하(江河)를 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의(執義)로 제수(除授) 되어 마침내 권귀(權貴)를 탄핵(彈劾)하다가 파직(罷職)되고 후에 다시 사도사정(司導寺正)을 배(拜)하니 때에 죄(罪)를 짓고 도망하는 무리가 해도(海島)에 숨어 살며 중국 변방 백성을 불러들여 굴을 만들어 은거하며 바다 가운데를 출입(出入)하며 급탈행위를 자행함에 이를 제압하기가 어려운지라 명(明)나라에 상주(上奏)하여 토벌키를 청(請)하니 옳다 하고 전림(田霖)으로 초례사(招禮使)를 삼고 공(公)으로 부사(副使)를 삼아서 가게 함에 사람들이 다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公)은 조금도 언색(言色)에 나타내지 아니하고 묻는 말로 명(命)을 받고 배를 타고 이십일(二十日)만에 그 굴을 두드려서 싸우지 않고 항복(降服)을 받아 남녀(男女) 약간인(若干人)을 다 돌려보냈다. 연산주(燕山主)가 그 공(功)을 록(錄)하여 삼품계자(三品階資)를 내리고 옮겨서 봉상사정(奉常寺正)에 배(拜)하였다. 다음 해에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을 배(拜)하고 조금 후 정원(政院)에 들어가 여러 번 옮겨 도승지가 되고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형벌(刑罰)을 밝게 하고 얼마 후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로 나가 잘 다스렸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옮겨 오부내(五部內)에 원통한 송사(訟事)가 없었다. 연산주(燕山主)가 군도(君道)를 크게 잃어버림에 화(禍)가 진신(縉紳)들에게 미쳐 죽이고 귀양 보냄이 서로 이어짐에 공(公)도 또한 부안현(扶安縣)으로 귀양 갔었다.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함에 공(公)을 대사성(大司成)으로 배(拜)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옮겨서 부사(副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오니 그 노고(老苦)를 상(賞)하여 자헌(資憲)으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배(拜)하였다. 연산주(燕山主)때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에 대해 공(公)이 힘써 봐준 것이 많으므로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을해(乙亥)에 나이 칠십(七十)으로 치사(致仕)함에 서추한직(西樞閑職)을 내리니 대개 늙음을 우대(優待)함이었다. 공(公)이 속은 넓고 겉은 화(和)하고 말은 온순하고 기운은 온화하고 안으로 친척(親戚)을 대우(待遇)하고 밖으로 교유(交遊)할 때 종시 일심(一心)으로 하고 일찍 변절(變節)이 없었고 위(位)가 높지 않음이 아니었지만은 함부로 경동하지 않으며 마음이 청렴(淸廉)치 않음이 아니었지만 지나치게 냉정(冷情)하지 않았으며 봉록(俸祿)이 문에 들어오면 그 반절(半切)을 나눠 급한 사람을 돌봐주고 옷이 상자에 있으면 그 남는 것을 추운 사람에게 주고 만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주식(酒食)을 갖추어 그 즐거움을 다하고 병(炳)이 있으면 반드시 약(藥)을 사서 그 명(命)을 살려 주고 벼슬을 다스리고 몸을 지킴에 근신함을 다하여 조그마한 과차(過差)도 없었으므로 살아서 나무라는 사람이 없고 죽어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 이른바 깨끗한 군자(君子)이었다. 죽음에 다 달아 청근성신(淸勤誠信) 네 글자로 그 아들 종기(宗箕)에게 이르기를 가전(家傳) 유훈을 삼으라 하였으니 평일(平日)에 얻은 것이 없고서야 어찌 이 같이 하였겠는가? 유석인(柳碩人)은 군수(郡守) 맹기(孟沂)의 여(女)이니 고려보문각대제학 (高麗寶文閣大提學) 극서(克恕) 후손(後孫)이다. 구고(舅姑)를 부모(父母)와 같이 섬기고 부군(夫君)을 빈객(賓客)같이 받들므로 집안이 화목하고 친척이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불행이 조사(早死)하였고 일여일남(一女一男)이 있으니 여(女)는 감찰(監察) 강세구(姜世矩)에게 가고 남(男)은 판관(判官) 종기(宗箕)이니 사과(司果) 류승손(柳承孫)의 여서(女婿)이다. 공(公)이 재취(再娶)를 아니하고 측실(側室)의 출생 일녀(一女)가 있으니 종실영산감. 신(宗室瀛山監. 信)에게 가다. 남일(男一)은 어리다. 명(銘)하여 왈(曰) 의주(義州)에서 비단 물리쳐 청백(淸白)함이 천왕(天王)에 미쳤고 세종(世宗)의 총애(寵愛)있어 빛나는 포장(襃章)내렸네. 율봉(栗峰)이 이치(理致) 논(論)함에 성종(成宗)께서 가탄(嘉歎)하고 총애(寵愛)해서 편양(便養)하게 하였으나 귀래(歸來)하여 산수(山水)에 놀았네. 부자(父子)가 선(善)을 닦아 삼엽(三葉)이 빼어나고 한성판윤(漢城判尹) 배명(拜命)하여 혁혁한 덕업(德業)이뤘네. 안으로 충후(忠厚)하고 밖으로 너그럽고 바다 같은 아량(雅量)으로 모든 것을 포용(抱容)했네. 국론(國論)을 잡을 때는 원리(原理)로 증명(證明)하고 조이(操履)가 돈독하고 학문(學問)이 정숙(精熟)하였네 경상(卿相)을 역임(歷任)한지 사십육(四十六)이라. 빛나는 바람같이 맑게 게인 달같이 밝고 밝아 대구고령(大耈高齡)으로 신선중(神仙中)의 한 사람이라. 젊어서 늙을 때가지 눈 찌푸림 없었고 운명할 때 한 말씀은 사자(四字) 정령하네 모든 사적(事績) 돌에 새겨 오는 천년 알리노라. 
訥齊 朴祥撰
成均生員 安士後書
宗孫 世桓 謹竪
 이를 제시하였다
박상의 문호공 신도비명은 후세 유인들이 찬사한 명문으로, 여기에 우리 광이의 연원이  기록된 것으로
즉『 삼가 동국사(東國史)를 살펴보건대 삼국말(三國末)에 호걸(豪傑)들이 각각 땅을 웅거하여 군장(君長)이 되어 한 지방(地方)을 호령(號令)하다가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이를 통합(統合)함에 주부군현(州府郡縣)을 나누어서 그 사람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조(李朝)에서 혁명(革命)하여 그 제도에 의(依)하니 그 후예(後裔)들이 문무(文武)로서 출신(出身)하여 장상(將相)에 오른 사람이 왕왕(往往)이 있으니 공(公)의 집이 가히 증거가 된다.,謹按東國史。三國之季。豪傑蠭起。各據土地爲君長。號令一方。高麗太祖統合。分屬州府郡縣。吏其人。及本朝改玉。仍其制。其苗裔之以文武出身登將相者。往往而有。於公家世可徵。』 『우리 동국사는 신라 부흥을 외치는 각주현 호족들이 있었고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항거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고려태조에 의해 주군현에 통합(복속)되었는데 조선에 이르러
복흥하고 출사하여 문무장상이 배출되었다


(4) 이가 신라백 후예 廣李이자. 즉, 칠원에서 회안으로(각주현) 복속한 것으로 고려조에 항거한 기록과,
그리고 여말과 본조에 이르러 주의 씨족』으로서 大同의 優家로


이어져온 광이의 來歷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는 근거는,  인문지리지인 ≪세종실록≫ 지리지의 姓氏條로,
『성씨 그 자체가 혈연과 지연의 이중 의미를 지녔기 때문에, 성씨체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 초였다.
초기 신라와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지방군주가 호장 호걸로 지역 군주이었고 (이들중 한 무리이었던 우리 자성이족은
後三國과 고려 開國이라는 격심한 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의 변동이 있게된 것이다, 즉, 태조 왕건(王建)과 고려 왕 들이
 반도를 재통일한 다음, 당대 실질적인 지배세력(왕건에 자원복속하거나 투항한 지방군주)으로
등장한 새로운 호족을, 각 출신지역별로 정치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地域적·身分的으로 주군현의 새로운 제의(제도)로  임명하고, 再編成된 것이다(그래서 저항한 부족이나
호적들은 강계,이속시킨것이다  조선시대도  반역한 향리는 부로 있다가 갑자기 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래서
 後三國시대까지  地方君主인 자성 이족은, 고려 복속을 拒否하고 ,항거하다  고려에 함락된 지라,

이사금 자성이족은
 주부군현의 리(호장, 향임, 당임)로 이속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 이족의 신분 변천의 역사이다
그러다가 고려中期에 이르러서야
무신정권과 지방 호족들의 발흥으,로 왕중심의  中央集權體制의 약화되고, 그러니,
 우리 이족은 다시 회안일대의  호장 등으로 이어 오다가

일부 이족은  출사하기도 하여여, 문무 高관직에 오르기도한 것이다. 이 광이 자성이족은,
이제, 조선의 혁명에 의거, 조선의 율법에 의함으로, 원래되로 환복하였으니
소위 선초의  통판공, 문호공, 3손의 아들 8극과 두신, 우생공 율정공이 아닌가)』,
이것이 박상의 문호공 비문의 해석인 것이다
 (5)박상의 廣李歷史論은 김부식의 三國史記와  이후의 高麗史의 내용과 전부 合一 一致하는 사관으로
 이 史實은 당시 『박상과 사림과 반가등  중종조에 널이 알려진 우리 廣이의 來歷이다,
 어찌 諺傳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하고 율정 석암탄 후들은 동조근원 통일을 주장하고, 이른 것인데
박상은 중종조 이조판서 청백리로 녹선된 人物로, 우리 동고 상공보다 몇대  以前의 분인 것이다
한음이 보았다는 동고相公의 印譜보다. 이미 세종 중종조에 이르러 둔촌공파와 울정공파와 석암탄공파에서는
가승보가 내려져 있다는 證據이고, 廣李가 新羅시대 內史令공의 後孫이라는 것이, 一般化된 視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석탄은 누구인가., 문호공 이점은 누구인가,  눌제는 문호공이 석탄의 현손으로 하고  율정공과 문호공의 이리를 서술하였다
율정은 누구인가.동방에는 性理學이 있고, 성리학의 이기와 일원의 始作은, 율정으로부터 始作한다라고 했으며
死後,김종직 정여창 김일손 이이 이황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사림들의 學論의 의표가 된 선초의 학자가 율정이다,
율정은 시서와 천문 역서 지리에 통달한 사람으로, 당시의 성종까지
이의 머리를 빌릴 정도의 존경받은 사람이고, 後學들(조광조, 이이, 이황 )은 이분을 孔丘에 빗대어  "李子"라 부른 것이다.
이분의 家에는 世傳草譜가 있었고 율정은 천문지리 역사에 정통한 당대의 학자이셨다.
율정공의 이후로 7, 8대 후손들의 벼슬은 변변치 않았는데 이천의 율정공가에 이르러서는
저 李가家 율정공의 후손들이다 할 정도로 당대의 世高 선비들이 찾아와 人事한 곳이 율정공 가이다.
『기록서증.廣陵李石灘諱養中玄孫文胡公諱坫신도비명)


(6) 석암탄공의 손인  세종조 증좌찬성, 고려 사온주부공 휘 우생의 묘지명 기록,


  1) 『암탄공 이양중 공의 아들  左贊成 휘 우생(遇生) 公의 <묘지명(墓誌銘)>』에 광주이씨의
상대기록에 대한 계보의 기록을 발견하였었고,

 

(휘 우생은 고려 사온주부로 증 좌찬성이다. 아버지는 고려 수절신 형조참의 이양중이다

아들이 수철과 석철이고 수철은 1411-1473, 세종조 원종공신, 목사-평안절도사를 지냈다

증 좌찬성 봉 한원군 부인은  양성 이씨 부 관찰사 맹상이다

손자가 손이며, 세종조 문과 좌찬성   정국 공신이다 시호는 문간공이다

총명출천 찰기여신 국가전물 산천도리 섬실구도 일세함칭 기구정덕

신도비명은 용제 이행,  부인은 경주, 부장 계번이고 ,익제 문충공의 6세손이다)


(7) 북백 휘 이의만공가의 기록, 시조 이자성 내사령공 기록,
   칠원 자성이족의 기내(광주 여주 철원일대) 설단 팔면비석의 제단 기록


(8) 세종조 통판 휘 이지와 율정공가의 세전초보(가장 오래된 광이족보)


.통판공 지와 율정공의 세전 광릉이씨보
. 휘 인흥은 『8대조 율정공(세종 성종조 온 사림이 추앙한 李子) 생존시 부터 내려운 가승보인

『율정(栗亭)공가 <세전초보(世傳草譜)>를 직접 보여주면서 세첩  첫머리
『신라 내물왕 조의 내사령인 이자성(李自成)은 처음 본관이
칠원(漆原)이다. 五世에 와서 손자 한희(漢希)가 있고 한희에게 아들 방린(防麟)이
있으며, 방린의 아래는 자자자자(子子子子)로, 아들 子 자(字) 네 자[四字]가 쓰여
있고, 그 아래 익비(益庇), 익준(益俊), 익강(益康)의 삼형제가 있다.
익비의 아들은 문(文)이요, 문(文)의 아들은, 름(菻)과 울(蔚) 형제며, 울(蔚)의 아들은
한(漢)과 당(唐) 형제니 당(唐)은 곧 둔촌(遁村)인 원령(元齡)의 아버지이며
한(漢은  생원(生員)인 녹생(祿生)공의 아버지이다."』 라는  족보 두서문의 내용이다 즉,
둔촌에서 부터 위의 익(益) 자까지는 四代에 지나지 아니하고 대수가 명확한 것인 바
적실(的實)한 사실을 근거로  우리 광이의  상대를 통일하고 4파의  합보를 주장하였다, 즉,
문호공의 비문, 우생공의 묘지명, 정곤수 이명징가의 광릉 이씨 선대도, 율정 가승세전보를 제시하며
마땅히 족보에 두서하고 동수하여야 할 것이다 라 주장한 것이다 율정(栗亭)은 성종조의 성리학자로 성종 임금이
율정(栗亭)의 학문이 높은 것을 알고,  선정전(宣政殿)에 재상들을 모이게 하였다, 즉,


『  『參考,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진산군(晉山君) 강희맹(姜希孟)과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우찬성(右贊成) 허종(許琮),·좌참찬(左參贊) 이승소(李承召)·,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파(李坡),·공조 판서(工曹判書) 손순효,(孫舜孝),
동지사(同知事) 이극기(李克基)·,
동지 유진(兪鎭), 대사성(大司成) 노자형(盧自亨)과 승지(承旨)등 조정의 大學유들을 전부 입시(入侍)케 하고,
이관의(李寬義)를 불러 《대학(大學)》·《중용(中庸)》을 임금과 신료들에게 강(講)론하게 하였다.
또 천지의 도수(度數), 일월 성신(日月星辰), 세차(歲差), 역수(曆數)의 일변을 묻자,
율정(栗亭)공이 물음에 따라서 대답하였다 (중종실록기록)
이처럼,율정(栗亭)관의는 젊어서 시·서(詩書)에 통달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정밀하여
한때의 선비가 함께 추앙하는 바가 되었는데, 이때의 나이 75세였다.

