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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헌 부사 사흘동안 왜병을 꾸짖고 욕하다가 역시 살해되었다....자료 육군사관학교제공
“죽어도 길은 비킬 수 없다” 14일 새벽부터 벌어진 난전 끝에 정발은 전사하고, 부산진은 함락 당한다. 왜군의 다음 목표는 동래성이었다. 성곽을 수리하고 성 외곽에 커다란 나무들을 빽빽하게 심어 성책을 삼는 등 왜의 위협에 대처했다. 고을사람들도 속속 동원되었다. 제승방략은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수령이 각각의 병력을 동원, 자신의 진을 떠나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적군의 침략에 대처하는 체제. 하지만 이 체제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병력이 집중된 방어지역이 무너지면 속절없이 후방까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왜군은 선발대 100명을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고 항복을 종용한다. 송상현 부사는 일축한다. 겁을 먹고 성을 빠져나간다. 그러면서 군색한 핑계. 부산 해안 방어를 맡고 있던 경상좌수사 박홍(朴泓)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동래성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으로 빠져든 것이다. 송상현 역시 “일단 물러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지만 단칼에 일축한다.
15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다. 궁시(弓矢) 위주의 방어로는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鳥銃)의 화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2005년부터 동래읍성 해자 발굴을 지휘했던 정의도 당시 경남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현 한국문물연구원장)의 해석. 조선인이 느꼈던 조총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총신이 1m가량인 조총은 유효사거리 100~200m, 명중거리 50m였고, 분당 사격 4발에 이르렀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임진동래유사’) 통신사 시절 송상현의 후대(厚待)를 받은 경험이 있는 평조익이 급히 나서 송상현에게 “빨리 피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송상현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조익은 부사의 옷을 잡아당겨 성벽의 빈터를 가리켰다. 그런 뒤 태연히 붓을 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정은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향리(鄕吏) 송백 등 송부사의 핵심 측근들도 모두 살해됐다. 동래향교 노개방과 유생 문덕겸·양조한 등도 함께 순절했다. 왜장도 송상현 부사의 순절에 감동해서 장례를 돕고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는 송상현을 죽인 자를 끌어다 죽였다고 한다. 시체를 거두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경내에서 벗어날 때까지 호위해주었다. 적진에 남겨진 유민들이 울며 송상현의 시신을 전송했다.”(‘선조수정실록’) 칼과 낫, 곡괭이, 심지어는 맨손으로 적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힘 없는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속절없이 적병의 창칼에 스러졌다. 기록에 나오는 사례만 보자.
‘임진유문(壬辰遺聞)’에 따르면 동래부민 김상(金祥)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 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관구를 갖추어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임진유문’) 동래성 전투로 왜군은 참수 3000여명, 포로 5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서정일기·西征日記)’) 조선군 전사자가 약 5000명이라고 했다. 이는 물론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일 것이다. 정말 소름끼치는 살육현장이었을 겁니다.”(조관장) 성 안이 온통 시체로 덮여있어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충렬사지·조공유사기(趙公遺事記)에서’)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명 중 한 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이안눌)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이안눌의 ‘맹하유감사(孟夏有感祠)에서’) 자극받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갔다. 1760년 변박(卞璞)이 개모(改模)한 ‘동래부사순절도(보물 392호)’는 1592년 4월15일의 끔찍한 전투 장면을 묘사해놓고 있다. 하지만 그림은 송상현 부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부분의 일이다. 왜군이 자행한 수많은 백성들의 무자비한 죽음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1592년 4월15일 살해된 이들의 인골을 확인했는데, 그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 비문을 보자.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하철 건설을 위한 공사장에서 다시금 410여 년 전의 참극의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래서 눈도 감지 못했을 20대 여성과, 그리고 왜병의 총탄에 뒷머리를 명중해 하염없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을 5세 미만 유아가 1592년 동래성의 참상을 증언해주고 있다. |
해자에서 확인된 20대 여성의 인골. 왜병이 꿇어 앉아있거나 고개를 숙인
이 여인의 머리를 위에서 두 번이나 칼로 벤 것으로 보인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 제공
기미년 만세 운동과 이를 총칼로 탄압한 일본 헌병대
33인 민족지도자의 회합
교실이 불타고 일터로 나간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데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수업을 받는 소녀의 모습.
원산 시가지 전투.(1951년)
얼음이 둥둥 떠내려 가는 차가운 강물을 건너는 부자의 모습.(1951년 1월)
월남전에 피병된 한국군
국가 치안유지의 경찰의 모습
(동계훈련 중인 국군 병사들 )
사진과 음악제공--국방부. 연합뉴스자료집."딱부리세상-보물섬" (추념시에)
호국보훈의 달, 현충일에, 이민영 시인(전 장교, 단기사관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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