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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지도자 1위 율리아 티모셴코 우크라이나 총리

LEE MIN YOUNG 2009. 10. 14. 14:09

율리아 티모셴코 우크라이나 총리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국토를 차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정책 노선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5일 14년 동안 추진해온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의 꿈을 이뤘다. 우크라이나는 나아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 위해 범국가적으로 뛰고 있다. ‘조금 더 서쪽으로…’가 최대 국가 목표가 된 모양새다. 이 같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행보에는 이웃 국가 러시아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드라이브를 이끄는 쌍두마차는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과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다. 2005년 우크라이나 대선 투표 부정 시비로 촉발된 ‘오렌지 혁명’으로 레오니트 쿠치마 전 대통령의 부패 정권을 타도한 후 ‘오렌지 혁명의 잔 다르크’란 별명을 얻은 티모셴코 총리는 국가 발전과 국운이 EU와 나토에 가입하는 데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티모셴코는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책 노선에 반발하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란 무거운 짐까지 가냘픈 어깨에 걸머지고 있다. 티모셴코는 무혈혁명인 오렌지 혁명을 통해 불굴의 혁명 투사로 각인됐지만, 사실 공주 타입에 빼어난 미모를 갖춘 여성이다. 권력과 막대한 부를 한손에 거머쥔 ‘철의 여인’이기도 하다.

티모셴코는 1991년 옛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에 ‘서부 개척시대 자본주의’ 광풍이 일 때 거대한 부를 축적했고, 1996년에 정치에 투신해 오렌지 혁명의 주인공으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국회의원, 부총리, 두 차례의 총리 등 화려한 정치 이력을 쌓으면서 세계적 정치인으로 성장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궁핍했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에 속해 있던 1960년 우크라이나 동부 드니프로페트롭스크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는 등 유년 시절이 평탄치 못했다. 택시 배차원으로 일하던 그의 어머니는 집단주택지 안에 있는 ‘택시기사의 집’으로 불리던 좁은 집에서 친정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란 티모셴코는 뒷날 “그때 작은 돈의 귀중함을 알았고, 자립심을 키웠다”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티모셴코는 열두 살 때인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체조 경기 3관왕이 된 러시아의 올가 코르부트처럼 되고 싶어 체조 연습에 몰두했지만, 평행봉에서 떨어져 발목을 크게 다친 뒤 체조 요정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이때 강철 같은 의지를 기르고 균형 잡힌 몸매를 가다듬었다.

티모셴코는 19세때 공산당 간부 아들 올렉산드르 티모셴코와 결혼한 뒤 이듬해 딸 예브헤니아를 낳았다. 고향의 국립대학에서 산업·노동경제학을 공부하던 그는 육아와 학업을 병행해야했다. 훗날 티모셴코가 정치적 박해를 받던 시절 영국으로 피신한 아버지를 따라간 딸은 현재 영국인 가수와 결혼해 런던에서 살고 있다.

티모셴코는 1984년 대학을 졸업한 뒤 레닌기계제작공장에 취직해 근무하다가 1988년 남편과 ‘터미날’이란 회사를 설립해 비디오와 영화필름 대여업을 시작했다. 이어 일기 시작한 주식 투자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그후 공산당청년동맹(콤소몰)의 한 간부와 함께 ‘우크라이나석유회사’(KUB)를 설립해 총지배인으로서 사업 수완을 익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야심 차게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티모셴코는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사업의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했다. 1995년 ‘우크라이나 통합에너지시스템’(EESU)이란 회사를 창설한 티모셴코는 투르크메니스탄과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수입해 국내 천연가스 시장을 장악했다.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1997년 EESU는 이미 국가경제의 25%를 통제했고 티모셴코의 손에 달려 있는 일자리는 200만개에 달했다. EESU는 ‘국가 안의 국가’란 평가를 들을 만큼 급성장했다. 이때 그에게 ‘가스 공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티모셴코의 정확한 재산 규모는 베일에 싸여 있다. 영국 타임스는 2005년에 약 120억달러로 평가했고, 그의 평전을 쓴 작가 드미트리 포포브와 일리야 밀스타인은 25억∼50억달러 규모로 추산했다. 미국 신문기자 매슈 브레진스키는 티모셴코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110억달러의 부인’이라고 표현했다.

티모셴코의 고향 드니프로페트롭스크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한시대를 풍미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쿠치마 전 대통령, 파블로 라자렌코 전 총리 등 정치 실력자들이 태어난 군수산업 도시였다. 티모셴코 반대파는 그가 이들 ‘고향 마피아’들의 후원에 힘입어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티모셴코는 1996년 국회의원이 된 후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에너지 담당 부총리로 재직했다. 그는 이때 전례없이 강도 높은 업무 추진력을 과시하면서 “내각에서 유일한 남자”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부패 척결에 손을 댔다가 신흥 재벌 세력에 협공을 당한 후 해임되면서 좌절을 맛본다. 그의 정치적 불운은 계속됐다. 2001년 2월에는 가스 수입에 관련된 서류 조작과 밀수 혐의로 체포돼 악명 높은 루캬닙스카 교도소에 투옥되는 고통도 겪었다.