성종은 율정(栗亭)(李寬義)에게 유의(횼衣) 두 벌을 하사하고,“그대가 지금 벼슬할 수 있겠는가?”하며
관직 제수 의향을 물으니, 관의가 말하기를,“신이 이제 늙고 병들어서 벼슬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본도 관찰사(本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여 미두(米豆)를 내려서 권장하게 하였다.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기를,“내가 듣건대,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가 이학(理學)을 연구하여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불러서 시험해 물었더니,
논의가 정밀하고 능숙하여 과연 소문과 같으므로 장차 드러나게 기용하여
그 뜻을 위로하고자 하였으나, 관의가 스스로 나이가 많아 일을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서 여년(餘年)을 마치고자 하므로, 내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의복을 하사하고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제 흉년으로 생활이 어려울 것이니, 그가 살고 있는 이천(利川) 관청으로
 하여금 쌀과 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여 나의 포장(褒奬)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율정(栗亭)에게는 생전과 사후에 따르는 후학이 많았다, 제자로 정여창이 있는데
성종 14년(1483)에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나갔다 그때 어전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의한 스승 이관의를 만나게 되어 제자로 자처하고,

「율정(栗亭)이관의 선생의 운을 따르다」를 시구를 바쳤다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공부는 당대 으뜸이시지만[ 學 究 天 人 冠 一 時]
거친 마을에 지내시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而 居 陋 巷 不 求 知]
성군께서 특별히 부르시어 다스리는 도리를 물으시고 [聖 君 特 召 問 治 道]
이내 산림으로 돌아가려는 뜻을 받아주셨네[ 因 許 山 林 意 所 之]했다』......... (이상 일두 정여창 문집)
정여창은 첫스승을 율정(栗亭)으로 ,다음은 김종직을 따랐는데  언제나 시원은 율정이었다
율정(栗亭)공을 따르는 후학들이, 대부분 김종직의 사림들로, 후에 김일손 김굉필,이황 이율곡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성리학 대보를 잇게한 것이다 )


(9) 둔촌공 후손가에서 보존 가승된 가장 초보

  가.한음이 보았다는  집안내의 언전과 잡기를 말함

  나. 또한 당시 둔촌공가의 일부도 내사령공 이후의 상대선대를 선계한 가승보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 내사령공 추존의 문제는, 『1700년 갑진 편수당시에 가장 극렬한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일부 후손들도 찬성한 것이다, 이런 예로 복암가장초보가 있었다


그래서 둔촌공 일부의 후손들과 율석의 휘 인흥과 휘 홍은 동수 간하고,

『율정 후손 휘 인흥과 휘 명련과 석탄공 후손 휘 홍은,  당시 낙하 종가에 모인 경향의 종친들
에게, 간하기를 “『 이번에 간하고자하는  우리 광이 동성보(姓譜)를 상중하 세권으로 나누어서,
매 권 머리에 내사령을 본원 비조(本源鼻祖)라 두서한 뒤, 중절(中絶)된 곳에는 중절이라 쓰고, 이어진 곳에는, 차례 차례
휘(諱)를 이어 써서, 각 파가 문호(門戶)를 일으켜 세운 곳에, 이르러서는 중시조
(中始祖)를 삼는다면(둔촌공파는 둔촌으로 시조를 삼고,
율정공과 석암탄공 십운공등의 파조로 한다)
파는 파의 조로 시조를 삼고, 또한 각자가 이미 추존할  조상이 있으니,
이와 같이 수보(修譜)한다면, 위로는, 본원의 할아버지(내사령공)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목종(睦宗)의 도리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강정을 하니,


『낙하에 모인 종친들의 중론(衆論)이 찬동』하고,그렇다면, 위와 같이,
『광이 합보로 "강정(講定)하자는 뜻"을 모으고 둔촌공파의 교리(校理) 승원(承源) 公도 이뜻에 찬동하여,
 세 권의 족보로 합보하자』고 하였었다.


(10) 염현의 기내위치사실(회안 광주 일대)과 지명의 정확성


(11) 염주서씨 서자번과  강주이씨 이지효는  광이의 사돈가라는 사실  


     시조 이자성의 기록(내외가 8조고도의 우리나라 족보관습, 우리나라 족보는 맨처음 내와가

     8조고 또는 외가까지 기록하는 것이 통례 였슴
    -그러므로 광이의 사돈가인 이명징 정곤수가의 광주이씨 선대기록 중의

    
《鹽州徐氏(염주서씨)(延安別號.》

 오늘의 이천서씨이다, 이천의 분파이다,
고려때에 始祖(시조)는 自蕃(자번,正朝戶長)으로 전해진다. 이는 이천서씨이다,  
서견은 율정의 고모부이고  둔촌의 친구이며, 두문동 72현이다
《이 후손이, 고려말 유명한 학자 서견이다 서씨(徐氏)의 원류는  3부류로 나눈다,
이천(利川)은 아간공(阿干公)을, 부여(扶餘)는 온조왕(溫祚王)을,  달성(達成)은
소윤공(少尹公)을 선조로 삼았다.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기자의 40세손 준(準)이
난을 피해 이천 서하성(徐河城)에서 살았으므로 자손이 그 지명을 취해 성을 서씨(徐氏)라
했으니 이것이 노담(老聃)이 성을 얻은 것과 같고 가장 오래된 일이다.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이 난을 피해

남으로 와서 부여성(扶餘城)에 도읍을 정했다. 그의 30세 의자왕에 이르러 신라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 그 뒤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에서는 부여융의 여(餘)란 글자를 고쳐 서(徐)라는 성을 주었으니

 이것이 원백(袁伯)이 성을 전한 것과 같고 가장 근래의 일이다. 달성 서씨(達成 徐氏)의
 선조는 고려 말에 일어났다.

광이의 족보에 나타난 염주 서씨는 무엇인가, 

(이천의 유래를 상고하면, 원래 기외에세  살았는데 효양산의 서목이 왕건을
이천에서 도와주어 이천을 세거지로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통일신라 말 서신일(徐神逸)이 교외에 살 때 사슴이

집으로 들어오자 화살을 뽑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하며

“그 사슴은 바로 내 아들인데 그대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다.”라고 말하였다. 서신일이 나이 80세에 서필(徐弼)을 낳았고,
서필, 서희(徐熙), 서눌(徐訥) 3대가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내사령(內史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배향공신이 되었다.[1] 고려 말기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이천부(利川府)는 고구려 때의 읍호(邑號)이며 멸오(滅烏) 또는 황무(荒武)라고도 한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켜서 군주부(軍主簿)를 두었으며
 경덕왕 때 한천(漢川)이라고 고쳤다. 그 뒤 935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 고을 사람 서목(徐穆)이 태조를 인도해 복하(福河)의큰 물을 이롭게 건넜다하여 이천(利川)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로되 태조가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케 하여 역사(役事)를 할 때에 점을 쳐서 이로움을 얻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어 내렸다고도 한다. 염주는 고구려 때는 동음홀(冬音忽),
신라 때는 해고군(海皐郡)이었는데,

고려 전기에 염주였다 주군현의 체제에서 개성을 포함하는 큰곳이다 1217년(고종 4)영응현(永膺縣)으로 바꾸었다.이 지역은 예성강(禮成江)을 사이에  두고 개성과 마주보는 지역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던 곳이었다.

 931년(경순왕 5) 견훤(甄萱)이 부하 일길(一吉)에게 수군을 보내어 예성강에 들어가 3일간 머무르며 고려의 백주(白州)·염주·

진주(眞州)의 배 100여척을 불사르게 하였다. 또한, 몽고군이 이곳에 오래 주둔하였고, 홍건적의 난 때는 격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염주의 지명유래는 성(城) 또는 평야 지역에 우뚝 솟은 산이라는 데에서 나왔다. )


에서 보듯이  《염주서씨는, 오늘날의 이천徐씨로.》 서신일의 分派 一族이며, 염주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황해도의 연안 경기인근을 말한다, 고려조에 이르러  대부분 이천에 살았고, 先代 傳說에 이천강의 유래가 있어서 이천서씨로 한다.

(조선 세종시에 이천서씨) 여기서 우리가 요찰할 것이, 新羅-後三國, 高麗, 朝鮮에 이르는 貫鄕의 變遷, 즉 정향 이속에 變遷에서 항상 上古族譜史를 분석하여야 한다.

高麗시에 서신일 후손등은 全部 신라말 고려 왕건의 건국에  일조하여, 고려의 태후에 봉한 직위를 지냈다,

그래서 서희 등을 알수가 있다, 대부분 염주 일대에 살았다. 염주는 당시에 연안, 開城, 黃海, 京畿 北이고

서신일 등 유력 後先들은 이천에 世居한 것이다. 그런데 고려조가 망한 뒤, 조선이 개국된 뒤에, 이천은 그대로 새로운 제도에 의하여도 서씨의 貫鄕(세종실록지리지)이 되었으나 ,조선 개국을 반대한 자들은

스스로 염주를 시원으로 한 것이다, 서자번은 고려말경(?.고증이 필요함)의 사람인데 그래서 염주서씨의 시조로 칭하고 있으나 ,

기실 이천인이다. 염주는 등급이 格下되어 염현이 되고, 이 염현은, 이천부 또는 광주일대, 또는 예성강의 일대 또는

황해안의 지명으로 추측이 된다, 조선 개국에 반대한 두문동 72현의 율정공의 고무부 서견은 利川人이나 기실 염주인이다.


..보존된 《통판공 諱 이지의 기록과 율정의 세전초보, 諱 인흥의 을사보 내용

그리고 諱 우생공의 묘지석, 정곤수 이명징 가의 광이 선대도, 諱 휴징과 필행의 선세사적, 문호공 비문》등은

三國時代와 後三國시대, 高麗초기, 高麗말, 朝鮮초기의 氏族集團의 社會生活史와

신앙, 당시의 지방세력을 연구하는 자료로 고려 시대와 신라 시대부터 시조를 하고 내려온 동국 만성들의

고전 기록과 함께, 우리나라 원삼국등, 고대사회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신라 金의 후손 인자라 신라 위주로 썼고, 그래서 사기의 내용 중에 틀린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史家에서는 오히려 三國유사. 고대부터 姓氏를 이룬 성씨보를 많이 참고한다.

그런 의미에서, 율정가의 上古部分은 중요한 史料이다.》


(12) 복암가 소장의 가장초보기록


(13) 승지공의 선대 묘지석 기록, 패천동 선묘에서 발견한

      묘지석 기록에는 ""한희로 부터 생원공에 이르기까지 신, 한, 방귀의 관직과

      가문의 계통을 기록한 묘지석,


(14) 諱휴징 휘 필행의 先世 史蹟 기록(광주이씨 대종회에서 1970년 편간, 광이세적으로 통합)

--함음상공이 경술보를 찬할때 둔촌공가에 내려온 언전과 기록들(호송산 전설외 15가지)

--우리 광이의 내력은,신라 성백으로 내려오다가 경순왕의 고려 항복에 동의하지 않고,

    절의를 높이고 항거하니

    고려태조가 성을 함락 시키고 지위를 강계하여 회안으로 강계 이속하였다(문호공 비문 정향이속과 일치)

 -기타 광주유수와 생원공 이야기, 호송산 전설, 석탄공일화, 고덕동전설. 둔굴.국청사우물.최사간, 광쥬유수와 인화이씨,

   생원공 휘 이당의 조입정언설, 오자구등과 전설. 인화이씨묘발견기.연화기. 둔촌의 시문.



(15) 칠원이족의 畿內 이속 후의 八面석비등 祭壇설단, 祭祀기록과 선조들의 風俗

      (후삼국 고려초기의 우리민족의 풍속과 일치)



(16) 율정가 세전초보의 史料的 가치, 대부분 학자들 성씨족보학 상으로 가치인정


    -삼국유사가 正史인  삼국사기보다 당시의 時代相을 잘보여준 사료인 것과 같이

    -율정공가의 유전된 사실의 기록 또한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통설

      특히 족보등의 상고 사실은 전기에 의한것이 각문파의 통설임.


(15) 신라 內史令의 이자성과 內史令 기록, 보서연구가및 상고사 성씨학자들  대부분 가치인정

     -상고시대의 신라 성읍국가와 24개 연맹의 구성

     -이소지왕의 명문발견

    -신라 초기 사회연구

     -內史令의 관직은 내물왕대부터 진평왕시까지 內史라는 官廳이 있었다, 이차돈의 일대기나  신라고문에

       관한 사료등에 왕을 근접 조칙을 행하고 국사를 관리하는 부서이다

      -니사금의 전어이다라는 설이 있다. 신라초기 지방호족장의 칭호가 이사금인데

         이가금 이사군이 관직의 명으로 내사령이다라는 설


(16) 분황사지 發興과 팔면석비등의 記錄,  사료적 가치인정

 --신라말 호국불교

 --신라말 사찰, 민간 신앙



(17) 율정공의 學問과 位相


-율정은 朝鮮初期 세종-성종祖의 大유이다, 이의 學問과 理機론과 天文과 地理와 역서와 약사와

통의는 조선내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못하는 만큼, 박학다식의 학자다,

90평생 학문에 몰두한 분이다

당대, 정여창 손순효등등등 후에 사림의 始頭들이된 朝廷名臣들이 모두 스승으로 모신 분이다

王이 공의 학문이 높아서, 어전에 모든 신료들이 모이게 한 다음에, 事說에 대한 경연을 부탁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공의 家門에 先考 통판공부터 전해오는 世傳譜가 있었고, 율정이 다시 필사한 것이

인흥의 율정가 세전초보가 아닌가, 율정공이 만든 광릉이씨 譜가 거짓일 수가 있겠는가,

공은, 누구보다도 우리 광이의 내력, 칠원의 이족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전해들었을 것이다

멀리 신라 호족의 후예임을, 공의 작적으로 보아 당대 광주이씨의 모든 인물보다도, 우리 광이의 근원, 시조, 이속, 내력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세전초보를 무시한다 함은, 율정공의 성종 임금앞의 위상과 학문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닌가, 율정은 누구인가 공구를 후세의 제자들이 공자라고 불렀다, 율정의 이관의는 후세의 학자들이 이자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사림에서 孔丘(孔子)를 얼마나 신성시하였는가, 大邱가 원래는 大丘인데, 丘가 孔子의 함자하고 같다하여 邱라고 지명을 개칭한 朝鮮이 아닌가,

박상이 율정의 后 문호공 비문을 스스로 讚한 것은, 當代 율정의 偉業을

이미 알기 때문 아닌가,


아래는 조선초 유명한 상신 눌제 박상이 찬한 율정공의 아들 문호공 이점의 신도비명에서 율정공 내용입니다

이것을 읽노라면 율정공의 학문과 위상을

우러러 뵈올수 있습니다. 눌제 박상이 찬한 비명을 부인한다면, 도대체 어느것을 인정한다는 것인지요,

................

그 아들 관의(寬義)는

학(學)을 쌓고 문장(文章)을 해서 영릉조(英陵朝)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학문(學問)이 날로 나아갔으니 마침내 급제(及第)하지 못함에 때를 만나지 못함을 알고

좋은 그릇을 품고 황야(荒野)에 은거하여

정주(程朱)의 학문(學問)을 닦고

공맹(孔孟)의 연원(淵源)을 탐구(探究)하여

성리(性理)의 원리를 연마하고

사장(詞章)의 누습(陋習)을 벗어나 숙연(肅然)한 일실(一室)에서

책 가운데 성인(聖人)을 날로 대하니

배우고저 하는 자(者)가 문하(門下)에 모여들었고

공경(公卿)들은 유일(遺逸)로서 천거(薦擧)하여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삼았으나

그 뜻이 아니므로 즉시 사양하고 옛 집으로 돌아왔다.

 성종(成宗) 십사년(十四年)에 국내(國內)에 널리 알려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行實)이 높은 자(者)를 찾음에

경기감사(京畿監司)가 공으로써 들리니 역마(驛馬)로 불러서 편전(便殿)에 입대(入對)케 하니

성명(性命)의 깊은 뜻을 강명(講明)하고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의 도수(度數)를 분석(分析)하여

구슬을 꿴 듯이 하니

상(上)이 듣기를 즐겨하여 아침부터 저녁가지 이른지가 수일(數日)이 되었다.

인하여 상(上)이 하교왈(下交曰) 관의(寬義)는 이학(理學)이 정숙(精熟)하다더니

과연 듣는 바와 같도다 하고

장차 현용(顯用)하고 저 하였으나 스스로 늙었다 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임금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옷을 주어 돌아감을 허락(許諾)하고

그 고을 원으로 하여금 미두(米豆)를 주어서 왕(王)의 포장(襃獎)하는 뜻을 보이라 하였으니

아! 부자(父子)가 청덕학술(淸德學術)로 두 조정(朝廷)에 중(重)히 보임이 이 같으니

고금천하(古今天下)에 몇 사람이 되겠는가?

