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을 좇는 여정 그 고통과 환희
시사INLive 변진경 기자 입력 2012.10.17 10:081948년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백석의 시가 발표됐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중략)/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믈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학풍 > )
10년 뒤 북한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 문학신문 > 에 백석의 시가 실렸다. "나는 제3인공위성/ 나는 우주 정복의 제3승리자/ 나는 쏘베트 나라에서 나서/ 우주를 나르는 것/ (중략)/ 나는 공산주의의 사절/ 나는 제3인공위성"('제3인공위성', < 문학신문 > ) 파삭파삭 메마른 시인의 언어. 당나귀와 가자미를 사랑하던 시인 백석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백석(1912~1996)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가을, 백석 시의 벌어진 간극을 설명해주는 책이 나왔다. 평전 < 시인 백석 > (흰당나귀 펴냄). 만주와 북한에서 쓴 시를 포함해 백석의 시 전부를 엮은 < 백석 시 전집 > (흰당나귀 펴냄)과 함께 출간된 이 세 권짜리 평전은 익히 알려진 생애와 시 세계에 더해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이후 행적에 한층 더 밀착했다.
저자가 송준 작가(50)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 시절, 막 해금된 재북 작가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고 "평범한 대학생이던 내가 마치 아내와 집과 가족을 잃어버린 듯 절망스러운 감정을 느낄 만큼 강하게 감정이입했다"라는 송 작가는 그 후 20여 년을 백석의 삶과 작품을 추적하는 데에 바쳤다. 자신이 그토록 숭앙하는 백석을 숱한 국내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취급하는 대학 교수들에게 오기가 발동해 '내가 직접 백석을 세계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올려놓겠다'라고 결심했다. 송 작가는 국문학자 대신 기자·추적 탐사 작가 신분으로 중국·러시아·일본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백석의 작품과 사진 그리고 지인들의 증언을 발굴했다.
일찍이 책을 내기도 했다. 그간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지나 펴냄)이라는 백석 일대기를 1994년에 출간했다. 해방 전까지의 삶을 다룬 1·2권에 이어 곧 만주·북한에서의 행적을 담은 3권을 낼 참에, 그간 접촉하던 중국 조선족 취재원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1963년 북한에서 숙청당해 사망했다고 알려진 백석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어렵사리 중국 국경에서 만난 백석의 부인 이윤희 여사도 남편이 함경남도 삼수군에서 가족들과 함께 말년을 보내고 있노라고 전해줬다. 송 작가는 곧바로 이미 나온 책을 절판시키고 3권 출간 계획도 접었다. 북한에서 살아가야 할 백석과 그의 가족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해서였다.
이후 의식적으로 백석을 밀어냈다. "백석을 좋아할수록 인생이 고달파지고, 종교에 빠지듯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던 그 시절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백석의 사망 소식을 이윤희 여사와 아들의 편지로 접했을 때도, 국내 국문학계에서 봇물 터지듯 백석 연구 논문이 쏟아질 때에도, 그간 수집해놓은 자료가 알게 모르게 널리 퍼지는 걸 보면서도 다시 예전의 그 길로 나서지 않았다.
반년 만에 이뤄진 평전 출간
송 작가를 다시 백석의 길로 불러낸 건 뜻밖의 사람들이었다. 충남 천안에서 백석이 좋아 백석 시를 함께 읽고 공부하던 중년의 4인방(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이 끝내 백석 연구자 송 작가를 수소문해 찾아간 것이다. 올해 4월,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부산의 한 병실에 누워 있던 송 작가에게 '과거의 송 작가를 닮은' 남자 넷이 책 복간을 권했다. 이미 발표된 1·2권 원고와 십수 년간 창고 속에서 잠자던 3권 원고를 묶어 반년 만에 뚝딱 책이 나왔다.
< 시인 백석 > 에서는 '시인' 백석뿐 아니라 영어 교사, 연극 총감독, 축구부 감독, 기자, 번역가, 아동 문학가 백석의 면모를 두루 보여준다. 다방면에 능했던 백석의 전 생애를 훑은 덕이다. 백석의 시·산문뿐 아니라 < 조광 > 편집자 시절,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 시절, 만주 안동세관 세무 공무원 시절에 그를 만난 백석의 제자, 이웃, 직장 동료에게서 얻은 증언이 평전의 튼실한 기초가 되었다.
