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MIN YOUNG,추천시와 추천 문학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김경주

LEE MIN YOUNG 2008. 6. 6. 12:12

(이민영의 추천시-992)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김경주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


시행의 진술을 우리는 삶=이야기라고 하고

이야기가 지닌 말의 사상을 우린 시안(詩眼)이라고 하는데

정과 부정, 정과 반합이 만나려는 의지가

소통의 눈으로 다가가서 이면의 심리를 꿰�고 진리를 의식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삶의 한켠에 있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 

우리는 언제나 뒤에 감추어둔 진실을 가슴에 남겨둔 저축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겉만 알다가 겉으로 죽어가는

호사가들은 '돈의 행복' 이라고 하는데

 돈을 비웃는 듯, 착한 독자는 이를 詩라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슴에 남겨둔 저축을 본다는 것이 바로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는  '김경주' 의 詩다.

詩가 오갈데없이 스치는 반대편에 대한 사유를, 자유롭게 노 젖는 듯 저어가니

비로소 갈망하는 나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깊어서 좋다.

李旻影

 


*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렌덤하우스. 2008) 중

김경주는 서강대학교에서 공부하고, 2003년 '대한매일 신춘문예(서울신문)'을 통하여 등단하였다.

청소년 계간지인 '풋'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5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