 



(18) 조선조 1630년대 간행한, 씨족원류고 <광주이씨조> 기록


   -조선중기 임진왜란으로 각지의 관향에 의거된 만성의 성씨보들이 불타없어지고
사적이 곤비하하므로 하자 조종운은 자신의 조씨가 족보를 만들면서 만성의
씨족원류(성씨의 원류.시원)를 밝히는 자료수즙 편수를 시작하였으니,
 1600년대이다,  조중운은 각성의 족보를 직접보고, 기록하여
편간한 것이 오늘날 傳해오는 氏族原流考로 광이 始祖는 李自成이고
다음은 諱 군린 諱 용수로 나왔다,
-그렇다면  1600년 당시 廣州李氏의 根源 原流 始祖가 이자성으로 이미, 기록이 존재하였다는
 이치이다.또한 시조 이자성으로 하는, 광릉이씨세승보들을, 1600년 당대에 어느 집인가
보존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19) 둔촌공가의 동공상공 때의 인보, 한음이 어렸을때, 대부거소에서 보았다는 인보


(20) 둔촌공파의 한음의 경술보 해석


--경술 당시는 任辰亂이 끝난지 몇 해라, 나라가 어수선하고 整備가 되지않는 때이고
   임진란 當時까지는 세보가 있었는데, 불에 타고 없어진지라 族譜 保存 必要性이 있었으므로 하여
  당시는, 석탄 암탄 율정공파 후손들에게는 수단의 통문을 하지 않고,
  둔촌공가 후손들 집의 가승보와 세적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집안의 족들이 가져온 자료를 보니(이이만가와 싱지공의 가승보), 상대가 고려이속된 이족의 후예로,
   석암탄 율정공가가 방친 임이 맞으나,.
--그러나 거명된 계보의 대수와 이름의 명자가 불명하니, 전의 구정한다.
--그래서 우리 광이 동성보는 둔촌부터 시작한다,


(21) 석탄공 암탄공 율정공 3파의 조선조 1720년대 간행, 을사보 해석

    -전승된 가승및 족보로 오래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 고려통판 이지부터 전래된 율정공작성 율정공가 세전초보를 근거로

   -내사령공 시조 이자성 휘 군린 휘용수로 이어져오다

   - 둔촌공파 휘하원이 합보를 거부하자


3파 합동의 동성보(현존 기록)

<廣陵李氏族譜 乙巳譜 序文 광릉이씨족보서(廣陵李氏族譜序)
  내가 모든 뫼를 보니 조종산(祖宗山)이 있고, 모든 물을 보니 그 본연 (本然)의 근원(根源)이 있는바,

뫼를 말할 때는 반드시 그 조종산을 말하고, 물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 본연(本然)의 근원(根源)을 말한다.
뫼와 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세대(世代)가 있는 자에게

가히 근본(根本)인 조상이 없으랴.
오로지 우리 선계(先系)는 신라(新羅) 때부터 있었으니,

 내물왕 조(奈勿王朝)에 내사령(內史令)公이 바로 시조(始祖)이시다.
연대가 오래되어 세계(世系)가 비록 절손됨이 있으나,

公이 신라 때에 벼슬이 높았고, 이에 후세 자손들이 계속해서

전해가며 외어서 천 년 전의 조상이 있으니, 이로서 세첩(世牒)이 있는 것이리라.
무릇 우리 姓氏로서 세첩(世牒)이 없는 者라면, 들으면 즐거워하고 보았다면

감동하여 모두들 조상으로 받들어 보첩 첫머리에 기록하고,

 모든 자손들을 통합해 기록해서 백대(百代)토록 친목하는 것이

옳거늘, 대수(代數)가 멀다고 해서 홀로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정녕 무슨 마음인가?
내가 다투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서 사파(四派) 일가들과

 더불어 내사령(內史令)公을 시조로 모시고 삼가 세보(世譜)를 만들어

인쇄하여 전하고 져 하니, 이 족보에 참여한 자는 어찌 마음으로 본받음이 없으랴.
내사령(內史令) 公 이후로 비록 멀기는 하나 동일한 혈맥이라

돈목(敦睦)하지 아니하면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 할 수 없으니, 부디 힘 쓸 지어라.

  모든 一家들은 같은 뿌리임을 생각해서 이제 다시 친하고 정의(情義)있게 지내면서

 양신가절(良辰佳節)에 가끔 종친들이 한 장소에 원만하게 모여서

 대대로 돈후(敦厚)한 풍습을 이어감으로써 합보(合譜)한 정의를

저버리지 아니 한다면 심히 다행한 일이다 할 것이다.
숭정 기원 후(崇禎紀元後) 乙巳 四月에, 栗亭公 八代孫 인흥(仁興)


   - 대부분 족보학및 서지학자들, 전공 교수들이 인정한 족보

   -시조는 서라벌 신라 내물왕조의  내사령공 이자성이다, 호족장이다

   -신라말 어지러운 난세에 호족으로서 지방을 분점 다스리다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자 이에 반대하고 절의를 높이고 항거하였다

   -고려가 군대를 동원 성을 함락하다

   -살아남은자들은 조상을 기리고 제사를 지냈다

   -고려는 성을 함락하고 우리 광주이속의 신분을 정향이속하였다.

   --휘군린 휘 용수이고 어느해부터는 휘 한희 휘 방린  다시 광릉의 삼익으로 생원공 휘한, 휘당

     휘 방귀로  사대명휘이며 이분들의 손이 율정공, 둔촌공, 십운공, 석탄공, 암탄공이다



(22) 둔촌공파의 갑진보의 해석

           ((중략...그 후 고조고 찬성공께서 이어 편차하시고 한음상공께서
서하였는 바, 생원공 이상 사대명휘가
언전잡기에서 처음 나왔고 명문의
가거할 만한 것이 없는 고로, 권말에 기록하고 그 각파자손도 부기하여 본보와 구별하였으니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경술보가 이것이다.
거슬러 경술까지는 거의 백 여 년이 되어 세대는 멀어지고 자손은 번성하니
보첩의 개수가 시기로 보아서 합당하다 하겠다.
지난 신미년에 선왕고께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각파단목을 수합하여
첨삭 보증하여 벌로함이 없었고 두루 방주를 달고 외손까지 목록하였으니
예규는 문란스럽지 않고 생략도 적당하여 드디어 상중하 삼권으로 나누어서
초본이 정해지자 왕조께서 하세하시고 그 책은 族叔父(족숙부)참판공에게
 돌려져 시기를 보아 인출하려 하였던 바 말기에 참판공께서 또 별세하시니
상자 속에 넣어둔 지 또 몇 년이 지났다.얼마 전에 北伯公(북백공)이 참판공의 동생으로 변경을 관찰하게
됨을 구공판사(공구를 모으고 일을 처리함) 할 만하고 판결군은 참판공의 아들로 명민정근하여 실
제 교정 소임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이에 임초양본(인은 경술보, 초는 중수할 초본)에 의거하여 자못 증책과 거치가 있었다.
별거 자손을 기록치 못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빠지기 때문이요, 사대명휘를 그대로 등재하였음은
 마땅히 신중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합보지설을 배척함에 있어서 사의가 명정하고 변의지서를 만듦에 있어서
원고가 상세하게 하면서 몇 달이 못되어 편찬과 각판을 마치니 ..... ))

--석율암 3파가 합보를 요구하면서 가져온 사료를 가지고, 한음 상공 당시의 전의 구정의 뜻에 따라
   명함을 해하였으나, 명에 이르지 못한다(합보지설을 배척함에 있어서 사의가 명정하고 변의지서를 만듦에 있어서 ..
중략. 갑진보 서문)
. 시조 이자성 또한 오늘 처음 본다, 상대의 선계들이 의구하므로
   둔촌을 시조로하는 광이 동성보를 만든다, 휘인흥의 석율암 3파가 비조 이자성과 합보 이유를
   간하는 통문과 석율암의 을사보에 부당을 논하므로,변설을 부기하고 이를 밝힌다.
--둔촌을 시조로한다. 
--단독의 갑진보로 편수  간한다.









5. 광이 족보를 합보하지 못한 분보 전말기, 1720년 광릉이씨 족보

    (석탄공 암탄공 대종회 제공, 1720년 휘 인흥의 기록)



 가, 『율정공가 (휘 인흥의) 廣州李氏 族譜 乙巳譜,

  廣州李氏가 족보(族譜)를 나누게 된 전말(顚末)을 기록한다. 휘 인흥)』


   『우리의 선계(先系)는 신라로부터 나와서 처음에 본관을 칠원(漆原)이라 했다.
비조(鼻祖)의 휘(諱)는 자성(自成)으로 내물왕(奈勿王) 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내사령(內史令)에 이르셨다.
그리하여 자손들이 대를 이어 대성(大姓)이 되었는데, 고려 태조가 혁명할 때를
당하여 내사령의 후예(後裔)들은 당시 봉기(蜂起)한 호걸들과 함께 고려 태조에

대항하여 신하로서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를 주(州) 부(府) 군(郡) 현(縣)으로 나누고,
항거한 사람들을 그 고을들에 배속시켜 아전(衙前)으로 삼으니,
우리 李氏도 이 때문에 관향(貫鄕)을 廣州로 삼은 것이다.
대체로 조정(朝廷)의 변천으로 역대(歷代)가 바뀔 때 가성(家聲)이 떨어졌고,
또한 세월이 오랫동안 지나갔으며 병화(兵火)까지 겹치고 보니 보첩(譜牒)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였다.

이에 옛 부터 제종(諸宗)들은 오직 시조(始祖) 내사령(內史令)만은 세첩(世牒)에
기록해서 대대로 전해 내려왔으나, 중간의 선대(先代) 휘자가 사이사이 끊어져서
내사령(內史令) 이하와 휘 익비(益庇) 이상은 몇 대나 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애석할 뿐이다.


그러나 익(益) 자 이하 三代는 곧 휘 한(漢) 자와 당(唐) 자 형제 세대(世代)로서
대수가 서로 이어졌고 휘(諱)와 호(號)가 분명하니, 그 뒤 자손들은 마땅히
내사령(內史令)으로 시조(始祖)를 삼고 중간에 끊어진 곳에는 중절(中絶)이라 쓰고
계통이 이어진 곳은 휘(諱)와 호(號)를 써서 통합된 하나의 족보를 만드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옳은 덕목이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실로 돈목(敦睦)한 풍습(風習)에 따르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지난 날 우리 李氏가 중흥하려는 때에 방친(傍親)인 당(唐) 자는 생원(生員)으로
아들 다섯이 있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그 가운데 둘째 아들인 둔촌(遁村)이
가장 세상을 울렸으며 그 뒤 자손이 번성하여 헌면(軒冕)이 높아 세상의 대족(大族)이

되었다.
지난 만력(萬曆) 三十八年 경술(庚戌, 一六一O)에 동고(東皐) 상공 손자인 사수(士修)
公이 상고하여 선대의 휘를 찾아내서 성보(姓譜)를 중찬 할 때, 公의 집에는 본래부터
세첩(世牒)이 없었기 때문에 내사령(內史令)이 있고 없는 것조차 전혀 알지 못하였다.
상고해서 얻은 선대의 휘 조차도 오히려 의아(疑訝)한 마음이 들어서 책머리에 쓰지
못하고, 다만 당(唐) 자만 쓰고 둔촌(遁村)으로 위시(爲始) 삼아 그 일파의 자손들을
수록하여 원보(元譜)라 하였고, 둔촌의 한 형과 세 동생 및 백부(伯父)인 한(漢) 자의
모든 파는 다 별보라 하여 권말에 수록하였다.
또한 권말에 비로소 원조(遠祖)인 한희(漢希)를 쓰고 그 아래에는 중절(中絶)이라

썼으며, 그 뒤의 세계(世系)는 방친(傍親)으로 연계(連繫)의 맥을 얻게 하여 그들이
동종(同宗)의 사이임을 알게 하고 인쇄하여 후대에 전하였다.


아! 슬프도다.
숙질(叔姪)과 형제의 사이가 나누어져서 두 개의 보첩이 되었고, 그 중 하나는
원보(元譜)라 하고 하나는 별보(別譜)라 하니 다른 것은 어찌 말할 필요조차 있겠는가.
보첩이 간행 된지 백여 년이 지나서도 별보의 자손들은 개한(慨恨)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합보 하고자 생각한지 오래 되었는데, 때는 숭정(崇禎) 기원 후(紀元後)
九十七年 갑진(甲辰, 一七二四)에 마침내 동고의 후손 李公 의만(宜晩)이 북백(北伯)이
되어 다시 세보를 경영하여 간차(刊次)를 설치하고 승선(承宣)을 지낸 조카
하원(夏源)에게 주로 보사(譜事)를 맡겼다.


{하원(夏源)이} 세단(世單)을 거둘 때 나는 종우(宗友)인 석탄(石灘) 公 후손
홍(泓)과 함께 만나자는 통유문(通諭文)을 내어서 회답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 뒤 회답한 글에서 만남과 함께 또한 세첩(世牒)을 가져오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나와 종우(宗又)가 함께 낙하(洛下)로 가서 세첩을 보이니,
세첩의 첫머리에 『신라 내물왕 조의 내사령인 이자성(李自成)은 처음 본관이
칠원(漆原)이며 五世에 와서 손자 한희(漢希)가 있고 한희에게도 아들 방린(防麟)이
있으며 방린의 아래는 자자자자(子子子子)로 아들 子 자(字) 네 자[四字]가 쓰여
있고 그 아래 익비(益庇), 익준(益俊), 익강(益康)의 삼형제』가 쓰여 져 있었다.
익비의 아들은 문(文)이요, 문(文)의 아들은 름(菻)과 울(蔚) 형제며 울(蔚)의 아들은

한(漢)과 당(唐) 형제니 당(唐)은 곧 둔촌(遁村)인 원령(元齡)의 아버지이며
한(漢)은 우리 선조 생원(生員)인 녹생(祿生)의 아버지이다.
둔촌에서 부터 위의 익(益) 자까지는 四代에 지나지 아니하므로 대수가 명확하고
적실(的實)하나, 익(益) 자로부터 위로 내사령(內史令)까지는 연대(年代)가 매우

멀고 중간에 끊어진 곳이 많으니 그 사이에 몇 대가 있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 선대(先代)에서 오로지 네 자[四字]의 아들 자(子)를 가지고
이 모든 뜻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정녕 무엇으로 그 정확한 대수를 온전히 밝혀낼 수 있단 말인가.
『대개 처음 끊어진 곳에 이미 五代가 끊어졌다고 썼으므로 두 번째 끊어진 곳에도
몇 대가 끊어졌다고 쓰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대수를 쓰지 못하고 다만 네 자
[四字]의 아들 자(子)만 가지고 첩첩이 썼다면 이는 이미 정확한 대수를 모르기
때문에 그 뜻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그 자자손손(子子孫孫)에 있어 여러 번 휘(諱)가 끊어진 것이 분명하고
자세한 것이니, 어찌 그 붓의 조심하고 사려 깊은 뜻을 모른다고 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경서(經書) 가운데 첩자(疊字)…를 쓰는 것은 무궁하여
그치지 아니하는 뜻을 말한 것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의 세첩(世牒) 가운데
子 자(字)의 자(子)를 첩서(疊書)한 뜻이 또한 이것과 유사(類似)하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보는 사람들은 말을 가지고 글의 뜻을 해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승선(李承宣) 하원(夏源)은 이 네 자[四字]의 자(子)만을 가지고 이어서
대수로 삼아 둔촌 이상 내사령 이하의 세계(世系)와 합쳐서 十四代로 정하고,
또 내물왕 초년으로부터 둔촌이 처음 태어난 해 까지를 계산해서 천 년이라 했으니,
천 년 사이에 어찌 다만 十四代 뿐이겠는가.
또한 이승선(李承宣)은 말하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廣州李氏는 본주(本州)에
향리(鄕吏)가 되었다고 만 말하고 이속(移屬)한 내용이 없으며, 동방에도
또한 칠원(漆原)의 李氏는 없다’고 하면서 보여준 세첩(世牒)은 결단코 취신(取信)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이미 {역사서에} 이속(移屬)의 분명한 근거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칠원(漆原)의 증거가 있음을 또한 알지 못할 뿐이니, 아! 이속(移屬)되었다는 말이
증거 할 것이 없고 칠원 이씨 또한 증거 할 곳이 없어서 네 자[四字]의 子만을
대수로 채워서 쓴다면 이승선(李承宣)의 말이 어쩌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네 자[四字]의 자(子)를 의리에 맞추어 헤아려 가며 내사령(內史令)을
조상으로 삼지 아니한다면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또 뇌집(牢執)ˆ한 사람은 대체로 그의 주장이 先代의 일을 변경시키고자
하지 아니하므로 종우(宗友)와 내가 편의(便宜)한 방법을 가지고 달래기를,
『“우리의 성보(姓譜)를 상중하 세권으로 나누어서 매 권 머리에 내사령을 본원 비조
(本源鼻祖)라 쓴 뒤 중절(中絶)된 곳에 중절이라 쓰고 이어진 곳에는 차례 차례
휘(諱)를 이어 써서 각 파가 문호(門戶)를 일으켜 세운 곳에 이르러서 중시조
(中始祖)를 삼는다면, 귀 파(貴派)는 둔촌으로 시조를 삼고 우리 파는 또한 추존할
조상이 있으니 이와 같이 수보(修譜)한다면 위로는 본원의 할아버지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목종(睦宗)의 도리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바라건대, 『{종친들의 중론(衆論)에 따라} 』 『낙하(洛下)의 모든 종친들이 다
모여서 강정(講定)하자는 뜻은 실로 합당하다 』고 재삼 간청(懇請)하였다.
『낙하(洛下)의 종친들이 모였을 때 전 교리(校理) 승원(承源) 公이 내 뜻에 호응하여  』

세 권의 족보로 정하고자 하니, 『이승선(李承宣) 하원(夏源)이 홀로 구보(舊譜)에
의해서 결단코 고치려 하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그 의논은 드디어 잠자게 되었다.


내 어찌 두 번 다시 그와 더불어 반드시 다투어야 하겠는가.
이는 정녕 의리가 있는 곳을 따라 각기 따로 세움만도 차라리 못할 것이니라.
이에 세단(世單)을 거두어 돌아오니, 스스로 처리하는 바가 비록 합당하다고는
하지만 동종(同宗)의 의리로서는 어찌 결연(缺然)함이 없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대저(大抵) 내사령(內史令)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 비록 금석(金石)의 글로 남은
것은 없으나 후세 자손들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모두 내사령으로 시조를 삼아
천년에 이르렀으니, 사람의 이치로 보더라도 어찌 믿지 아니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는 정녕 없을 것이다.