특히 백석이 월간종합지 < 조광 > 재직 시절 필명으로 실은 취재기 형식의 글들은 관찰력 뛰어난(백석은 일본 청산학원 유학 시절 신상조사서에서 자신의 장점이 '관찰과 명예'라고 적었다) '기자' 백석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슬어지는 승방의 모던이즘'은 사원에서 사이비 여승들이 술과 웃음을 파는 세태를 기록하기 위해 백석이 직접 손님으로 가장해 일종의 위장 잠입 취재를 벌여 얻은 결과물이고, '세궁민이 두드리는 눈물의 눈-검은 포렴의 전당포'는 점차 사라져가는 전당포의 모습과 이를 둘러싼 빈민들의 애환을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백석을 가장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준거는 그의 시이다. 송 작가는 1930~1940년대 백석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시를 통해 영감을 얻은 당대 유수 시인들의 기록을 소상히 옮겨놓았다. 김기림 시인은 평론 ' < 사슴 > 을 안고'에서 백석 시집 < 사슴 > 을 "시단에 한 개의 포탄을 던지는 것"이라고 표현했고, 신석정 시인은 '눈 속에 < 사슴 > 을 보내주신 백석 선생께 드리는 한 폭의 수선화'라는 부제를 달고 헌시 '수선화'를 발표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윤동주는 밑줄을 긋고 "그림 같다" "걸작이다"라는 메모를 남겨가며 직접 베껴 쓴 필사본 < 사슴 > 을 읽었다.
평전 < 시인 백석 > 3권에서는 특히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39년 백석의 만주행 이후 행적을 좇아간다.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편적으로 남은 그의 흔적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아동문학 작품과 외국문학 번역물이다. 북한 아동문학지에 '까치와 물까치' '멧돼지' '우레기' 같은 순수 동화시를 발표했고 < 네 발 가진 멧짐승들 > < 물고기네 나라 > 등 창작 동화집도 여럿 발표했다. 1947년부터 1963년까지 5년 동안 작업한 단행본만 50권이 넘을 정도로 매진했던 외국 문학 번역 작품도 백석의 것이라 남다르다. 것부시시, 이즉하야, 등주리, 이리 굴고 저리 굴고, 꺼울어져, 뚤렁뚤렁 등 그만의 평안도 토속 사투리를 섞어가며 옮긴 외국 시·소설 번역물을 두고 송 작가는 "남의 나라 문학을 우리나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라고 평가했다.
백석의 말년 사진을 구했을 때…
백석을 찾는 고단한 여정 속에서 송 작가는 몇 차례 환희를 경험했다. 훗날 남한에서 언론·정치인으로 활동한 백석의 친한 후배 고정훈씨에게서 한국전쟁 전후 백석의 행적을 전해 들었을 때, 북한에서 체류한 소련 작가들에게서 백석의 통역관 시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손주의 과외 교사까지 자처하며 친해지려 노력한 통영 박경련 여사(백석이 '란'이라 부르며 사모했던 여인이다)가 백석에 대해 입을 열었을 때가 그러했다. 특히 일본 청산학원 학적부와 함흥 영생고보 앨범에서 백석의 멋진 사진을 발견했을 때(이제껏 널리 알려진 백석 사진 대부분을 송 작가가 발굴했다) 송 작가는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슬픔도 잊을 정도였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말년 백석의 생애를 뒤지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전쟁 중 남하를 권유하는 후배 고정훈에게 가족과 고향을 버리지 않겠노라며, 다만 "더러운 글을 쓰지 않고 번역만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는 그가 1958년 당성이 약한 작가들을 지방 생산 현장에 보내는 '붉은 편지' 사건으로 삼수갑산 골짜기로 사실상 쫓겨난 이후에 '제2인공위성' '석탄이 하는 말' '사회주의 바다' 같은 건조하고 서글픈 시들을 쏟아내기까지 겪었을 고난을 송 작가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백석의 말년 사진을 어렵게 구해냈을 때, 희열도 느꼈지만 책을 더 이상 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1962년 북한 < 아동문학 > 6월호에 실린 수필 < 이솝과 그의 우화 > 를 마지막으로 백석은 북한 문단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후 1996년 2월15일경 이름 모를 병으로 함경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단 한 편의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이윤희 여사는 "사망 전 백석이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원고를 불태워라'라는 유언을 남겼다"라고 송 작가에게 전했다. "그래도 어딘가에 원고지 뭉텅이를 숨겨놓지는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송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혹독한 감시가 상존하고 펜과 종이마저 귀하던 당시 북한에서 순수 문학을 더 이상 이어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백석의 '잃어버린 34년'은 다음 연구자의 몫으로 남았다.
