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화초머리와 시인-황진이의 삶 그리고 사랑시
순우리말 화초머리
기생이나 기가 첫경험을 하고 얹는 머리. 또는, 화초를 얹은 여자.技女
극에 나오는 황진이 화초머리 스타일의 모습이다.
극에서는 "삼작 노리개와 화초머리" 등으로 매회 1억원을 호가하는
한복 패션을 보여준다고 한다.
화초머리란 기생은 결혼하지 않기 때문에 첫날밤을 자고난 후,기생이 됐다는 의미로
올리는 머리가 화초머리 라고 한단다. 화초머리 - 기생이 되어 가채를 머리에 올리는 것
이민영의 블로그에도 게재됨 |
미인도(美人圖)
비단에 채색 114.2*45.7cm 간송미술관
풍속화와 함께 혜원 신윤복의 사실주의적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 신윤복의 작품가운데 대작이기도 하려니와 비단 바탕에 고운 필치로 인물화 실력을 한껏 뽐낸 작품이다.
배추잎처럼 부푼 담청 치마, 단이 짧은 저고리, 고개를 숙인 앳된 얼굴, 가느다란 실 눈썹의 고운 눈매, 다소곳한 콧날, 좁은 입 등 조선후기 미인의 조건을 여실히 보여준다.
치마 아래로 한쪽만이 살포시 드러나는 외씨 버선은 절묘한 느낌을 준다.
얼굴의 표정은 마음까지 드러내 보여 주어 초상화를 방불케 한다. 쪽물을 들인 회청색 치마에 받쳐 입은 삼회장 저고리, 그에 조화된 자주색 댕기와 옆구리의 붉은 띠치장은 그 미모를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옷맵시의 아름다움이 한껏 배어 나온다. 여인의 복장과 더불어서 "붉은 삼작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는 자연스러운 자태는 풍속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면서도 기존 왕공 사대부의 권위적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화로서의 예술성이 충만하다.
황진이의 모습은 전해진 것이 없으며 황진이의 모습을 표현할때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황진이의 초상화로 자주 쓰는것 같다.
황진이
본질적 자유혼의 삶을 살고 간 여인 황진이 본명은 진(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 (四書三經)]을 익혀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고,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박연폭포(절승) /서경덕(절윤)/황진이(절색)를 두고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지칭하였다.
황진이를 소설에 등장시킨 작가
이태준, 정한숙, 박종화, 안수실, 유주현, 정비석,
최인호, 김남환, 최정주,김탁환.. 등이고 황진이의 시는 시조가 6수, 한시가 7수 전해진다.
황진이에 대한 기록에는 한음 이덕형의 '송도기이' 허균의 '성옹지소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임방의 '수촌만록' 서유영이 지은 '금계필담'
김택영이 지은 '소호당집' 개성유수를 지낸 김이재의 '중경지'
홍중인의 '동국 시화휘성'등에 황진이에 대한 일화가 전해 지고 있다
[송도기이]에서는 진이의 어미 현금이 18세에 병부교 밑에서 빨래를 하다가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하로여한 사람을 만나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 좋아하여
진이를 낳았다는 출생 비밀이야기,개성유수 송공이 황진이의 노래를 듣고
천재로 평가한 것과, 그의 첩이 절색이라고 질투를 느낀 사실및 송공 어머니의 수연에서
진랑이 화장도 않고 담담한 자세로 나와 국색의 광채를 빛낸 일,
악공 엄수와의 일화, 중국 사신 일행이 황진이를 보고 천하절색으로 평가한 일화.
황진이가 선비들과 놀기를 즐기며 당시 읽기를 좋아하며 서화담을 사모하여
그 문하에 나아가 담소를 나눈 일화 등이 있다.
[어우야담]에도 황진이가 서화담의 학문과 사람 됨됨이를 시험하고자
허리에 실띠를 묶고 대학을 옆에 끼고 나아간 일화와 밤을 틈타
서화담의 침소에 접근하여 마등이 아난을 어루 만지는 것처럼 유혹한 일화가 기록 되어있다
또한 성격이 호탕하고 소탈한 재상의 아들인 한량 이생원과
금강산 유람을 떠난 후 승려에게 양식을 얻은 일화
그리고 한양의 절창 이사종의 노래에 반해 그와 송도에서 3년,
한양에서 3년간 동거했던 일화도 에피소드로 전하고 있다.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임제가 진이의 무덤에서 축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
조정의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성옹 지소록]에서는 노래를 잘한 [사인 이언방]과의 일화,
황진이를 개성 장님의 딸로 묘사하면서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한 것으로 서술했다.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을 거쳐 금성에 와서 고을 원님이 절도사와
잔치를 벌이고 있는 곳에 나아가 헤진 옷과 누추한 행색으로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면서 다른 기생들을 주눅들게 한 일화,
황진이는 " 지족선사가 30년을 면벽하여 수양했으나 그의 지조를 꺾었다
하지만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까이했으나
끝내 선을 넘지 못했으니 실로 성인이로다 라고 한 일화" 진랑이 서화담에게
송도 삼절을 꼽은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기타 [수촌만록]에는 야곡 소세양과의 한 달간 동거 일화가 소개되어 있으며
황진이가 양곡에게 준 율시 '월하정오진'이 기록되어 있으며
[금계필담]에서는 종실 벽계수가 손곡 이달과 황진이를 찾아간 일화가 소개 되어 있으며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기록되어있다.