하물며『 눌재(訥齋) 박상(朴祥) 선생이 지은 문호공(文胡公) 비문 가운데 고려초에
본관을 옮긴 일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으니 우리 李氏가 생긴 것이 신라가 분명하고
이미 신라 때 부터 있었다면 내사령(內史令)이 시조(始祖)가 되는 것은 당연하고도
명백한 일인 것이다.


세상에 또한 칠원 이씨(漆原李氏)의 족보가 있으니, 그렇다면 처음에 칠원으로
관향을 삼았다는 말이 또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 율정(栗亭) 선공(先公)께서는 경륜에 밝고 행실 또한 닦으신 어진 분인바,
그리 멀지않은 과거에 사시면서 내사령을 추모하여 시조(始祖)로 삼고 칠원으로 처음
관향을 삼은 세첩(世牒)을 유전(遺傳)시켜 왔으니, 어찌 더욱 광명정대(光明正大)한
행적이 아니겠는가.


무릇 우리 廣州李氏가 이 보첩(譜牒)을 얻어 보았고, 인하여 실로 근본이 어디서부터
온 바를 아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로서 말미암아 우리가 동종(同宗)으로서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다행이라 할 것이다.


   시조(始祖)의 휘는 마땅히 간행(刊行)으로 오래가게 해서 민몰(泯沒)치 않게 하는
것이 옳거늘, 뜻하지 않게 지금 와서 이승선(李承宣) 하원(夏源)이 홀로 연대가
오래되어 믿지 못하겠다는 구실로 휘와 호를 신간(新刊)하는 판각에 채우려 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영원히 그 근본(根本)을 끊어 버리려 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이에 나는 그 것이 민몰되어 전하지 못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종우(宗友)와
더불어 장인(匠人)을 사고 재물을 모아 간행(刊行)을 위한 간판(刊板)⑪을 만들어
석탄(石灘) 형제 분과 율정(栗亭) 형제 분 사공(四公)의 파(派)를 아울러 합해서
한 가지 보첩을 만들고 상하권(上下卷)으로 나누어서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 李氏로서 세적(世蹟)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생각해서 아래와 같이 바르게
기록하여, 이들로 하여금 근본(根本)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올곧게 알게 하여
그 시비(是非)를 사뭇 한 곳에 돌리고자 하노니, 아! 차라리 슬프도다.
실로 천 년(千年)이라도 이 글이 없어지지 아니한다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한(恨)하게 하겠는가.
이에 근본을 생각하여,
만약 나에게 죄(罪)를 주지 아니한다면,
우주(宇宙)로 돌아간 뒤라도 후인(後人)들이 나를 알아 봐줄 바는
다만 이 글 뿐일 것이리라.


  인하여 명(銘)하기를,  지난날 우리 선계(先系)는 내사령(內史令)의 후손(後孫)일지니.
신라(新羅)의 운수가 다하매 나라의 걸음은 바야흐로 주춤거렸네.
군(君)께서 여조(麗朝)에 나라를 바치고 마침내 신하라 일컬으니.
고국(古國)에는 군왕이 없고 뜻 있는 선비 마음은 매냥 애달펐네.
나라 다스리기를 등한(等閑)하니 호걸(豪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지.
각각 위호(位號)가 있어 한 곳의 임금과 백성이 되었네.
옛 강토 회복하려는 담대한 포부[斗膽]⑫는 그 얼마나 컸던가.
의로운 명성은 비록 드러나지만 병력(兵力)이 모자라니 어찌하리오.
영원한 天命이 참 주인에게 돌아가니 위무(威武)⑬로서 핍박 받았지.
결국 항복하여 아전(衙前)으로 예속되니 여러 세대(世代)가 흘렀네.
큰 도(道)는 돌아오기를 좋아하고 물리(物理)는 새 것을 중하게 여기니.
자손이 길운(吉運)을 만나 다시금 조신(朝紳)⑭을 두르게 되었네.
이미 뿌리가 깊었으니 잎 또한 무성하여 천년만년 이어가리라..』


숭정(崇禎) 기원후 을사(乙巳) 四月 日에
栗亭先生 八代孫 인흥(仁興)은 삼가 기록한다.)) 』

서하고




나. 1720년 이렇게, 합보함이 무너지자, 석탄 암탄 율정의 3파는

『을사보를 만들었으니 내사령 이자성의 비조를 삼게되는 연유를

서문에 기록하고, 근거를 범례에 기록하였으니, 이는 갑진 당시의 을사년의 일이다.



『參考,廣陵李氏族譜 乙巳譜 序文 광릉이씨족보서(廣陵李氏族譜序)
  내가 모든 뫼를 보니 조종산(祖宗山)이 있고, 모든 물을 보니 그 본연 (本然)의 근원(根源)이 있는바,

뫼를 말할 때는 반드시 그 조종산을 말하고, 물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 본연(本然)의 근원(根源)을 말한다.
뫼와 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세대(世代)가 있는 자에게

가히 근본(根本)인 조상이 없으랴.
오로지 우리 선계(先系)는 신라(新羅) 때부터 있었으니,

 내물왕 조(奈勿王朝)에 내사령(內史令)公이 바로 시조(始祖)이시다.
연대가 오래되어 세계(世系)가 비록 절손됨이 있으나,

公이 신라 때에 벼슬이 높았고, 이에 후세 자손들이 계속해서

전해가며 외어서 천 년 전의 조상이 있으니, 이로서 세첩(世牒)이 있는 것이리라.
무릇 우리 姓氏로서 세첩(世牒)이 없는 者라면, 들으면 즐거워하고 보았다면

감동하여 모두들 조상으로 받들어 보첩 첫머리에 기록하고,

 모든 자손들을 통합해 기록해서 백대(百代)토록 친목하는 것이

옳거늘, 대수(代數)가 멀다고 해서 홀로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정녕 무슨 마음인가?
내가 다투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서 사파(四派) 일가들과

 더불어 내사령(內史令)公을 시조로 모시고 삼가 세보(世譜)를 만들어

인쇄하여 전하고 져 하니, 이 족보에 참여한 자는 어찌 마음으로 본받음이 없으랴.
내사령(內史令) 公 이후로 비록 멀기는 하나 동일한 혈맥이라

돈목(敦睦)하지 아니하면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 할 수 없으니, 부디 힘 쓸 지어라.

  모든 一家들은 같은 뿌리임을 생각해서 이제 다시 친하고 정의(情義)있게 지내면서

 양신가절(良辰佳節)에 가끔 종친들이 한 장소에 원만하게 모여서

 대대로 돈후(敦厚)한 풍습을 이어감으로써 합보(合譜)한 정의를

저버리지 아니 한다면 심히 다행한 일이다 할 것이다.
숭정 기원 후(崇禎紀元後) 乙巳 四月에, 栗亭公 八代孫 인흥(仁興)



또한 3파의 원로들은 내사령비조의 추존과 이유를 예하여


다.1720년, 석탄암탄율정공가 <廣陵李氏族譜 乙巳譜 凡例>

    1조에서, 廣州李氏 경술보(庚戌譜)구보(舊譜)의 정한 글에 있는 것에는

"둔촌 이전은 대수(代數)와 명호(名號)는 비록 증거 할 수 있으나

그 진위가 분명하지 아니하므로 (아직은 본보(本譜)에는 수록치 않고)

이번에는 권말(卷末)에 수록해서

 별보(別譜)라 이름하고, 후세(後世)에 분명하게 아는 사람을, 기다려서,

교정(校正)하도록 한다" 하였다.

그렇다면,교정(校正)한다는 이 말이, 의미하는 진정한 뜻은, 

결국, 청전(靑氈)의 보첩(譜牒)일 수밖에 없으니,

제종(諸宗)이 가지고 있는, 가승(家乘)을 참고하여, 그 진위를 증거하였고,

문호공(文胡公)의 금석문(金石文)에 의거하여, 그 근본이 어디로부터

온 바를, 또한, 분명하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에 근본(根本)을 추모하여, 내사령(內史令)으로, 비조(鼻祖)를 삼아,

합보(合譜) 하고자 하였으나,

그 종의(宗議)가 통일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석탄 암탄 율종공은 따로) 분보(分譜)한다.


  2조에서는 우리 廣州李氏는 고려 말에 사파(四派)로 나누어졌으니,

곧, 한(漢)과 당(唐) 형제분과 양중(養中) 형제분이  것이다.
삼파(三派 한(漢)을 대표로 하는 派와 양중(養中) 兄弟派)

의 자손들이 東西에 흩어져 살지만, 말을 같이 하기로 약속하지도 아니 하였음에도

모두 내사령(內史令)으로 비조(鼻祖)를 삼아 세첩(世牒)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오로지, 홀로, 당(唐) 자의 자손만이 그 세승(世乘)을 잃어버리고,

내사령(內史令)이 있고 없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다. 이번 낙하 (막하)의

종중 합보회의시 이만공의 후손들을 만났는데
당(唐) 자의 후손 중인자라 이미 고인(故人)이 된 승선공(承宣公)

이만(頤晩)(숙종 15년 증광시(增廣試) 문과. 父 이후징(李厚徵).
                   이하원(李夏源) 父 이시만(李蓍晩)의 아우,

갑진보를 편찬 한 이의만(李宜晩)의 형)이

초하고 보존한 가승(家乘)을 들어다 보니

또한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가 있었다, (이는 결국) 사파(四派)가

 다 같이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를 가지고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오래 되었다고 해서 의심할 수 있겠는가.이에,

내가 그 근본(根本)을 미루어 밝히어 내세(來世)에 전한다.
3조 ~ 10조 : 생략

11,다른 성씨들 집안에서도 간혹 별보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나,


『둔촌공 계통 후손은 홀로 무엇 때문에 (이를 파하고)혐의하여,

합보(合譜)를 피하고자 하는가.
대개 세상에서 별보를 만드는 사람들은 분파(分派)가 된 뒤


세계(世系)가 중간에 단절되어 시조(始祖)까지 서로 연결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보첩을 다르게 하는 것일 뿐,
그러나, 지금 우리 동종(同宗)은 한 가지로 계통이 중절되고,

또한 같은 할아버지로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질과 형제 사이에

한 쪽은 원보(元譜)를 쓰고, 한 쪽은 별보(別譜)를 만드니,
정녕 의리(義理)가 있는 곳을 쫓아 바로 잡지 아니할 수 없다.
이에, 『양중(養中) 형제파와 율정(栗亭) 형제파} 사파(四派)가 뜻을


모아 보첩을 통일한다.

12조에는 우리나라 성씨 중 대성(大姓)이 된 모든 집안들은

대수가 멀어져 비록

누대(累代) 동안 중절된 흠(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의리상

그 처음 할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겼으니,

이에 마땅히 내사령(內史令)으로 본원(本源)의 비조(鼻祖)로 삼는다.

13조 ~ 14조 생략


라.廣州李氏族譜 乙巳譜 卷上에

新羅奈勿王朝內史令李自成初本漆源後世爲廣州李氏自
신라내물왕조내사령이자성초본칠원후세위광주이씨자
內史令至五世有孫漢希漢希有子防隣防隣下中絶不知幾代
내사령지오세유손한희한희유자방린방린하중절부지기대
其後有諱益庇益俊益康三昆季
기후유휘익비익준익강삼곤계
益俊閤門祗侯無后
익준합문지후무후
 (신라 내물왕 조의 내사령(內史令)이신 이자성(李自成)께서는 처음 본관이 칠원(漆原)이셨으며,

그 후세에 이르러 廣州李氏로 되었다.
내사령(內史令)으로부터 五世에 이르러 손자 한희(漢希)가 있고, 한희께서도

아들 방린(防隣)이 있으며 방린 아래는 중간에 끊어져서 그 정확한 대수(代數)를 알 수 없다.
그 후 휘 익비(益庇) 익준(益俊) 익강(益康) 삼형제[三昆季]가 계시다.

익준은 관직이 합문지후(閤門祗侯)①에 이르렀으나 자손이 없다.)


『廣州李氏族譜 乙巳譜 卷末>에는


崇禎紀元後九十八年乙巳四月 日 開刊于冠洞
숭정 기원후 구십팔 년 을사년 사월에 관동(冠洞)에서 처음으로 간

을사보(乙巳譜) 범례 권말에 이르기를,


『다만 오로지 홀로 당(唐) 자의 자손만이 그 세승(世乘)을 잃어버리고


 내사령(內史令)이 있고 없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唐) 자의 후손 중 고인(故人)이 된 승선공(承宣公)

이만(頤晩)이 기록한 가승(家乘)을 들어보니

또한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가 있으니, 결국 사파(四派)가 다 같이

내사령(內史令)의 휘와 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오래 되었다고 해서 의심할 수 있겠는가.  - 하략 -




6. 율정공 삭탄공 암탄공의 족보 기록 근거

   승선 하원공 주장에 대한 반론문,  율정공  후손 이근수 


7. 둔촌공가예조참판,하원공의 변설 13조 와  갑진보 서문, 교리 승원 서문


 가.  승선 하원공의 변설 13조
(1) 광릉세보는 아마도 동고 상공께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경술보에서

     둔촌을 시조로 삼고 생원공을 소자출 (所自出)로 삼은 것은

     동고선생의 옛 서책을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로 갑진보에서도 둔촌을 시조로 삼고, 생원공을 소자출로 한다.


(2). 경술보에서 둔촌을 시조로 삼고, 생원공을 소자출로 하였기 때문에 한희(漢希) 이하 4대는 별보로 한다.
(3).율정이 저술했다는<세전초보>의 내용 중 이자성이후 댓 수 기록이 명확하지

않고 한희 이후 명자와 댓 수도 의심스러운 내용이다.
(4).<세전초보>의 내용 중 칠원이 본관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광주에

 배속되었다는 것은 허망한 말이다.
(5).<세전초보>의 내용 중에 광주에 향리로 배속되어 팔면의 비석을

 세워 기록했다 라는 말은 황당무계하다.
(6).둔촌이하의 댓 수는 명휘가 분명하니 종장께서 성씨의 연원을

 상세히 밝히고자 둔촌을 시조로 삼았으며 근거가 없는 석율 파의 계보 한희 이하 4대는 별보에도 없었다.
(7).한희 이하4대는 구서인보에 전하지 않았고 경술보에서 언전잡기로

기록하였다. 때문에 둔촌 자손들이 이를 이어서 기록하겠는가.
(8).율정이 저술했다는<세전초보>의 내사령의 일은 가장초본에는 없는 언전이다.
(9).율정이 저술했다는<세전초보>의 내용에서 자성을 본원시조로 삼는다는 설은 의심할 바다.
(10). 승지공이 쓴 보초의 별보권의 칠원 설은 사실이 아니고, 염현으로

      귀속시켰다라고 할 때의 혐현이 지금의 광주라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
(11). 승지공이 쓴 보초의 별보권 내용 중에 패천동 선묘에서 발견한

묘지석 기록에는 한희로 부터 생원공에 이르기까지 신, 한, 방귀의 관직과 가문의 계통을 기록한 묘지석을 믿을만한 근거가 없다.
(12). “한희(漢希) 이하 4대는 동고 상공의 옛 족보를 그대로 따라서 기록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13). 자성(自成)•군린(君隣)•용수(龍壽)의 3대가 있고 문(文)은  

          --염주 서자번(徐自蕃)의 딸을 배필로 삼았고, 울(蔚)은 강주

            이지효(李之孝)의 딸을 배필로 삼았다는 내용이 의심할 만 함을 밝힌다.
라고 족보의 말미에 이를 기록하였다,.



  나. 둔촌공가 갑진보 서문, 교리 승원 서문

『 족제 판례원보 하원 (族弟 判隸院 하원보夏源甫)가
세보를 중수하여
 교정을 마치고, 장차 그 叔父北伯(함경 감사) 공립소로 보내어, 인쇄에 부치고자 할제
나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일은 형의 선대부께서 일찍이 경영하기 시작하였던 바이거늘
형이 어찌 이 세보에 일언이 없을 수 있겠오." 하기에 내 가로되, "좋다,
그것은 내 본의이거니 어찌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리오."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데
구간 동성보 한 권은 곧 우리 동고선조께서 찬정하신 바이나 임진에 이르러
병화에 잃어버린 바 되었고
그 후 고조고 찬성공께서 이어 편차하시고 한음상공께서
서하였는 바, 생원공 이상 사대명휘가
언전잡기에서 처음 나왔고 명문의
가거할 만한 것이 없는 고로, 권말에 기록하고 그 각파자손도 부기하여 본보와 구별하였으니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경술보가 이것이다.
거슬러 경술까지는 거의 백 여 년이 되어 세대는 멀어지고 자손은 번성하니
보첩의 개수가 시기로 보아서 합당하다 하겠다.
지난 신미년에 선왕고께서 제종의 위임을 받아 각파단목을 수합하여
첨삭 보증하여 벌로함이 없었고 두루 방주를 달고 외손까지 목록하였으니
예규는 문란스럽지 않고 생략도 적당하여 드디어 상중하 삼권으로 나누어서
초본이 정해지자 왕조께서 하세하시고 그 책은 族叔父(족숙부)참판공에게
 돌려져 시기를 보아 인출하려 하였던 바 말기에 참판공께서 또 별세하시니
상자 속에 넣어둔 지 또 몇 년이 지났다.
얼마 전에 北伯公(북백공)이 참판공의 동생으로 변경을 관찰하게
됨을 구공판사(공구를 모으고 일을 처리함) 할 만하고
판결군은 참판공의 아들로 명민정근하여 실
제 교정 소임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이에 임초양본(인은 경술보, 초는 중수할 초본)에
의거하여 자못 증책과 거치가 있었다.