변진경 기자 /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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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 북한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 문학신문 > 에 백석의 시가 실렸다. "나는 제3인공위성/ 나는 우주 정복의 제3승리자/ 나는 쏘베트 나라에서 나서/ 우주를 나르는 것/ (중략)/ 나는 공산주의의 사절/ 나는 제3인공위성"('제3인공위성', < 문학신문 > ) 파삭파삭 메마른 시인의 언어. 당나귀와 가자미를 사랑하던 시인 백석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흰당나귀 제공 북한 인민증에 붙어 있는 백석의 증명사진(왼쪽). 1980년대 중반에 촬영한 가족사진(오른쪽). 백석 옆에 있는 이가 부인 이윤희씨이고 뒤는 둘째 아들과 막내 딸이다. |
저자가 송준 작가(50)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 시절, 막 해금된 재북 작가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읽고 "평범한 대학생이던 내가 마치 아내와 집과 가족을 잃어버린 듯 절망스러운 감정을 느낄 만큼 강하게 감정이입했다"라는 송 작가는 그 후 20여 년을 백석의 삶과 작품을 추적하는 데에 바쳤다. 자신이 그토록 숭앙하는 백석을 숱한 국내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취급하는 대학 교수들에게 오기가 발동해 '내가 직접 백석을 세계 최고의 시인 반열에 올려놓겠다'라고 결심했다. 송 작가는 국문학자 대신 기자·추적 탐사 작가 신분으로 중국·러시아·일본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백석의 작품과 사진 그리고 지인들의 증언을 발굴했다.
일찍이 책을 내기도 했다. 그간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지나 펴냄)이라는 백석 일대기를 1994년에 출간했다. 해방 전까지의 삶을 다룬 1·2권에 이어 곧 만주·북한에서의 행적을 담은 3권을 낼 참에, 그간 접촉하던 중국 조선족 취재원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1963년 북한에서 숙청당해 사망했다고 알려진 백석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어렵사리 중국 국경에서 만난 백석의 부인 이윤희 여사도 남편이 함경남도 삼수군에서 가족들과 함께 말년을 보내고 있노라고 전해줬다. 송 작가는 곧바로 이미 나온 책을 절판시키고 3권 출간 계획도 접었다. 북한에서 살아가야 할 백석과 그의 가족에게 누를 끼칠까 염려해서였다.
ⓒ시사IN 백승기 백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된 평전과 시 전집. |
반년 만에 이뤄진 평전 출간
송 작가를 다시 백석의 길로 불러낸 건 뜻밖의 사람들이었다. 충남 천안에서 백석이 좋아 백석 시를 함께 읽고 공부하던 중년의 4인방(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이 끝내 백석 연구자 송 작가를 수소문해 찾아간 것이다. 올해 4월,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부산의 한 병실에 누워 있던 송 작가에게 '과거의 송 작가를 닮은' 남자 넷이 책 복간을 권했다. 이미 발표된 1·2권 원고와 십수 년간 창고 속에서 잠자던 3권 원고를 묶어 반년 만에 뚝딱 책이 나왔다.
< 시인 백석 > 에서는 '시인' 백석뿐 아니라 영어 교사, 연극 총감독, 축구부 감독, 기자, 번역가, 아동 문학가 백석의 면모를 두루 보여준다. 다방면에 능했던 백석의 전 생애를 훑은 덕이다. 백석의 시·산문뿐 아니라 < 조광 > 편집자 시절,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 시절, 만주 안동세관 세무 공무원 시절에 그를 만난 백석의 제자, 이웃, 직장 동료에게서 얻은 증언이 평전의 튼실한 기초가 되었다.
