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이 상국
여러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정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 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 판 싸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 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 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칡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
소나무 숲에는-- 이 상국
소나무 숲에는 뭔가 있다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근할 수가 있는가
짐승처럼 가슴을 쓸어 내리며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외치는
소나무 숲엔 누군가 있다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
소나무 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함성처럼 흔들린다
이 땅에서 나 죄 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 모두 들어오라고
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부는 날
저렇게 안 우는 것처럼 울겠는가
사람들은 살다 모두 소나무 숲으로 갔으므로
새로 오는 아이들과 먼 조상들까지
거기서 다 만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밥 짓는 연기들은
거기 모였다가 서운하게 흩어지고
소나무 숲에는 누군가 있다
저물어 불 켜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저렇게 먼 데만 바라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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