별거 자손을 기록치 못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빠지기 때문이요,
사대명휘를 그대로 등재하였음은
 마땅히 신중을 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합보지설을 배척함에 있어서
사의가 명정하고 변의지서를 만듦에 있어서
원고가 상세하게 하면서 몇 달이 못되어 편찬과 각판을 마치니
판결군의 힘이 이토록 많았으며 이는 또한 오종의 대행한 일일 것이다.
오호라, 고어에 이르기를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성하고
원천이 멀면 흐름이 길다 하였으니 이치에 떳떳한 바이로다.
우리 이씨는 여계에 현달하기
시작하여
본조에 이르러서는 광묘 성묘대에
극성하였고 명종 선조 때에 이르러 명공과 석보가 우련 배출하여
문장과 덕업이 역사에 빛나고 자손은 천억이오, 과갑이 연이어오니
이는 조선이 쌓이고 쌓인 후음의 소지가 아닐 수 없은 즉 이 족보를 보는 자, 조
선의 여체를 이어서 단양하고 가성을 떨추지 않을 것을 생각치 않을 수 있을까.
이는 나와 종인이 마땅히 함께 힘쓸 일이요,
나로서는 따로 마음에 서글픈 바가 있으니 내가 전에 조부님을
모시고 이 일을 서찰을 대필하여 드리는 일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역력하건만 깜빡할 사이에 이미 삼기(일기는 십이년)가 지났으니
지난 일을 생각하고 슬퍼 울먹이지 않을 수 없어 이에 몇 마디 아울러 적는 바이다.
숭종 갑진년 계하  후손 통운대부 전 행홍문관 교리지제교
겸 경연시독관춘추관 기주관
승원 삼가 씀』이다.

 『參考,李承源 1661(현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효백(孝伯)
. 이필성(李必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건징(李建徵)이다.
아버지는 이경만(李卿晩)이며, 어머니는 송극(宋極)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에 생원이 되고,
170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722년(경종 2) 부수찬을 역임하고 수찬에 올랐다.
이듬해 진위 겸 진향사(進慰兼進香使) 여성군 이집(礪城君 李楫)과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는 필선이 되었다. 이어서 헌납·집의·수찬·보덕·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24년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 때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간언으로써 이를 막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형조참의·승지·동지의금부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參考, 李宜晩 선응(善應), 농은(農隱), 정정(靖貞)

1650년(효종 1)  1736년(영조 12)  사간원정언, 충청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한성판윤 
 1650(효종 1)∼1736(영조 12).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응(善應), 호는 농은(農隱). 충정공 이준경(忠正公 李浚慶)의 5대손이며,
 이사수(李士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필행(李必行)이다. 아버지는
이후징(李厚徵)이며, 어머니는 송휘길(宋暉吉)의 딸이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지방수령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체직되어 영해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1708년 중앙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이 때 5개 조항의 잠계(箴戒)를
올려 숙종으로부터 호피(虎皮)가 하사되기도 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10여 년간을 홍문관에서 재직하다가 1722년(경종 2)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 충청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청렴결백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죽었다. 시호는 정정(靖貞)『청선고(淸選考)』       


8. 승선 하원공의 변설 13조, 해석과 분석


가.  경술보나 갑진보는 원래 둔촌공 후손들만의 동성보이다
그런데 갑진보 편수 당시에, 석탄, 암탄, 율정, 경선고사, 십운과, 보현,과 후손들이
 와서 승지 하원공에게 찾아와서, 둔촌공가와의 합보를 원하는 것인데,
둔촌공가 자체의 수단도 부족한 바. 이를 辨說하고 이어서
석탄 암탄 율정공파의 족보에 대한 辨說을 둔촌공가 갑진보에 편수하면서 남긴것이  변설 13조이다
하원공은 당대 臣으로 나중에 대사헌 청백리 오르고 기로 재상으로 오랜 세월 조정에 영향을 끼친 분이다
편수 당시 왕을 근접하여 모시는 승선으로, 보를 편수하고 점검하는 위치인지라
석율암에서 가져온 증빙을 보고, 쉬이, 이를 긍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칙에 나가지않고, 족보에 매달려, 금고할 시간을 지녀야하는데 그런 시간이 있는가
 없었고, 밑에서, 정리하고 받추어 준 草譜를 가지고, 검열한 것이기에
방친의 先代까지 점검할 시간이 없던 것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通文으로 석율암 측에서
 둔촌공가의 갑진 별초보와 경술보의 틀림과 비례의 단을 일지 지적하고,
합보의 필요성을 통하는 통문을 읽고 나서야, 그 논증 부당을,  강조한 것이, 이른바, 변설인 것이다
(휘 인흥은 갑진 년전부터 수단 동수하여 전 종가의 동성 합보를 강조하고
필요성을 밝힌 통문을 둔촌공, 석탄공, 암탄공, 십운공, 방친까지 돌렸다. 이것이 족보상에 나오는 통문이다)
여기서 돈촌 위시의 경술보와 갑진별보 초보를 지적 하였다,
즉 둔촌에게 생원공이 있는데 형제들까지 별자라하고, 이를 합보를 하지않는 것을 지적하고
생원공 위의  4대가 이미 경술보에서 있음이 밝혀졌는데, 둔촌 위시조로 하는 것, 선계방친을 배척하는 것,
독단의 초보를 만든것을, 반박하는 통문(광이 세보 을사보 범례 참조)을 한 바,


하원공 변설이 13조 일 것이 아닌가 한다.


  일응, 當代의 譜牒은 大部分 士家에서 현달한 중흥조를 始祖』로 삼는 것이었다,
그것이 朝鮮王조 族譜인 선원록의 영향을 받아서  조선의 始祖가 이성계이고,
 이상의 4고는, 선계로 할 뿐 太祖가 始祖라는 개념처럼, 조선시대 내내 종묘와 조정을 휘잡은 광문의
명설에 맞아야하는지라 하원公이 조정의 예에 따르고, 경술보에서도, 한음이 이미,
遁村부터 始作하는 성보를 편하였으니, 의심과 전의인 것들을, 혼자 독단, 자기 스스로,
 단정하여, 내사령 비조를 두서한다는 것은  責任의 문제이기에,
경술보의 둔촌 위시를 따른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또한 거증된 문호공 비문, 율정초보, 통판공 초보, 이명징 정곤수가 세보,.
우생의 묘지명 모두 상대의 기록이 있었으나, 둔촌과 생원공 그리고 국자감 생원 이한과의 윗대에 대한

고증을 확인하고, 둔촌공내의 제종들의 의견 통합을 할 겨를과 여건은 없었을 것이고,

 합가를 부정한 것일 것이다 또한 당시에 합가를 한다고하면


국자감 추사정 이 한이 장자가 되고, 울과 름으로 올라가서, 멀리 익비 익준 익감- 이한희로 가서,

이자성에 이르므로,

그때까지 우리는 麗末 大學 둔촌의 후예 이다』 라는 조정 내외의 認識』을 깨기는 어려웟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광이의 주축 大姓이고, 둔촌의 후학임이 내외의 표지인데 갑자기

차자의 신분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승선 하원공이 이를 인정할 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 現存하는, 생원공의 子, 遁村을 始祖로, 旣定한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
  족보의 편수는 사초를 올리는 사관과 같은 것이다, 하원공은 당대 조야에서 역학상, 힘이 있는 臣』이었고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또한 눈으로 본 사실만 기록하는 것이고,
왕조의 족보인 선원록이나, 종친부첩 돈녕보첨, 왕족의 족보 심지어 태조 이래의 공신의 공신록이나 
종묘에 배향 추존되는 상신까지  그의 본관과 집안 이력을, 나라에서, 관리하던 시대이니,
하원공 입장에서는 당연 명자인 현달한 둔촌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王을 近據에 모시고 시강하는 경연관을 거친 예조참판이고, 史實에 근거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上代의 기록은 전래의 유업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나, 特信하지 못하므로, 확실한 代인 遁村부터 始作하자는 것이고,
시조는  生民이 아닌 顯達한 者를 추존』하는, 당시 朝野의  萬姓 風習이니, 生員공은 소자출로 하고
遁村을 始祖로 한다는, 定議를 세운 것이라 할 것이다.
(하원은 주자학에 밝은 학자로 『경전차의(經傳箚疑)』·『송현제서증해(宋賢諸書證解)』저서 등을 보면
그의  학풍을 짐작할 수 있으니, 얼마큼 『주자 정리에 원칙』이었던 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參考,이하원(1664(현종 5)∼1747(영조 23).
 원례(元禮), 예남(蘂南), 정졸재(貞拙齋)
광주(廣州). 자는 원례(元禮), 호는 예남(蘂南)·정졸재(貞拙齋).
예조정랑 이필행(李必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후징(李厚徵)이고,
아버지는 도승지 이시만(李蓍晩)이며, 어머니는 이시함(李時함)의 딸이다.
 1691년(숙종 1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6년 통덕랑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하여 정자·봉상시직장·평안도도사 등을 역임하고,
1700년에 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장령 등을 지내고 1704년에는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6년에 집의·사간·경연관 등을 거쳐 성천부사·순흥부사 등으로 나가
학문과 정치 및 근검에 힘썼고, 1712년 다시 사간·남학교수(南學敎授) 등을 역임하고
 1716년에 사직하였다.그 뒤 1721년(경종 1) 다시 순천부사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수찬·응교를 거쳐
의주부윤을 지내고 이듬해 대사간·경상도관찰사·호조참의·강릉부사에 이어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판결사·공조참판 겸 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727년(영조 3) 예조참판,·형조참판,·대사헌 겸 비변사당상을 지냈다.
1728년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공을 세워, 다시 형조참판 겸
승문원좨주를 역임, 1743년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고,
한성부판윤·대사헌 겸 선공감제조·공조판서를 거쳐, 1747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계하여 서추(西樞)에 배속되었다.
 영조 때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저서로는『경전차의(經傳箚疑)』·『송현제서증해(宋賢諸書證解)』가 있다.


 나. 그러니,
   하원공의 변설은, 합보를 위하여, 원래는 경술년의 한음상공의 전의를 구정하였으나,구정이
명의 해에, 이르지 못함으로,,합보하지 못하는, 이유를 썻으니 변설 이다
그리고, 13조가 금석의 금과나 옥조가 아니란 뜻』이다.
하여 언제든지 후손들은, 전의에 대한, 교정과 합보를 위한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고
그래서 후에 복암선고나 특진관 승재공의 기미보에서는 시조의 근원을 찾아가서 반드시 합보의 당위를 서명』하기도 하고
최근, 정묘년에 이르러서는 이런 취지에 의거, 4파가 동수한 것이다


다.  후에 둔촌공 후손 입장에서도 석율암탄 3파와
합보 필요와 동조근본으로 합치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갑진이 흐른  400년뒤인,
1987년, 30년전 정묘년에 제종들이 낙하 인사동에 모여, 각파의 의견기와 고증서를 분석,


전부 광이의 집안은, 확실하므로,각 파는, 各派의 중시조 부터 출발하고,
동성보로 합보하는 것이, 선대의 유지이고,

시조 이자성과 선계에서의 모든 전해진 기록 등은
이를 부기하여 기록을 유지하는 것』도,
둔촌공가 입장에서는 한음의 전의구정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고,
3파의 정신에 합일하는  주장하므로,
 4파의 합일 의견 즉, 우리는 동도동근, 광이는 틀림이 없는 핏줄임을 인정,
 이종욱 도유사 중심으로
대동보』를 만든 것이다


9. 갑진보 당시부터 기미년까지 둔촌공가에서의
시조 이자성을 구정한, 선조들의  증거 및 합일을 위한 노력,


      가. 그러나 ,기백이 흐른 뒤에, 둔촌공파 후손 복암공은 1796년 병진보 서문에 가름하여

『<경술-갑진보의 遁村爲始>의 연유를
적시하여  諸宗의 理解를 求한 것이다. 즉 『대체로 예(禮)에는
시조를 중히 여기나 시조란 것은 기초를 세운 조상(祖上)을
지칭(指稱)함이오 생민(生民)의 시조를 말함이 아니니 국군(國君)으로 처음 봉(封)함을 받는 것이나
경대부(卿大夫)로서 처음 작(爵)을 받은 것이나 혹 열국(列國)에서 이거(移居)하여 후세(後世)에까지
공덕(功德)이 있는 자 및 타족(他族)과 유별(有別:구별이 있음)한 자를 다 시조(始祖)라하고 혹은 별자(別子:庶子)는
이를 따로히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듯이 그의 아버지는 있을 것이니 있은즉 제사를 지낼 것이고 제사를 지낸다면
 제사 받는자 이하의 씨족(氏族)은 합쳐지게 되는 고로 주(周)나라는 이미 직(稷)으로 시조를 삼았고, 은(殷)나라는
 계(契)로 시조를 삼았으되 또 반듯이 곡에 체지냈으며, 하(夏)나라는 이미 전욱으로 시조를 삼았으나
또 반듯이 황제(皇帝)께 체를 지냈으니 그 뜻이 심히 정(精)하고 넓다.우리 이씨(李氏)는
만력경술보(萬曆庚戌譜)에서 이미『둔촌공(遁村公)으로 시조(始祖)』를 삼았으니

 『둔촌으로부터 처음으로 현달(顯達)하였기 때문이며 또 그 아버지 생원공(生員公)을 권수(卷首:책의 첫머리)에
 특서(特書)하고 생원공 이상 사대명휘(四代名諱)와 생원공의 여러 타자(他子)들과 사대후예(四代後裔)들을
 권말(卷末)에 기록하여 별보(別譜)로 하였으니 둔촌공 또한 소자출이 있음으로서 이요, 있는 바로
고인(古人)의 체합하는 뜻이며 존조(尊祖)와 합족(合族)에 가위(可謂) 둘 다 득의(得宜)하였다 할 것이다. ,)』,
이유를 밝힌 것으로 석암탄 공과 율정의 후손들에게 이야기하고, 아울러 서문의 말미에
『경묘갑진(景廟甲辰)에 이르러 여러 의논이 분열(分裂)되어 사대후예(四代後裔) 세집이
드디어 따로 을사보(乙巳譜)를 한 것은
곧 별보(別譜)로 된 것을 소흘(疎忽)하다고 여긴 까닭이다. 그러나 분별(分別)한 것은
다만 둔촌이 별자(別子)임을 밝히고자 하였을 따름인 ,고로, 둔촌의 친형제들 까지도 오히려 분별(分別)한 것이니
어찌 소흘하다 할 수 있겠는가...중략)』를

보면 둔촌위시 진정을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그러니,
 결국,  석율양파와 둔촌공 4파는 『스스로 자기파들은 본자라하고 타파들은 별자라고
하면서 본자들만 수록한
 보첩을 따로 발간』하게 되었고, 이러한 종사의  亂事가 오늘에 이른 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든촌공 후 승선 諱하원공은 감으로,『 내사령 설로 종가내 불분해진 선대 둔촌공의 존엄과
종론의 이설을 차단하고자, 다시 광이 둔촌위시』를

 명확히 하고, 둔촌의 형제들은 별보로 한 후,
"이자성 비조에 대한 두서 금기 연유를 밝히는  변설을 作成하여 보서의 말미로
 "변설 13條"를 부기하였으니, 이른바,
오늘의 변설 13조의 이것이고, 이른바, 이것인 것이다.