특히 백석이 월간종합지 < 조광 > 재직 시절 필명으로 실은 취재기 형식의 글들은 관찰력 뛰어난(백석은 일본 청산학원 유학 시절 신상조사서에서 자신의 장점이 '관찰과 명예'라고 적었다) '기자' 백석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슬어지는 승방의 모던이즘'은 사원에서 사이비 여승들이 술과 웃음을 파는 세태를 기록하기 위해 백석이 직접 손님으로 가장해 일종의 위장 잠입 취재를 벌여 얻은 결과물이고, '세궁민이 두드리는 눈물의 눈-검은 포렴의 전당포'는 점차 사라져가는 전당포의 모습과 이를 둘러싼 빈민들의 애환을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백석을 가장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준거는 그의 시이다. 송 작가는 1930~1940년대 백석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시를 통해 영감을 얻은 당대 유수 시인들의 기록을 소상히 옮겨놓았다. 김기림 시인은 평론 ' < 사슴 > 을 안고'에서 백석 시집 < 사슴 > 을 "시단에 한 개의 포탄을 던지는 것"이라고 표현했고, 신석정 시인은 '눈 속에 < 사슴 > 을 보내주신 백석 선생께 드리는 한 폭의 수선화'라는 부제를 달고 헌시 '수선화'를 발표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윤동주는 밑줄을 긋고 "그림 같다" "걸작이다"라는 메모를 남겨가며 직접 베껴 쓴 필사본 < 사슴 > 을 읽었다.
평전 < 시인 백석 > 3권에서는 특히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1939년 백석의 만주행 이후 행적을 좇아간다.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편적으로 남은 그의 흔적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아동문학 작품과 외국문학 번역물이다. 북한 아동문학지에 '까치와 물까치' '멧돼지' '우레기' 같은 순수 동화시를 발표했고 < 네 발 가진 멧짐승들 > < 물고기네 나라 > 등 창작 동화집도 여럿 발표했다. 1947년부터 1963년까지 5년 동안 작업한 단행본만 50권이 넘을 정도로 매진했던 외국 문학 번역 작품도 백석의 것이라 남다르다. 것부시시, 이즉하야, 등주리, 이리 굴고 저리 굴고, 꺼울어져, 뚤렁뚤렁 등 그만의 평안도 토속 사투리를 섞어가며 옮긴 외국 시·소설 번역물을 두고 송 작가는 "남의 나라 문학을 우리나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라고 평가했다.
ⓒ시사IN 백승기 백석은 북한에서 러시아 문학에 몰두했다. 위는 송준 작가가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구한 백석의 번역서들. |
백석을 찾는 고단한 여정 속에서 송 작가는 몇 차례 환희를 경험했다. 훗날 남한에서 언론·정치인으로 활동한 백석의 친한 후배 고정훈씨에게서 한국전쟁 전후 백석의 행적을 전해 들었을 때, 북한에서 체류한 소련 작가들에게서 백석의 통역관 시절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손주의 과외 교사까지 자처하며 친해지려 노력한 통영 박경련 여사(백석이 '란'이라 부르며 사모했던 여인이다)가 백석에 대해 입을 열었을 때가 그러했다. 특히 일본 청산학원 학적부와 함흥 영생고보 앨범에서 백석의 멋진 사진을 발견했을 때(이제껏 널리 알려진 백석 사진 대부분을 송 작가가 발굴했다) 송 작가는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슬픔도 잊을 정도였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말년 백석의 생애를 뒤지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전쟁 중 남하를 권유하는 후배 고정훈에게 가족과 고향을 버리지 않겠노라며, 다만 "더러운 글을 쓰지 않고 번역만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는 그가 1958년 당성이 약한 작가들을 지방 생산 현장에 보내는 '붉은 편지' 사건으로 삼수갑산 골짜기로 사실상 쫓겨난 이후에 '제2인공위성' '석탄이 하는 말' '사회주의 바다' 같은 건조하고 서글픈 시들을 쏟아내기까지 겪었을 고난을 송 작가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백석의 말년 사진을 어렵게 구해냈을 때, 희열도 느꼈지만 책을 더 이상 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1962년 북한 < 아동문학 > 6월호에 실린 수필 < 이솝과 그의 우화 > 를 마지막으로 백석은 북한 문단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후 1996년 2월15일경 이름 모를 병으로 함경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단 한 편의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이윤희 여사는 "사망 전 백석이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원고를 불태워라'라는 유언을 남겼다"라고 송 작가에게 전했다. "그래도 어딘가에 원고지 뭉텅이를 숨겨놓지는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송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혹독한 감시가 상존하고 펜과 종이마저 귀하던 당시 북한에서 순수 문학을 더 이상 이어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백석의 '잃어버린 34년'은 다음 연구자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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