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MIN YOUNG,추천시와 추천 문학

「교무수첩에 쓴 연애편지」 중에서 / 이정록 『시인의 서랍』(한겨레출판)

LEE MIN YOUNG 2012. 7. 14. 20:02

이정록, 「교무수첩에 쓴 연애편지」 중에서

 
 
 
 
   아버님이 떠나신 다음 해였나요? 제가 고향집에다가 교무수첩을 하나 놓고 왔지요. 새 학기가 되면 참고서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선생님들의 호감을 사려고 교무수첩을 나눠주거든요. 그중 하나를 집에 놓고 왔는데, 어머니가 그곳에다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겁니다.
   어머니의 편지는 정말 아름다운 상형문자이지요. 학교 문턱이라고는 자식들 운동회 때 가본 게 전부인지라, 어머니의 한글에는 거의 받침이 없지요. 어머니의 한글을 볼 때마다 한글 받침 무용론이라도 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제가 군 복무 할 때 받았던 어머니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사라하느 내 아더라.”
   그걸 읽는데 어찌나 눈물이 솟던지, ‘울컥’이란 말을 새삼 깨달았지요. 아버님 편지는 한 통도 없었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실, 어머니한테 연서를 받으실 만큼 아버님께서 잘하신 건 아니잖아요. 알코올중독에, 긴 병치레에, 농사꾼으로는 전혀 안 어울리는 흰 손가락에, 가족보다는 남에게만 베푸는 방향 잃은 성품에, 자식들은 고갤 저었으니까요. 교무수첩이 하늘까지 잘 배달되어, 그곳 술판에서 흰 구름 내려다보며 즐거이 읽으셨으면 합니다. 그럼 다른 술친구들은 부러워서 꺼이꺼이 폭음을 하시려나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 갈수록 아름다워진다는 거예요. 엊그제는 초롱산 건너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대요.
   “큰애야. 아버지가 괜히 술 드신 게 아니다. 난 니 아버지 다 이해헌다. 동생들 셋이나 잃고 술 아니먼 워떻게 견뎠겄냐? 고만큼이라도 살아준 게 난 고맙다. 그래도 막내 고등학교까진 마친 다음에 가셨잖냐?”
 
(중략)
 
   요즈음엔 어머니를 안고 블루스를 추려고 해도 어머니가 착 안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입방아를 놓았지요.
   “어머니, 저한테 남자를 느껴유, 어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아녀, 이게 다 붙인 거여.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미친 놈, 남정네는 무슨?”
   어머니의 볼이 붉어졌지요.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사랑받는 일에서만큼은 정말 아버지가 부러워요.
 
 
 
 
작가_ 이정록 -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정말』, 『의자』, 『제비꽃 여인숙』,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풋사과의 주름살』,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 산문집 『시인의 서랍』 등이 있음.
 
낭독_ 전성태 -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으며, 1994년 『실천문학』에 소설로 등단. 소설집 『매향』, 『국경을 넘는 일』, 『늑대』 등이 있으며, 신동엽창작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함. 현재 문학집배원.
   황혜영 - 배우. 연극 <타이피스트>, <죽기살기>, 등과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하모니> 등에 출연.
 
출전_ 『시인의 서랍』(한겨레출판)
 
 


 

 
   사람 유쾌하기로 치면 이정록 시인만한 이 없습니다. 그이가 노모를 노래방에 모셔다가 블루스를 ‘땡기는’ 풍경이 선합니다. 십수 년 전 그가 제 어머니의 손도 끌어 어머니는 생애 처음 블루스 추는 호강을 누리셨습니다.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뒷날 어머니가 몸져누우셨을 때 이정록 시인에게 받은 선물이 값졌습니다. 세상 글쟁이들이 어머니라는 훌륭한 모어의 세계를 두고 있지요. 이정록 시인은 그 중 각별합니다. 시인이 옮겨놓는 시편들의 팔 할은 어머니입니다. 농사 천재인 이 어머니는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라거나 ‘인생 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속 그늘!’이라고 절창의 말씀들을 척척 해냅니다. 이의순 여사(72세). 그이는 아무래도 아들에게 발굴된 시인입니다. 일전에 그 집 처마로 들었다가 이 유명한 어머니의 말씀을 한 토막 주워 나온 일이 있습니다. 때마침 이웃 노인이 놀러 와서는 시인의 어머니에게 어제는 대문 열어두고 어디를 갔느냐고 채근을 해댔습니다. 동무의 전날 행적이 궁금한 게 아니라 기실 자신이 다녀갔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어머니 왈 “내가 은제 대문 열어두고 댕겨? 우리 집 대문은 못 닫는 사람이 댕겨가믄 그려.” 하시고 말더군요. 그제야 이웃 노인의 얼굴이 환해져서는 다음 화제로 넘어갔습니다. 멀리 돌려서 내놓는 이 말 쓰임새를 작가로서 사랑합니다.
 
문학집배원 전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