즉, 둔촌공가의 『둔촌 위시의 이유는 광이가 여말선초의 대학인 둔촌으로부터
,휘광하여 발흥한 본조인지라 원래 모시는 시조는 동국 만성들이
휘광의 조를 시로하는 왕조와 가법인 바, 이에 쫓아서 시로 한다는 것을,
정한 것』이다. 즉 『연원을 닿아 올라가는 추설이 아니라, 경종의 모범이 되고, 시의 근본을 찾는다는 것이다
광이의  둔촌 위시는  반가 상정한 것인 즉,

조선 개국은  태조이고 태조 위에 4조와 8고가 있었으나 태조의 위시인 것과 같이, 둔촌공파에서는,
둔촌으로 시작한다라고하고, 이것이 후일 하원과 복암, 용학 모두 한음의 정의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둔촌공가는 할 수없이 둔촌위시한 것이다.
그래서 갑진/병진보와 둔촌공家 광이세보에서 始는 遁村이다라는 것을,
 둔촌위시의 이유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들이 삼아야하는 것은 爲始는 同姓家
宗法에 따르는 禮이므로, 이설하는 것은 안되고,


『우리 廣李가 크게, 석암율 3파와 둔촌공과 형제파로 갈린 것에 대하여
정상에 이르면 한, 同祖根源인 것으로 반드시 始原을 찾아서, 由來를 고억하고,
동국만성 중에 2000 여年 장구한,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역사와 정의가 있는 宗家임을 밝히는 것에서,
신라초기 우리 광이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지,
『공가와 공가를 구분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나.  오호라,  당시 갑진 세월을 거술러 숙종조의 선고
둔촌후손 參判 휘 휴징, 휘 필행 선고께서,

 광이의 由來와 內容을 집성한 세적이 있었고 이를 가승하였으며, 
휴징과 필행은  당대의 석학으로 그의 학맥은 거술러 김종직 김굉필등에 이르는 분으로
『우리 이씨가 신라 내물왕 대의 "內史令을 지낸 칠원백의 후예로, 칠원족" 』임을 언급하였었고,
 정조때 선전관 
복암 휘 기양공은  복암家가 소장『 "복암가장 초보"와 李明徵 家와 鄭崑壽 家 所藏, 廣州李氏 先代圖와
세전을 보고,

 "이명징과 정곤수는 漢陰 상공과 비슷한 時代의 사람"인지라 이 기록을 무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것 저것을 보고, 先代 系代를 당시의 눈으로,
今考하여,  "광주이씨의 이자성을 시조로 하는 광주이씨 선대의 세계를 定譜"』하고, 체계화하는
 "공식 선대도"를 작성하였는데 이가 금고정보도』라 한다


 이때부터, 석율양파 만의 시조로 된, 이자성을 시조로한 廣李 근원이
둔촌공 宗中에게 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 오늘이다.


  지금 傳하는 "금고정보도"는 둔촌공 後 廣原君派 後孫이 한음 家로 양자올 때, 가져온 筆寫本』으로,
  以後 광이의 연원 자성鼻祖의 부기의 별보는 광이족보인
 吏判 諱용학序의 계유보, 特進官 諱승재 序의 기미보, 이종욱 都有司 序의 정묘 대동보』등에
이어져 온 것이다..또한 둔촌공가 갑진보 이후 300년이 흐른 오늘, 석율양파에서 논한


문호공 비문을 해석한 현대사가들 대부분이,
광이의 시원이 신라임을 통설로 해석하고 있고,
정곤수 이명징가의 가승과 여말 선초의 8고조도(가승) 풍습 습속에
비추어, 율정공가에 내려온 가승 율정세보는 

적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


다.
 2,000년이 흐른 우리 광이의 역사를  당대의 일시의 일곡의 눈이 아닌
2,000년이 통찰된 눈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금고하여야만 참된 조상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은, 족보와 씨족 사학을 연구하는 기본된 자세이다,


그리고 遁村공가 예참 하원公이 족보를 편수할 당시 상황을 분석하여야 한다.


『갑진 수년전부터 우리 광이는 동수의 필요에 의거하여
전 종파와 스스로 광이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후인들이, 전부』  낙하에 처음 모였는데,
둔촌공가는 둔촌공가 대로 〈뜽금 없이 "광이의 후손이다" >라든가 "
주손과 차손이 바뀌는 주장">을 하거나, "


〈서얼로 있다가 사화와 환국을 당하여 목숨을 부지한 후생의 후손">이
 선대 가장을 들고와서 "광이 편입"을 주장하는 등
종인들의 의론이 분분란란하던 때이였고, 이들 중에는 광이에 합보했으나
대부분 척을 당한 때였고,


배척당한 일부의 둔촌 후손들은 타성으로 득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일부는, 그 후에 십운공, 율정후손으로 편입 되기도 한 것이고,
 거기에다가, 율석암공의 후손들이 〈내사령 이자성 비조>까지 들고 나왔으나,
승선 휘하원으로서는 답답하였을 것이다. 예조와 왕을 시강한  경연관을 지낸 하원공의
입장에서는 특신이 불가한 선대 계보를 쉽게 두서할 수가 없었슴은 당연할 것이다
또한 당대 조선 중기에는 3년상이니  기년복이니 9개월이니
왕비의 국상의 상년의 주장에 마다 죽음과 삶이 오가는
예송 논쟁의 환국와 사화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 당파가 치열한 시기이고,
주손가와 장자의 예가 중시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 차로

<하원공은 아예 자른 듯 소위 변설 13조 를 부기한 것>이 아닌가 한다.


라 승선 휘 하원공의 변설 13조에 대한 이론(개인)


   아 아, 갑진 이전부터 전 종가가 동수하자고, 논의를 시작하였는데도,
수년이 흐른 뒤에, 결국 석율양파는 을사보로,
십운공파는 광주의 오위장 찬종과  이해,  장흥의  병사공 순을 중심으로, 가승보로 유지하고,

둔촌의 형제인, 경선고사공와 지군사 보현과공의 후손들이 있었는데
각자의 가승인 바, 이후로 종적을 알수가 없게 되고,


둔촌공가에서는 갑진에 이르러서야
동성보를 인쇄하고 반포하니, 이른바 『갑진보이고 변설 13조인 것』이다.

금석명문이란 것은 옛이나 현금이나.사료적인 가치로 매우 중요한 것이고

오늘날에도 幼學이나 器學이나 大學의 博士나 史學의 교수들도

사가들도, 기와장에 남긴 명문이나 깨어진 비석의 문구 하나를 보고서도

國史의 史實을 修正하는 것이 通例인데, 휘 하원公은 公記共據의 淸청明명한 기록까지

畏考하였으니,

어디에 이를 해석할 꼬,


고려조 사온주부 휘우생의 묘지명에는 우리 광이의 상대계보가 기록 되었다,

사온주부공의 손자  한원군의 신도비는, 용제 이행이 찬명하였고, 이에 세종조 정국공신 수철은 조부 휘우셍의

묘비명을 가한 것인데

300년이 흐른 뒤에 한참 뒤에, 廷臣의 요하라고 하여. 獨祛의 눈으로

묘지의 명문조차 부흘한다는 것은, 學連風의 學者의 자세가 아니지 아니한가 아닌가,


어이, 그뿐인가, 광해군조의 大臣 정군수 이명징은 當代의 學者로,

한음상공 생존시의 한음 상공과 같이, 조정에서, 허허 하하하고 지낸 相臣이고,

정공수 이명징은 광이의 사돈가로 당시의 족보나 가승은 8조고도인 바, 우리 광주이씨 족보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갑진년에 이야기한  것인데,

부흘하는 것은,

승지공 이이만가의 선묘에 기록된 묘지명에 이르기를 또한  이한희 삼익 신한 방귀등의  광이 선대도가 있는데

이를 부인하는 것은 무엇이며,

보편적인 역사 사실의 이씨내력을 기록한, 중종조 名臣 박상의 문호공 신도비에 기록된

신라말과 고려, 고려말과 조선초기 이씨의 사적 사실을, 명종조 동고상공의 인보보다, 100년이 앞선, 역사기록까지도

아 수백이 흐른 갑진년 1720년에 이르러서도

이를  

부흘한 것은 무릇 하기이며,


고려조, 통판공 휘지부터 내려온 율정공가의 광릉이씨 세전 초보를

부정한 것은, 이 또한 무릇 하기여여이며


세보에는 근원이 있으니, 위의 사료에 의한 비조를,

세세상상으로 가서, 세세하하로 이어지는 것은 만물의 법칙이거늘

세보의 두서에 이자성이라고 기록한 것을

비웃음을 살것이라고 부홀하는 것은

무릇 하기이며,


아, 한음상공의 전의구정이란 것은, 당시 집안에서, 보존된 언전과 잡 기록과 가승에, 4대 명휘와 위의 기록이 있었던 바

원래는 두서하여야 하나, 고증에 이르지 못하므로, 나중에 바른 이가 나타나서 이를

정리하여 바로잡기를 당부하는

이를 부기한다는 것인데, 상공은 꼭 두서에 서하라는 유시의 유훈으로

바로 잡으라는 명명한 간절한 유언인데,

마치 한음 상공께서 갑진년 당시에 나타나셔서,  4대 명휘와 이상의 선대등등이 전의함으로  나의 후손들은

절대로 두서하지 말라는 것으로 곡해하는 것으로, 

갑진년의 변설만을 위한 말씀의 행로 홀로 걸어가려는 독곡의 심로인자라, 오, 변설로 ,

한음의 간절한 유지조차 극소하려는 것들은

무릇 기하기라 하기하기이며

변은 무엇이던가


우리나라 아조는, 태조 성상때부터, 세종임금 때에도 한글을 창제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반만년의 역사이고 시조는 단군이다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고

그래 세종 연산조에 이르기 까지 돈반의 서업을 이룬 울울창창의 

경선고사공의 3년어른, 둔촌공의 11극어른, 십운공의 1두어른, 율정공의 2관어른, 섬암탄공의 외명 11현 어른들인데

그래서 우리는 조선을 청업하였고 거울서 고려와 삼국과 단군조선에 이르면,

우리나라 시조는 단군이고, 단군은 지금의 기록은 고려중기에 이르러서야 김부식이 찬한

삼국삼기와 삼국유사에 나오고, 단군신화라고 하며  정사는 없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하듯이,

8천만 겨레들은 신화아닌 단군을 시조로 받드는 것이 생민이고 생민의 도리인데

오, 차라리 전설일지언정 이라도, 비조 이자성을 받들지 말라는 것은

무릇 하하기기이며,


『參考,고대와 삼국에 관한 기록으로 현존하는 것들은, 고려시대 쓴 것이다, 삼국 사기, 삼국유사의 6촌설화도

김부식이 고려중기에 쓴 책임』


족보나 가승은, 족보나 가승의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승을, 신롸하는 것이

대한민국 모든, 유학 반가들의 습속이고

그렇게 이어져 오고 있고,

우리 광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가승과 족보는

고려통판공 휘지와 율정공의 세전초보이고,

고려 사온주부 휘 우생공의 묘지석의 광이 가계도이고,

조선 성종조 눌제 박상의 문호공 비문이고,

조선 명종조의 정곤수 이명징가의 광이선대도,

인데


이보다 300년이 흐르고 흘러서야,  1720년 갑진년에 이르러, 오직 한음 상공시의 경술보만을 보면서

옛날의 귀중하고 엄중한 고기들을 부홀한다는 것은

무릇 여여미미 이며,


오호 통재라,

불초는, 감히  승선 휘 하원공의 변설 13조가 변만을 위한 변설인지라,

일고의 고거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감히 명석하며,

영원하게 글을 남기려 하는 것입니다.

.............................................

시조님의 고를 상상하며

............................


아, 益의 우리는 단굴의 후손들이라,

스스로도 한울- 한빛으로 중천을 이루어, (內史令 李 自成)


높게 누리는 일족,귀한 이름, 신라벌에 창흥하였으니, (君隣龍壽)

홀로서 높이올라ㅡ 방방을 빛내고 (漢希 邦隣)

이제는 돌아와,

만대 자손을 구가한다.(향당존방 任)


근원(益)으로 돌아가도 益의 俊庇康이라,

배움의 學文함이자(文),

정성의 도움을 드리는 정리-誠에 이르르는 것으로(誠祐),

꽃들로 가득한-菻한 정의 엮음(萬代지친의 精神), 굳게 드내인 위엄으로(蔚,謹勅의 遺訓) 산 휘돌아 밝히니(岺.어짐의 遺訓-賢行)

날마다 믿음의 신뢰 청절한 마음,  (信淨)

한산을 중심으로 방방을 다스리노라.

(漢) (唐) (全斯)(漢주를 지배한다. 즉 나라 주인, 唐은 나라란 뜻이다)


오, 李族이여라,

사방에 이르고(四達) ,

의로움의 기백 (義長) , 푸르고 창연하니 (綠生),

이는 어짐을, 근본으로하는 (仁元) , 세상일 빛내 오르는 희망

스스로도 진리에 오르는 핏속같은 유지 (希自天)는

방방곡곡 귀하신 님들(方貴),

힘써 합하여 진리와 도덕의 세상

 기릴 것이다

(養中 養夢, 中 진리, 夢은 理想鄕 道德,鏡의 世上)


.....................................



아 우리 광이가 이렇게 흩어졌나니, 변설 13조는 한음상공의 종계서 같은 훈이 아니고
경술보의 전의에 대한, 변설인 것으로, 후손들에게 나중에,

구정 합일을 바라는, 취지의 글이라고 해석한다


역사적 視眼을 그때의 눈만으로
그렇게만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2,000년을 통찰하는 사적인식으로, 우린, 오늘의 문제를 풀어야한다. 
.아아...그런데 최근. 둔촌공 후손 諱하원 선고의 1700년, 변설 13조을 이유로 하여,
"門中의 一部"에서, 자성 비조의 언급 자체를 禁忌하자는 主張이 있는데
한음 상공의 "전의구정이"라는

 遺訓의 참뜻을 곡해하는 처사라 할 것이다.


10.  소결론 방향
그래서, 不肖는, 자성 비조의
史跡史實과 諺傳의 記錄 先世사적과 資料인 즉


『1. 씨족원류고(氏族源流考), 조종운(趙從耘, 1607∼1683)의
통합보(統合譜) 2. 만성대동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3. 양성지 〈해동성씨록>
4. 홍여하(洪汝河)의〈해동성원 海東姓苑〉 5. 정시술〈제성보 諸姓譜〉6. 홍필주(洪弼周)의
〈동화성보 東華姓譜〉 7.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通譜〉·8. 이용민(李容珉)의 〈성호보휘 姓號譜彙〉9. 이군호의 〈대동씨족고 大東氏族攷〉 10. 노상직의 〈동국씨족고 東國氏族攷〉11. 편자 미상의 〈동국세보 東國世譜〉 〈만성보〉·〈세가보략 世家譜略〉25. 이준경(동고)의 광주이씨 世譜와 諺傳 12. 이덕형(한음)의 庚戌보 序文과 諺傳 13. 이덕형 (한음상공) 生存 當時의 이명징가, 정곤수 家의 廣州李氏 先代圖 14. 갑진 병진보의 序文 凡例記錄 15. 이하원의 변설 13條 24. 갑진 병진보 당시의 율정공 後孫 諱인흥과 석탄공 후손 諱명련의 가승보 16. 갑진 병진보 당시의 율정공파의 廣州李氏 世譜 草案 17. 갑진 병진 계유보 당시의 석암탄공파의 세보 草案 18. 휴징의 先世史積(후에 광이세적으로 발간됨)이휴징(李休徵. 조선조 문신. 학자. 1607~1677). 휴암문고(休巖文庫).광이 잠영세보.경광(耿光, 開天=廣李의 黎明期. 이종원 지음). 19. 이기양가의 복암가장초보, 이기양의 금고정보도 (이극돈 後孫으로 한음家 養子온 자의 필사본) 20.박상의  문호공 신도비문기록 21. 율정공파의 이지 이밀 이손등 기록 22. 계유보 기미보의 서문 범례기록 23. 高麗時代 이전사 이당 이한의 上代 4대 명휘에 대한 석율당 3波의 주장과 이론, 24 이의만가의 광이상대도 기록을 보고



 근거하여 자성 鼻祖說을 밝히고, 그렇다면 新羅初期의 우리 자성 李族의 始原에 對하여는



 1.『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3. 高麗史 4. 帝王韻紀 5. 만성대동보 5. 수당서