시인 황진이의 사랑시
애첩처럼 떠나는 2월 --황진이 -이민영 李旻影(2006.0303) 시인[전남여고 동창회 사이회 게시판 기고글] |
황진이의 월야가 -알고 싶어요(이선희 노래 부분)와 한시
1.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 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2.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 주세요
이것은 가수 이선희씨가 부른 ‘알고 싶어요’ 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松都名妓 黃眞伊가 헤어진 연인 蘇世讓을 그리며 읊은 ‘月夜思’ 라는 한시를 번안한 것이다. 현대어로 의역하고 더러는 앞뒤를 바꾸기도 했지만 한 남성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그의 사랑도 확인하고 싶어 했던 황진이의 시 속에 담긴 애틋한 정서를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황진이의 시 ‘월야사’ (이재운 작)를 소개한다.
月夜思
蕭寥月夜思何事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시나요
寢宵轉輾夢似樣 뒤척이는 잠자리엔 꿈인 듯 생시인 듯
問君有時錄妾言 문노니 그대여 때로는 제 말씀도 적어보나요
此世緣分果信良 이승에서 맺은 인연 믿어도 좋을까요
悠悠憶君疑未盡 아득히 그대 생각하다보면 궁금한 게 끝이 없어요
日日念我幾許量 날마다 제 생각 얼마만큼 하시나요
忙中要顧煩或喜 바쁠 때 만나자면 싫어할까 기뻐할까
喧喧如雀情如常 참새처럼 조잘대도 여전히 정겨울까요
(이 시는 황진이의 작품이 아니라 소설가 이재운씨가 주간 조선
역사 뒤집어보기 <청사홍사>에 연작을 위해 이선희 가요
<알고싶어요>의 작시자 양인자 시인님(작곡가 김희갑 선생님의 부인) 양해를 구해
이재운씨가 한문으로 번역하여 게재한 것으로 시의 사연과 주제는 황진이가 소세양에 전하는
사랑시이다 원작 황진이로 잘못 알려짐-이민영시인)
조선 중종조의 기녀이니 500년정도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남녀 간의 그리는 정은 다를 바 없음을 느끼게 한다. 一夫從事할 수 없는 자기의 운명을 깨닫고 스스로 기생이 되기는 하였으나 한갓 探花蜂蝶이 되어 달려드는 같잖은 閑良들의 路柳墻花가 되기는 싫었다. 시와 음률을 아는 풍류남아만을 가려서 사귀었던 황진이가 편력했던 남성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인물은 아마도 陽谷 蘇世讓(1486~1562)대감이었을 것이다.
詩書를 좋아했던 황진이가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며 글씨 또한 松雪體의 대가로 알려진 소세양의 명성을 일직부터 듣고 흠모하여 오다가 吏曹判書까지 지낸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개성을 찾았을 때에 만났으니 연령의 차이는 많았겠지만 높은 정신세계에서 교감했던 그들이었기에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누구와 몇 살 몇 살 때 만났고 누구누구는 몇 번째 남자이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한다. 황진이가 남긴 詩文과 교류했던 인물들의 사적을 더듬어서 연대를 대체로 추정할 뿐이지, 황진이의 生歿年代 자체를 모르는 판에 어떻게 정확한 연령이나 순차를 알 수 있겠는가. 다만 다음과 같은 시에서 양곡대감을 만난 것은 그가 판서를 역임한 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奉別蘇判書世讓 소판서 세양을 받들어 이별한다.
月下梧桐盡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霜中野菊黃 서리 속에 들국화 노랗구나
樓高天一尺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 사람은 취하여 한 없이 마신다.