쿠치마 전 대통령 정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려던 그의 노력에 대한 값비싼 대가였다. 그러나 티모셴코는 오렌지 혁명 후 치른 총선에서 승리해 2005년 2월에 사상 첫 여성 총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영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7개월 후 유셴코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것이다. 와신상담하던 티모셴코는 지난해 9월 총선에서 승리했고 다시 유셴코 대통령과 손잡고 연정을 구성하면서 지난해 12월 두 번째 총리직 복귀에 성공했다.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이었다.

티모셴코는 러시아어가 국어였던 옛 소련 시대에 자란 탓에 정치에 입문한 36세 때까지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를 잘 몰랐다. 그는 러시아어만 사용하면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국회의원이 된 후에야 본격적으로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티모셴코는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바지가 아닌 스커트만 착용했다.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최고급 구두와 의상은 그의 상징이었다.

그의 아이콘이 된 특유의 헤어 스타일은 19세기 국민적 영웅으로 불리는 시인 레샤 우크라인카를 모방한 것이다. 뒷머리를 땋아 올리는 이 헤어 스타일은 화려한 공주 타입의 티모셴코를 전형적인 우크라이나 농촌 여성 스타일로 변모시켜 대중들이 친근감을 갖게 했다. 그는 “이 머리를 7분 안에 땋아 올릴 수 있다”고 말한다.

티모셴코는 2005년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 마에단의 혁명 대열에 같이 선 이래 유셴코 대통령과는 정치적으로 협력과 경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나는 유셴코를 두 번 용서했다”고 강조한다. 오렌지 혁명 후 첫 총리직에서 팽(烹)당한 사건을 빗댄 말이다.

키예프의 중견 언론인 세르기스 라흐마니노프는 대통령과 총리이자 혁명 동지였던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유셴코와 티모셴코는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통령(유셴코)은 총리(티모셴코)를 두려워한다”고 간명하게 평가했다.

키예프엔 이런 말이 나돌고 있다.

“어린아이가 악몽을 꾸면 ‘엄마!’ 하고 잠을 깨지만 유셴코 대통령 측근들은 악몽을 꾸면 ‘티모셴코!’ 하고 잠을 깬다.”

티모셴코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말이다.

프랑크푸르트=남정호 특파원 johnnam@segye.com

 


티모셴코 이력

1960년 드니프로페트롭스크 출생

1979년 올렉산드르 티모셴코와 결혼

1984년 드니프로페트롭스크대 경제학과 졸업

1988년 터미날 설립

1991년 우크라이나석유회사 설립

1995년 우크라이나통합에너지시스템 설립

1996년 국회의원 당선

1999∼2001년 에너지담당 부총리

2005년 2∼9월 총리

2007년 12월 총리직 복귀
 
기사입력 2008.02.16 (토) 11:42, 최종수정 2008.02.16 (토)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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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경제4단체장과의 오찬에 참석하고 있다. 2009.7.16

 

2009년 한국 방문

44세의 여성총리가 잡지 엘르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루이 비똥의 보라색 옷에 샤넬 브로치로 장식하고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 서점에 널린 우크라이나 판이니 우크라이나 총리

율리아 티모센코 이른바 '오렌지'혁명의 거리 시위대열 맨 앞에 섰던 단발머리 미인이 바로 그였다.

 친러정부의 부정선거를 무효화 시키고 재선거에서 빅토르 유시첸코를 대통령에 당선 시킨 여인이다.

지난 3월 키에프를 방문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그에게 홀딱 반해서, 티모센코 총리를 '반 러시아, 친 서방 과격주의자'라고

생각하던 종전의 오해를 씻고 돌아갔다고 -. 수년전 그는 "우크라이나 여성지 '타니아'의 표지모델,

'타임' 카버의 인물, '플레이보이'의 표지 모델중 여자라면 당연히 '플레이보이'에 나오길 바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요즘 하루 16시간을 일합니다. 잠자는 시간만 내 시간입니다.화장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제 모습은 자연 그대로입니다. 독자들이 실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 그는 화보촬영을 2개월간 고사하다가

 촬영을 하긴 하되 집무실에서 틈틈이 하자는 조건으로 승락했다.

 총 3시간 쯤 걸린 것인데 사진은 표지를 포함 ,4컷이 실렸다. 루이 비똥,입 생 롤랑,발렌티노 레드등의 옷을 입고 나왔다.

 촬영된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 티모센코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참 행복합니다. 내가 아직 나의 로맨티시즘을 잃지 않은 것 같아서..."

 

2005년 한국방문시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성탄과 새해 인사 모습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 .. 열광하는 군중들 환호에 답하는 율리아 티모셴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