6. 삼국지 위지 동이전 7. 동국여지승람. 증보동국여지승람. 輿地勝覽 8. 原三國 연구

9. 新羅초기의 부족장연구. 화백제도. 6촌 설화. 10. 후삼국연구 11. 신라말 각 지방의 호족연구

 12.징기스칸과 滿洲源流考 연구 13. 수당시대의 官職연구 14. 삼국시대언어연구 15. 단군연구 16. 당굴과 종교 무속신앙 17. 고려시대 관직연구 18. 최치원연구 19, 慶州김씨 연구 20. 慶州이씨 연구 21. 奈勿王조 22. 敬順王과 마의태자 23. 회안 24. 철원읍지 25. 칠원읍지 26. 강릉의 경주김씨 27. 新羅末 함안 상주 가야지역의 반란, 호족연구 28. 朝鮮왕조실록, 承政院 일기, 日省錄. 29. 정곤수 족보 30. 유창 족보 31. 서견 족보 32. 신라어 연구 33. 백제어와 고구려어 34. 단군조선기록, 관련/ 제정일치시대의 부족과 국가 35 경주 6村의 족보기록 36. 가야사 37.日本書紀 번역본 38. 개성읍지 39. 조선시대 조선의 취락(일제시대)『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하일식, 혜안, 2006) 『한국(韓國)의 고대사(古代史)』(신형식, 삼영사, 2002)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민』(전덕재, 태학사, 2002) 『신라사(新羅史) 연구(硏究)』(문경현, 도서출판 참, 2000) 『천년의 왕국 신라』(김기흥, 창작과 비평사, 2000) 『한국사. 7, 삼국의 정치와 사회 3 - 신라ㆍ가야』(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97) 『한국(韓國) 고대(古代) 정치(政治) 사회사(社會史) 연구(硏究)』(이기백, 일조각, 1996)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韓國文化史) : 고대편(古代篇). 1』(김철준, 일지사, 1996) 『한국사상(韓國史上)의 정치형태(政治形態)』(이종욱, 일조각, 1993) 『신라(新羅) 정치사연구(政治史硏究) : 신라(新羅)의 왕권변천(王權變遷)과 정치구조(政治構造)를 중심(中心)으로』(이명식, 형설출판사, 1992) 『한국정치론(韓國政治論)』(김인곤, 이문, 1987) 『한국사강좌(韓國史講座) 1, 고대편』(이기백, 일조각, 1982) 『신라(新羅) 국가형성사(國家形成史) 연구(硏究)』(이종욱, 일조각, 1982)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이병도, 박영사, 1976) 「신라 화백회의 연구현황과 중층적 회의구조」(박남수, 『신라문화(新羅文化)』30, 2007) 「신라(新羅)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성격과 그 변화」(전덕재,『역사학보(歷史學報)』182, 2004) 「신라(新羅) 화백회의(和白會議)에 관한 재검토(再檢討)」(박남수,『신라문화(新羅文化)』21, 2003) 「신라(新羅)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인적구성(人的構成)과 운영(運營)」(김희만,『신라문화(新羅文化)』21, 2003) 「6세기 신라(新羅) 귀족회의(貴族會議)와 그 성격(性格)」(신형석,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98, 2002) 「신라(新羅) 상고기(上古期)의 관등(官等)과 정치체제(政治體制)」(김영하,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99ㆍ100, 1997) 「신라 정치체제의 운영원리」(하일식,『역사와 현실』20, 1996) 「신라(新羅) 화백회의(和白會議) 관계기사(關係記事)의 검토(檢討)」(박남수, 『하석김창수교수화갑기념사학논총』, 1992) 「신라(新羅) 화백회의(和白會議)의 기능(機能)과 성격(性格)」(박남수,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국사논총』, 1992) 「신라(新羅) 귀족회의(貴族會議)와 상대등(上大等)」(이영호,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6, 1992) 「신라의 군신회의(群臣會議)와 재상제도(宰相制度)」(이인철, 『한국학보(韓國學報)』65, 1991) 「신라(新羅) 중고기(中古期) 중앙정치조직(中央政治組織)에 대한 연구사적(硏究史的) 검토(檢討)」(노용필, 『충북사학(忠北史學)』3, 1990) 「신라(新羅)의 정치제도(政治制度) 연구(硏究) ∏」(김인곤, 『경북대학교 논문집(論文集)』19, 1985) 「신라(新羅)의 정치제도(政治制度) 연구(硏究) Ⅰ」(김인곤, 『경북대학교 논문집(論文集)』18, 1974) 「대등고(大等考)」(이기백, 『역사학보(歷史學報)』17ㆍ18합집, 1962 ; 『신라정치사회사연구(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1974) 「상대등고(上大等考)」(이기백, 『역사학보(歷史學報)』19, 1962 ; 『신라정치사회사연구(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1974) 「고대(古代) 남당고(南堂考)」(이병도, 『서울대학교-논문집 1 인문사회과학-』, 1954) 「阿利那禮河ト新羅ノ會議」(宮崎道三郞, 『日本法學協會雜誌』26-4ㆍ5ㆍ6, 1908) 「新羅の骨品制と王統」(池內宏, 『滿鮮史硏究』上世 第2冊, 吉川弘文館, 1960) 보고



根源을 찾아가는 것』이다.
후손이 泯沒하나 泯沒하다고 눈을 거둔다면 이는 祖先에 죄를 짓는 것이요,
후손이 현상에 연연하여 연연의 樂에 順應한다면
이 또한 不忠의 길을 간다고 할 것인바, 이를 檢討 해본다는 것이고,
적은 머리로 큰 大同을 다룬다는 것은 어리석음이나,
이또한 祖先을 향하는 孝의 根源일 것이라 自慰하는 것이다.
또한 미물된 이로 어찌 譜의 큰 흐름을 비정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율정을 모셨고 율정학문에 매료한 박상이 아들 문호공 비문을 찬한 것은 이유가 있다
 박상  자는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시호 문간(文簡)  1474년(성종 5년) ~ 1530년(중종 25년)대의
사람으로 그의 인생을 보면 그와 율정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관은 충주 1501년(연산군 7년) 식년시 을과(乙科) 급제,1526년 (중종 21년) 병술(丙戌)
중시(重試) 갑과(甲科) 장원급제함, 고조부 박세량(朴世梁) 증조부 박광리(朴光理) 할아버지
박소(朴蘇) 아버지 박지흥(朴智興) 어머니 서종하(徐宗夏)의 딸,
 첫 번째 부인 : 문화 유씨(文化柳氏) 현령(縣令)유종한(柳宗漢)의 딸 -장남 박민제(朴敏齊) 차남 박민중(朴敏中
 두 번째 부인 : 하동정씨(河東鄭氏) 절충장군 정세(鄭稅)의 딸(모는 廣州이씨 순천부사 이숙명의 딸) 삼남 박민고(朴敏古)
1474년(성종 5년) 광주 송정리에서 박지흥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대전에 살던 박지흥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해
사돈 권람의 천거도 뿌리치고 처가인 광주로 내려온 터였다.
환갑이 넘어 늦둥이로 얻은 박상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보살핌과 8살 터울의 형에게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막 사림 운동이 싹을 내려 전국 8도 곳곳에서 성리학 연구가 일어나던 시기에
 형 박정(朴禎)은 호남 사림으로 일컬어지는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에 있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전라 관찰사로 그를 만나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고는 '나라의 실로 큰 그릇이 되겠다'고 평한 기록도 보인다. 아버지같고 스승같던 형이 요절했지만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3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공부를 계속했다.

1496년(연산군 2년)에 생원(生員)시에 합격해 상경한 후
 교서관[3](校書館) 정자(正字-정9품)가 됐다.
1501년(연산군 7년)에 식년시[4](式年試) 을과(乙科)에 급제,
교서관(校書館) 박사(博士-정7품), 별제(別提-종6품[5]) 등을 역임했다.
1506년(연산군 12년)에 전라도(全羅道) 도사(都使-종5품 외직[6])에 자원,
 연산군을 믿고 전횡을 일삼던 우부리(牛夫里)[7] 를 곤장으로 때려죽이고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숨었다가 곧 중종반정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 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허락받고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정5품,대간(臺諫))이 되자마자 반정공신 책정의 난맥상을 줄기차게 지적했다. 중종으로서는 그들의 추대로 즉위한지라 눌재의 간언이 크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왕실 종친들의 중용을 극구 반대하는 한편 훈구공신들의 전횡에 대해 끊임없이 탄핵 상소를 올린 끝에 결국 임금과 훈구파 모두의 공분을 샀다. 곧 그는 한산군수(韓山郡守-종4품)로 발령됐는데 이는 품계만 올린 사실상의 좌천이었다. 사헌부가 대간(臺諫)을 외직으로 돌리다니 말도 안된다고 임금과의 말씨름을 1년이나 끌자, 중종은 할 수없이 종묘서 령(宗廟署令-종5품), 소격서 령(昭格署令-종5품)등 한직을 내렸고 마음이 상한 눌재는 모친 봉양을 핑계로 임피(臨陂-전북 군산)현감(縣監-종6품)을 자청해 자신이 품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는 궁을 떠나버렸다. 1509년(중종 4년)까지 3년간 현감임기를 채운 그는 고향 광주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1511년(중종 6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정5품)으로 재기용돼
응교(應敎-정4품)를 지냈다.
이때 율정의 학문을 배웠다.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가 죽었다. 담양부사(정3품당하관)로 재직하던
그는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중종반정 직후 폐서인 됐던
단경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했는데, 이게 다시금 중종과 대왕대비인 정현왕후의
진노를 사 오림역(烏林譯-[8])으로 유배당했다. 1516년(중종 11년)에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중용되면서 박상 역시 유배가 풀려, 의빈부 도사(儀賓府 都事-종5품)와
 장악원 첨정(掌樂院 僉正-종4품)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이숙명의 후임으로
순천부사(順天府使-정3품당하관)가 되었으나 모친상으로 곧 사직했다.
 1519년(중종 14년) 3년상을 치르고 눌재공이 의빈 경력(經歷-종4품)으로
중앙정계에 돌아오기 직전,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조광조 등 선비들이
죽거나 다치고 윤원형,윤원로 등 외척 훈구권신들이 더욱 득세하던 때였다.
하루는 훈구권신 심정(沈貞)이 경기도 양천에 소요당을 짓고 크게 벌이는 잔치에
그도 섞여 초대됐다. 한참 자리도 불콰해져 다들 흥들이 올랐건만 눌재공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튀었던 후배들이 생각나 도저히 그 자리에 섞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반산(半山)에 상을 차렸고 가을구렁 추학(秋壑)에 술잔들을 별였구나"라고
 읊었는데 잔치 술자리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다들 심정의 눈치만 살피느라 안절부절했다.
 반산은 왕안석(王安石)의 호요, 추학은 가사도(賈似道)의 호인데 이 둘은 송나라를 망친
 위인들로 당시 선비들 사이에 회자됐었다. 뜻을 모를리 없는 심정은 좋은 자리에 차마
화는 크게 못내고 벌겋게 달아올라, 아직 안달고 뒀던 소요당 현판을 사람을
시켜 태워버렸다. 모친상으로 기묘사화만은 피했던 눌재공은 권신 심정(沈貞)의
원한을 사 결국 외직으로 쫓겨났다.
1521년(중종 16년) 조광조와 함께 화를 입고 의지할 곳 없이 떠돌던 선비들을 자신의 집에서
친히 거둬 보살폈다. 조광조의 동문인 김안국(金安國)과 김세필(金世弼)이 여주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을 알고, 충주목사였던 그는 친구인 여주목사 이희보(李希輔)에게 조곡 200석을
 빌어다가 동문들에게 나눠주고 가을이 되면 다시 쌀을 직접실어다가 조곡갚기를 매년 했다고 한다.
1524년(중종 19년) 외직에서 돌아와 사복시 부정(司僕寺 副正-정3품) 등을 지냈다.
1526년(중종 21년) 병술(丙戌) 중시(重試) 갑과(甲科)에 장원급제했지만, 이미 사림파로 찍힌
 그는 당시 훈구권신들의 눈밖에 나 승진하지 못하고 이듬해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됐다가 그나마도 병으로 낙향했다.
1527년(중종 22년)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가 찾아와 배움을 청하였다. 김인후를 어릴적 보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기동(奇童)치고 끝이 좋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이 사람은 마땅히 잘 마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1530년(중종 25년) 와병 중 사망했다. 생전, 그는, 전라도 幼學(장흥) 사간 廣州인 이원성, 헌납이원화등와
교분이 깊었고 시회도 나누었다. 또한 많은 廣州李氏 유사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그는 율정의 높은 학식에 매료되고, 생전 율정의 학문을 공부하던 사람이었다. 율정은 세종 예종 중종대에
사림과 선비들 사이에서 모범이 되었고 추앙을 받은 학자로 율정가의 문호공 신도비명을 지어 바쳤다.

(향년 55세. 청백리에 녹선됐고, 당대의 문장가로서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사가(四家)로 칭송된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추증돼
 광주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祭享)됐다.
눌재는 훈구파와 사림파 교체기의 시작에서 일생을 사림운동에 전력하고 물심양면으로 그 성공을 도왔다.
특히 단경왕후 신씨 복위에 관한 상소는 강상[10](鋼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라고 생전의
조광조(趙光祖)가 극구 칭찬한 바 있다[11]. 후배였던 퇴계 이황도 그를 가리켜 '원우(元祐)의
완인(完人-명예와 신분에 전혀 흠이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 극찬[12] 했었다. 고양이
전설로도 알려져 있다. 생전 그는 전라도 유학(장흥) 사간 광주인 이원성, 이원화와
교분이 깊었고 시회도 나누었다.
다음은 고양이 일화이다-연산군이 전국 팔도에 채홍사(採紅使)를 내려보내 미녀사냥을 하던 중
나주골에 사는 천민 우부리(牛夫里)의 딸이 간택됐다. 그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게되자
 그 아비 우부리가 그 권세를 믿고 패악과 부정부패를 멈추지 않으니 민심이 날로 흉흉하고
그곳 수령은 물론 전라도 관찰사[14]조차도 그에게 거스르면 목이 달아나는 판이었다.
 서울에서 벼슬을 살던 눌재는 이를 알고 전라도 도사(都事[15])를 자원해 부임한 직후,
인사를 오지 않은 죄라며 우부리와 집안 가속들을 금성관(錦城館-나주 관아) 마당에서
 모조리 곤장으로 때려죽였다. 우부리의 집에서는 장례치를 생각도 못하고 서울로
급히 고변을 하니 연산군이 화가 나 길길이 뛰었다. 왕명으로 금부도사가 사약을 갖고 나주로 내려오던 참이었다.
한편 눌재공은 우부리의 죄상을 글로 조정에 낱낱이 밝히는 동시에 당당히 임금에게
대죄(待罪)를 청하려고 즉시 상경길에 나섰다. 바로 나주목사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전남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밑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야옹"거리며 바지가랑이를 물어채기에 이상히 여겨 오라는대로
따라갔다. 바로 그 때 금부도사가 반대쪽 큰길로 서로 길이 엇갈려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했는데 얼마안가 중종반정으로 그 사건은 불문에 붙이게 됐다(脚註:
중종반정의 성공은 그가 왕의 장인을 때려죽인 이 사건에 조정의 모든 이목이 쏠렸던 덕분이라는 견해도 있다 .))

2천년 명문가 - 學行志節근칙賢行의 명문家
廣州이씨 둔촌공 율정공 석암탄공 십운공系의 合一과  돈수단합에 대하여,

우리 광이는 시조 내사령의 후손들로,  朝鮮조 초기에 석율당의 3파로 이어져 온것으로, 現存 現世에 이르면,
율정공파,둔촌공파,십운공파, 석탄공파, 암탄공파로 크게 5개 支派라고 할수가 있고
이 5개 지파는 朝鮮 500년 내내 합보를 못하고 있다가, 1987년 종욱 도유사님의 결단에 의하여
한음상공의 유지와, 조선말 양명학(실학)의 대학인 기양 선고의 취지와 금고정보도의 뜻에
따라, 비로서 합보 동수한 것으로, 심히 重하고 당연한 合一이라 할 것이다.
회고하건데


 이종욱 도유사님은 

『정묘 대동보에 이르기를
보서(譜書)란 한 씨족(氏族)의 역사(歷史)이며 통서(統緖)를 실증(實證)하고
소목(昭穆)을 명확(明確)히 하며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후손(後孫)으로 하여금
조선(祖先)의 유지(遺志)를 길이 본받아 상호친목(相互親睦)을 도모(圖謀)케 하는 문헌(文獻)이다.
우리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명종조(明宗朝)때 동고상공(東皐相公)께서 비로소
 광능세보(廣陵世譜)를 수즙(修葺)하셨으나 임진병화(壬辰兵禍)로 회신(灰燼)되고
그 후(後) 광해경술(光海庚戌)에 첨추 사온(僉樞 士溫) 시정 사수(寺正 士修)께서
속수(續修)하시고 한음상공(漢陰相公)께서 교열서문(校閱序文)하신
경술보 (庚戌譜)가 제일(第一)오래 된 족보(族譜)이다. 그 후(後) 경종갑진(景宗甲辰)에 교리 승원(校理 承源)께서
수보(修譜)한 갑진보(甲辰譜三卷) 정조(正祖) 병진(丙辰)에 대사간 상도(大司諫 尙度) 선전관 기양(宣傳官 基讓)께서
수집(修輯)한 병진보(丙辰譜七卷) 고종계유(高宗癸酉)에 보국이판 의익(輔國吏判 宜翼)이조참판 용학(吏曹參判 容學)께서
 편찬(編纂)한 계유보(癸酉譜|十七卷)그 다음 기미년(己未年)에 특진관 승재(特進官 承載)께서
편수(編修)한 기미보(己未譜|二十一卷)가 있으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간행(刊行)된
오대보(五大譜)인 것이다.
그런데 기미이후(己未以後)에 우금근(于今近)칠십년(七十年)이 되었으나 저간(這間) 민족(民族)의
수욕(受辱)과 사회(社會)의 혼란(混亂)으로 수족(收族)의 길이 막혀 다만 각 파별(派別)로 수보(修譜)함에 그쳤다.
갑자년(甲子年) 봄에 대종회(大宗會)의 발의(發議)로 첨종(僉宗)의 향응(響應)을 얻어
대동보(大同譜)를 발간(發刊)키로 하니 동관별보(同貫別譜)하는
율(栗) 석(石) 암(巖) 삼파(三派)도 동수(同修)하게 되었음은 다행(多幸)한 일이라 하겠으나,
국토분단(國土分斷)으로 재북족친(在北族親)이 수록(修錄)되지 못하게 됨을
유감(遺憾)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둔촌선조(遁村先祖)께서는 여말(麗末)에 문장지절(文章志節)로 일세(一世)를 울렸고
청백리공(淸白吏公)께서는 소도지변(昭悼之變)때 백인하(白刃下:시퍼런 칼날)에 고마극간(叩馬極諫)으로
백이숙제(伯吏叔齊)와 같은 높은 절의(節義)를 드러내셨으며 석탄공(石灘公)과 암탄공(巖灘公)은
신복(臣僕)을 거부(拒否)하고 청절(淸節)을 지키셨으며 동고상공(東皐相公)께서는 출입장상(出入將相)하여
위태로운 국정(國政)을 반석(盤石)같이 이룩하고, 한음상공(漢陰相公)께서는 임란(壬亂)을 당(當)하여
 재조지공(再造之功)을 세워 청사(靑史)에 빛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조오백년(鮮朝五百年)동안
문학명위(文學名位)가 대(代)를 이어 훤혁(煊爀)하였으며 불억(不億)의 후손(後孫)이
포호사역(布濩四域)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조선(祖先)의 유택(遺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의 우리는 이렇듯 훌륭하신 조선(祖先)을 모신 후예(後裔)들이다. 모름지기 그 유훈(遺訓)과
유지(遺志)를 받들어 윤리(倫理)의 도(道)를 지켜 친목(親睦)의 의(誼)를 두터이 하고
근언신행(謹言愼行)에 힘써 조선(祖先)에게 누(累)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햐 함은 물론(勿論)
나아가 국가사회(國家社會)에 기여(寄與)토록 노력(努力)하는 바 있기를 바라며 끝으로
 경향첨종(京鄕僉宗) 및 보소관계임원(譜所關係任員)여러분의
노고(勞苦)에 사의(謝意)를 표(表)하는 바이다.
             西紀 一九八七年 丁卯 十二月 日
 대동보편찬위원회위원장(大同譜編纂委員會委員長)  종욱(鍾郁)』, 라,



