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MIN YOUNG,추천시와 추천 문학

광복절의 시/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LEE MIN YOUNG 2008. 8. 27. 23:08

광복절에 듣는 시, 이상화시인의 시.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밤새도록 기뻐서 울었다...1945. 8.15일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시인.독립운동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무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1901. 4. 5 ~1943. 4. 25)시인님 대구 출생, 독립운동가, 시인.

 

선생님은 아버지 시우(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사숙(私塾)에서 공부하고  1916년  중앙고를 나왔다

3·1운동시  대구 학생 운동에 참여 백기만과 함께 거사/ 발각 되어 서울로 도피했고/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동인이 되었다,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1925년 박영희·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에 참여했으며, 1927년 대구에 돌아 왔으나 일제순사의 가택수색을 여러번 당하고, 의열단 이자 대구의 독립투사인 이종암사건시에 동지들과 같이 구금되었다. 중국의 한인 독립군 대장인  친형 이상정 장군 만난 후에 일제 의해 체포되어  5개월 옥살이하고.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1937년~교남 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선생을 했다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권투부를 신설했다. 1940년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위암으로 죽었다. 1946년 경상북도 대구 달성 공원에 상화 시비가 세워졌다.

일제시대 우리나라 일부 문인들을 보면,  스스로 문약하고 지조를 지키지 못하며, 일순의 영달과 영화를 위하여

일제에 아부하고 부왜한 시인/ 문인들이 더러 있었는데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선생이야 말로 시인이시다---이민영.

 

.

 

해방을 맞아 모두 길거리를 나와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

 



(정세훈 )


 


 

     

상제는 우리 대한을 도으소서 
                  독립부강하야 태극기를 빛나게 하옵시고 
             권이 환연에 떨치어 오천 만 세에
                       자유가 영구게 하소서
                       상제난 우리 대한을 도으소서 

                * 

                       프란츠 에케르트 작곡, 작사자미상.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國歌).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공식 국가로 제정 및 공포가 되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전남 광양 서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군민들. (1945년 8월15일)


 

전국에 메아리진 해방의 기쁨 -  
조국해방은 방방곡곡 어디라 할 것 없이 기쁨과 감격의 물결을 이루게 했다.
사진은 1945년 8월16일 전남 광양읍 목성리에서 주민들이 해방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李坰謨씨 제공)



조국으로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 - 왼쪽 세번째가 법무위원이었던 이시영,  
다음이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순이다.

왜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광화문 네거리으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

 


 

1045년 일제에 해방후 해방 경축 전국 체육대회-종합 경기대회- 1945년 10월27일에
열린 이 대회는 해방 후의 첫 전국 체전이다,..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던 손기정 선수가 해방 경축 전국체전
에서 선수대표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벅차  단상아래서 눈물을 닦고 있다. ...
 
나라가 위태로울때 목숨바쳐 지킨 분들이 애국자입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은 몸보신과 일신의 안위 만을 위해
일제와 협력하고 민족 인사들을 탄압하면서 부와 영달을 꾀했습니다..
정신적 지조란 어떤 압제에도 굴하지않는 용기의 정신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민족 정기를 지키고 내 나라를 배반하지않는 정신이, 용기요,
이 용기가 곧 국방이요. 군기요, 나라 보전하는 일체감 입니다.국기(國基)입니다.
우린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선열의 정신을 추앙하고 계승해야 하며
유약과 굴종에 타협하는 썩어빠진 비굴을. 우리 후손에게 가르켜서는 안됩니다.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 환수...잘한 것입니다.당연한 것입니다.
친일파재산을 환수한다하니 그 후손은 항소하였다군요, 다행히 젊은 판사는 기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나라에 아직도 부패하지 않고 건강한 지성인들이 있음을 만족 합니다.
 이 분들이 나라의 기강과 정기를 지키고
이 나라를 부강케 하리라 믿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라 잃어버린 당시 아픔을 읽습니다.
1945년은 분명 통일된 반도였습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건국에 매달린 우리는, 일제앞잡이들이
건국세력으로 동참한 일부 놈들에 의해 김구 선생이 암살되었습니다.
민족의 정기가 훼손되는 아픔도 겪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존재하며,  명명백백합니다. 반민족행위자 친일파 후손 재산은
전국적으로 샅샅이 뒤져서 끝까지 환수해야 합니다. 친일부왜세력의 후손들은
날 뛰지말고, 역사 앞에 반성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정부는, 단군조선에서 상해임시정부-대한민국에 이르는 민족과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고 이어 가는데 지원과 예산을 아껴서는 안됩니다.
정부의 지표는 영원한 대한민국을 지향하여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정당이나 정권의 소유가 아닌 대한의 것임을 바탕으로 그려가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물러서지않고 나라위해 목숨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은
필사즉생의 군인-투철한 국가관으로 뭉친 장병과 국민입니다.
그것은 5천년 역사가 말해줍니다.....旻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