지금 생각하면 생민가들의 족보란 것들이, 조선조 후기에 오면,
일부는 문란하여 없는 조상을 휘휘란란하여
오묘를 꾸민 위서들이 있었으니
순조조 이후 갑오경장 무렵 극심에 달해서 일부 생민가의 족보 상대의
기록들(득성유래, 설화)은 믿을 수 없겠으나,


우리 광이의 전래되온 고기들은,

전부가, 세종조-명종조에 이른 것들,로
광이 호송산, 광주유수의 여식과 생원공의 결혼, 국청사 우물, 최사간과 우의,
신라 내사령과 칠원이족, 고려항거와 정향이속,
팔면비제단 등등은 전부 이어진 기록으로, 우리는,

 족보에 기록 유지하여야하는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世宗조의 통판공부터 成宗조의 율정공 시대까지 내려온
갑진년의 율정공 세전초보와
  (신라 내사령의 이자성과  군린 용수 한희 방린 삼익기록),
마찬가지, 세종조 좌찬성 諱 우생공의 묘지명기록(이한희 광릉 삼익 이하 계,와)
이이만公의 갑진별보 초보의 기록과
정곤수 이명징家의 광주이씨 족보기록과
成宗조 눌제 박상의 문호공 신도비명과  諱 후징과 諱 필행의 先世史蹟등에 기록된
시조 이자성과 諱 군린 용수 한희 선대기록, 신라 칠원이족과 내사령, 고려 항거와 광주일대로 정향이속과 팔면비의
제사기록 등을, 傳說과 諺傳이라고 단정하여, 무시할 것인 가의 문제이다
族譜와 家乘은 당대의 孫이 자신의 上代를 기록하는 신성하고
위엄스러운, 최고의 典章이고, 스스로 上代와 先考를 기록함은 雜態와 異說이 없는
숭고한 마음의 정결에서,
들은대로, 유지대로, 이어져 오는 바를, 가감없이 올리는 것으로,
아, 忌祭에 이르러 俯伏하여 헌 잔의 禮를 올리는 것같이 엄숙한 세사이었을 거늘
아, 나라로 말하자면 史官이 목숨을 무릅쓰고 史草를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거늘,
이제야 눈앞에 나타나고, 國朝 史記에 特申이 없다하여, 무시한다면
그렇다면, 그대의 나라의 역사도 없는 것이고, 그대의 조선은 있엇으되
상고하여, 2000년의 역사 그대의 高麗나 後三國이나 초기 新羅는 없다는
단견이 아니던가,
古來, 동방 해동국의 宗家의 先世는 대개가 "始作의 오묘"에서 기록되나니.
그것이 박혁거세 김알지의 설화같은 것이거늘,
조선이 남기고 천년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오묘는 없는 전기를 사실이 아니다라는 단정으로
어느 문벌보다도 훌륭한 우리 광이의 상고사를 부정한다면,
아, 우리들은 광이가 아니고, 고려말 그대여,석탄암탄 율정
십운 둔촌공의 후손도 아닌 것이다.
있음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따르는 것이, 선세사를 대하는 歷史의 이야기인즉
우리들은, 先祖들이 남기신 중요한 기록들을 믿고,
신라, 자성이족의 후예임을 받들고, 이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先祖를 대하는 諸宗의 자세가 아닌가,


그렇다!
우리 광이는 2천여년 역사를 지닌 忠孝, 근칙賢行의 學行精神을 지닌 명문가이다.
우리 광이의 돈수답합과 후일을 위하여,
조선초 석율당 3파 정신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글을 써서,
考憶顧抄하는 것이다 .즉,『 近間 상론된 광이 선대 계통은 초기 신라 서라벌 부족으로
전래 ,新羅 內史令 자성 군린 용수 동이 한희 광릉삼익(익비 익준 익강)-중시조』로
이어져오는 것『에 대하여
율정공.석암탄공 후손과 대부분들은 위의 소목을 받들고
『둔촌공후손들은, 諱당 할아버지와 둔촌공이후를
세계하여 온 것 』인데, 이에  각파 異論이 합일의 단초를 멀어지게 하므로 ,
후손된 자로 嘆하며 초소하는 것이다.
『제종들이 둔촌공가의 한음과 복암의 유지인 광이 둔촌위시를 이의하는 것이 아닌
그대로 받드는 것으로, 시조는 생민의 시조가 아닌 봉군이나 자작의 직에 현달한 분을 모시는
예이므로 그대로 따르는 것 』
이고,

『다만 우리 광이가 멀리 신라시대로 부터 연원된 내사령 자성이족의 후예임을 밝히어
동방 조선의 명문임을 만고에 극명케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들의 안녕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율정공 후손이든 둔촌공 후손이든 십운공 후손이든 석탄공후손이든 암탄공 후손이든
모두가 소원하는 願이 아니던가, 』


그래서 초기신라- 서라벌 남서부, 분황사지 근처에 발흥하여 부족을 이루어 내물 마립간시대에
호족장, 이사군 이사금 등의 內史令에 오른 自成 李族의 시조님의
사적 사실과 이후의 군린祖 용수祖로 이어지는 上代의 우리 이족의 시대상을 觀照하고,
칠원지방의 豪族에서 高麗에 이르는 사실과 麗末을 추적함으로써,

 우리 廣이가 初期新羅부터 2000년에 이르는 명문가임을
대내외에 더욱 공고히 하고자, 생원공 할아버지 후손 입장에서 和議 원칙하 論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기신라 내사령공 자성이족은 서라벌에서 발흥한 이족으로 시조가 자성이며
이어서 중기의 군린 용수시대의 신라의  호족장 시대를 거치고

이어서 통일신라에 이르고 신라가 망하고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한희 방린의 시대를  광릉 삼익시대의 고려시대를 지나왔으니
  멀리 신라시대의 영웅호걸족 우리 자성이족은
신라가 망하자, 선조의 이름과 내력을 기록하고
서라벌의 신라에서 고려의 기내에 이르는 자성이족의 기록을 팔면등비와 석등과 제단을
만들어 기록, 제사를 지내니,
이른 바 이것이 칠원이족의 제단비 팔면비석이고,
이후 매년 대대로 제사지내고 조상을 추억하며 지내오다가
고려중후기 이르러서야 조정에 출사를 하니
이른바 광릉 삼익의 어른들,
그러므로

우리는

이후의

자손이다.



(자성李族의 수장, 이자성等 동시대 무렵의 사로국 부족연맹장회의, 다음이미지 출처)






2. 상고 신라와 신라말 고려와 고려말의 우리 광이 모습,



이하는 개인의 의견입니다...합일의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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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변설, 현재 광주이씨의 돈목과 모임, 광주이씨 5대 문파는 현재


-석탄공파 암탄공파  두 종회의 사무실과 홈페이지 이름은  "『광주이씨 대종회』"이고,

    모두 『내사령공을 시조』로 모시고, 『이한희를 중시조』,

    『석탄공 암탄공을 파시조 』로 모시고,

    있고,

-한의 후손 율정공 종회의 사무실과 홈페이지 이름은 『광주이씨 대종회이고

      『내사령공을 시조』로, 『녹생을 중시조』『율정을 파시조』로 모시고,


-당의 후손 둔촌공 종회의  사무실과 홈페이지 이름은 

  『광주이씨 대종회 』이고 『생원공 이당을 중시조 』 『둔촌공을 시조 』로 모시고 있다. 


-당의 후손 십운공파 종회의  사무실과 홈페이지 이름은  『광주이씨 십운과공파대종회』이고,

       『십운공 시조비 비문에 이르기를 광주이씨 원시조는 신라내사령 공 이자성이고, 십운공은 그 후손임일 명기하고』 

     『십운공을 파시조 』로 모시고

     『생원공 당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우리 廣李 할아버님의 선계도 先系

*아래에 게시된 시조님 諱 자성 할아버님으로 부터의 世數는 개인 연구 의견이며.대종중과 종회는 廣陵 3익 할배님부터 정확한 世數로 칩니다. 이미 찬성 오겸과 박판서의 만장에서 확인된 바

광이는 원래 칠원 이족이며 칠원의 선고는 자선 李족이며 1대 이자성 (자성족,자성李족)...기원전2 --3세기경 발흥

신라내물왕대에 이르러 내사령(내사의 령. 이사금) 할배님 자성/자성족의 족장으로 전래 되신 분.분황사지(족보가승기록) 부족의 이름과 족장의 이름은 같다는 [國名과 始祖名.부족 명과 부족장 설에 의한 연구결과입니다],자선족의 장... 내내 전래된 이름 래도來途 북방 기마계.철기 족 신라 서남부에 세거,자성족을 이룸,기원 1세기경

내물왕이후에는 일부가 아라가야 역域과 칠토지방에 세거 이자성 李自成 이사금(=옛날에는 부족장의 칭호를 니사금이라 왈.니사 금.님금=님=임금=이사군. 주로 씨족의 장을 일컬은 우리말,계승의 님. 초기 부족長의 칭호.

*시조님 자성 할아버님은 신라 내물왕 이전부터 군집 주거해온 셔블 서남부일대(칠원) 호족의 후예 이며 초기 신라시대 내 령=내사령(이사금)에 벼슬에 이르신 분으로 (신라 셔블 諸족에 의해 내물왕조 시대에 내령= 이사금으로 추대됨.신라는 김알지계로 왕통을 잇게 되는데

자성 할아버님과 자선족의 도움으로 쇠족(김)계가 신라王으로 혈통을 잇게 되고 기여하게 되어 신라왕으로부터 족장지위의

내사령(이사금)과 칠원지역 일대를 통치하는 지방 호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원래 내물왕은 장군 自成의 지원을 받아서 내물의 直系인 눌지를 내물王 다움으로 왕위로 옹립 하려다가.

구야系의 실성王軍과 일대 왕위쟁탈전이 있게 되는데 눌지王軍의

시조 자성 할아버님은 구야 系인 실성王 군에게 시조님이 전사하였으며,

실성王이 재위 얼마후에 죽게되자 다시 내물왕 직계인 눌지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서

size="2">자성 할아버지와 자성 후손들이 눌지왕으로부터 내사령의 벼슬을 추증받고 신라 서남부 칠원일대를 하사받아 통치하면서 내내 중앙 관직과 칠원 성주를 승계하게 됩니다 (成立성립說=성을 추대說=내물설), 이후 대대로 후손은 신라 중앙의 관직과 칠원 성주를 세습함)

남원세적과 성보에 전래되온 우리광이 4대명휘 선계先系에 대하여 설명 
.....................................................................................................
(1)자성족,자선李족.........기원전2 --- 기원2세기경 서라벌의 분황사지 근처
(신라 서남부)에 세거,자성족,기원전 1세기경
=신라 내물왕조에 이자성 李自成 촌주-이사금(신라 내물왕조/ 내사령

이후 대대로 후손은 신라중앙의 관직과 이후 김씨왕조 옹립으로 칠원성주를 세습
(2)자성.......
(3)자성..................
(4)자성..................
(5)자성...................
(6)자성..................................................시대,실성이금
(7)자성...................................................시대.눌지매금(417---458)
(8)자성....................................시대,자비마립간(배부사흔의여,458 - 479)
(9)자성.....................................................시대,소지선공부인의여.479-500
(10).諱군린이君麟이사금,신라22대,지증왕대(재위500 -514),
(11)?....
(12)?....
(13)?....
(14)?....
(15)?....
(16)?....
(17).?諱용수이龍首 이사금,신라29대,태종무열왕대(재위654--)의 인물(기원7세기)
(18)?
(19)?
(20)?
(21)?
(22)?
(23)?
(24)?諱동이同而이사금,부령,당유학,하여 과거에등과,당의의벼슬,귀국하여부령을 지내고.족장에 이르다,
(25)?
(26)?
(27)諱한희이漢希而이사금,신라 경애, 경순왕조에 칠원백,서기910--970,경기  이주,호장,
(28)? 방린 향임 당임 존인 호장.........
(27)? 향임 당임 존인 호장
(30)? 향임 당임 존인 호장
(31)? 향임 당임 존인 호장
(32)? 향임 당임 존인 호장
(33)? 향임 당임 존인 호장
(34)?향임 당임 존인 호장
(35)?.향임 당임 존인 호장.
(36)? 諱한희,漢希,호장,
(37)?.諱한희 방린
(38)?향임 당임 존인 호장...
(39)?향임 당임 존인 호장...
(40)?향임 당임 존인 호장
(41)?향임 당임 존인 호장
(42)諱익준,익비,익강의 삼형제(광릉삼익,광릉삼현,호장,동정),고려 고종대,각각호장과 령사동정을 지냄
********************제1자諱 益俊의 후손......현재실전


********************제2자諱 益庇의 후손*******************************

(43)諱문
(44)諱름.諱위
(44)諱름의 후손--- 諱신,諱정
(45)(1)............제1자諱신--- 諱사달--- 諱직--- 諱금동,의동
.....................................諱금동 --- 諱주
....(1)............제2자諱정--- 諱미장--- 諱탕--- 諱세 --- 諱구--- 諱영


(44)諱위의 후손--- 諱한,諱당

(45)...............제1자諱한--- 諱녹생,인생 ----
(46)....................諱녹생--- 諱밀--- 諱지---諱관인,관의
....................................................諱관인---諱지
....................................................諱관의---諱점,퇴,지
........................諱인생--- 諱돈--- 諱의---諱경빈---諱시생

(45)................제2자諱당---諱인령,원령,희령,자령,천령
(46)(1)....................諱인령---諱조---諱동인
....(1)....................諱원령(집)---諱지직,지강,지유---諱장손,인손,예손,맹손,일원,중원,정원,계원,
...........................諱희령---諱홍순 -- 홍복기 --
....(1)....................諱자령---諱연동---諱봉로--諱두신
....(1)....................諱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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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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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諱 益康의후손*********************************

(43)諱성우---諱잠
(44)諱잠--- 諱전사
(45)諱전사---
(46)諱방귀---(47)諱양중,양몽
.........................석탄공파(1)諱양중 --- ----------------諱우생,수생
...............................................................諱우생--- 수철,석철
..........................................................................諱수철---諱 손,諱 소(개위 명)----휘수언,순언,온언,성언,성윤조,권견,갑엄,諱창언,정승희
..........................................................................諱석철---諱 붕,난--諱사윤,諱사성
................................................................諱수생(춘여)----諱景哲(士賢)----諱 蔭---諱乙富
..........................암탄공파(1)諱양몽--- ----------------諱술생,적생,진손,영손
...............................................................諱술생--- 諱원근--- 諱사방ㅡㅡㅡ諱숙침
..........................................................................諱적생---諱 인민--- 諱사(俠)---諱季命
..........................................................................諱振孫--- 諱潤根--- 諱枝綱,枝直,高常忠,----諱明仁.明良
..........................................................................諱영손--- 諱난근,배근,석근--- 諱신헌, 諱성헌----諱維成,維恒,金龜秀,維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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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광주이씨방
글쓴이 : 광이24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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