流水和琴冷 차가운 물소리 거문고소리
梅花入笛香 매화향기 피리와 어울리는데
今日相別後 오늘날 서로가 헤어진 후면
憶君碧波長 그대 그리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
이 시는 황진이가 한 달 동안 사랑을 나누다가 한양으로 돌아가는 소판서 대감을 멀리 배웅하면서 강 가의 한 누각에서 마지막 잔을 나누며 읊은 시이다. 今日相別後 憶君碧波長이라는 끝 구절이 기약 없는 이별의 아픔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떠난 대감은 다시 소식이 없어 ‘月夜思’ 라는 시로서 사무치는 그리움을 나타냈지만 지체 높은 양반은 기생을 다시 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황진이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님을 애초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아! 내 하는 일 좀 보아라. 이토록 그리울 줄을 몰랐더란 말이냐? 계시라고 했더라면 가셨을까 마는 내가 구태여 잡지 않고 보내 놓고서는 이토록 그리워하는 까닭을 나도 모르겠노라.’ 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토록 황진이가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사람이 양곡 소세양이었다면 오직 정신적인 순수한 사랑으로 흠모하고 존경했던 인물은 花潭 徐敬德(1489~1546)이었다. 당대의 高僧 知足禪師마저도 破戒시켰던 황진이로서 마음만 먹으면 정복하지 못할 사내가 없을 것으로 알았지만 아무리 유혹해도 미동도 하지 않던 山林處士 徐花潭에게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고결한 인품에 감복하여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사나이로서 가슴 속에 이는 불길을 억누르느라고 힘겨워했던 인간적인 모습을 다음 두 수의 시조에서 엿볼 수 있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너는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쫓아다니다가 남우일까 하노라 화담 서경덕
‘마음아 너는 어찌하여 항상 젊은 줄만 아느냐. 몸이 늙는데 마음인들 늙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내가 아무래도 마음 쏠리는 대로 쫓아가다가는 남의 웃음꺼리가 될까 걱정이라’ 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또 이렇게 읊조린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萬重 雲山에 어느 님 오리요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서화담
‘마음이 어리석다보니 하는 일이 모두 어리석기만 하다. 이 깊은 산속까지 어느 님이 찾아올까마는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나뭇잎소리에 행여 님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설레임을 나타내고 있어서 화담도 어쩔 수 없이 황진이의 매혹적인 여성미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를 극복하여 깨끗한 애정으로 승화시켰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화담의 속마음을 짐작한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내 언제 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 황진이
‘제가 언제 한번이라도 선생님을 속인 일이 있기에 신의가 없다 하십니까. 달도 다 기운 한 밤에 찾아오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야 전들 어찌 하겠습니까.’ 하면서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한다” 는 화담의 은근한 연정을 넌지시 받아서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를 낸들 어쩌겠느냐‘ 고 체념하는 듯, 속 타는 애정을 간절히 담고 있다.
靑山은 내 뜻이요 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다 황진이
내 뜻은 우뚝 선 산과 같이 변함이 없건만 님의 정은 흐르는 물처럼 스쳐 가는 것인가. 님께서 가신다 해도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산 아래 흐르는 물도 산을 못 잊어 저토록 소리 내어 울며 가는 것‘ 이라면서 자기의 사랑을 다짐하고 스승의 속마음까지도 깊이 헤아리고 있다.
황진이가 깊이 사귀었던 또 하나의 사나이는 浮雲居士 金慶元이었다. 어는 소설에서는 그가 황진이의 첫 사내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부운거사라고 자처한 사람이었으니 아마도 세상사에 뜻이 없고 오직 자연을 즐기며 풍류를 좋아했던 헌헌장부요 방랑시인 이었던 모양이다. 그와 얽힌 두 수의 한시와 한 수의 시조가 전한다.
別金慶元
三世金緣成燕尾 세상에 맺은 인연 아름다운 짝이 되니
此中生死兩心知 생사가 그 중에 있음을 우리만이 알리로다
楊州芳約吾無負 양주에서 맺은 언약 내 어찌 어기랴만
恐子還如杜牧之 두목지 풍채 같은 그대가 걱정이로다.
첫사랑이어서 그랬을까? 멀리 그의 고향 양주까지 따라가서 작별한 모양이다. 죽기 살기로 금석 같이 맺은 인연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고 다짐하면서 나야 그 약속 저버릴 이 없지만
杜牧之(뭇 여성의 우상이었던 당나라의 미남시인) 같은 당신의 풍채가 걱정 된다고 불안한 심사를 나타내고 있다.
相思夢
相思相見只憑夢 우리 서로 만날 길은 오직 꿈길이기에
儂訪歡時歡訪儂 님 찾아 갔더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갔다네
願使遙遙他夜夢 바라건대 이다음의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같은 시간에 떠나 도중에서 마나지이다.
한번 떠난 님은 소식이 없고 꿈에서나 만나려고 찾아가면 그 님도 날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엇갈리지 말고 동시에 출발해서 도중에서 만나자고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안서 김억이 번안한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내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에도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도중에서 만나지고' 란 애절한 노래가사)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하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꿈길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그 님은 영영 소식이 없으니 ‘나는 이처럼 한곳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구름처럼 떠도는 님이니 다시 올 리가 있느냐.’ 고 체념하고 있다. 그래서 못 믿을 것은 사내의 마음이고 못 넘을 것은 양반과 기생의 신분이라 하여 황진이의 남성편력이 시작되었고 지족선사와 화담선생 같은 고승과 처사를 유혹하려는 오기까지 생겼던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던 시절에 宗室의 긍지를 가지고 기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뽐내던 고고한 선비 벽계수를 송도로 유혹하여 시조 한 수로 그를 말에서 떨어지게 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하는 그 유명한 시조가 ‘청산리 벽계수야’ 이다. 일설에서는 벽계수가 먼저 황진이를 유혹한 후에 보기 좋게 뿌리쳐서 망신을 주려고 했다가 도리어 눈부신 미모와 청아한 시조에 매혹되어 그만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말았다고도 한다.
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一到蒼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여간들 어떠리
그런데 그 벽계수가 그 간에는 왕실종친으로서 碧溪守를 지낸 李昌坤이라고 했었는데 근자에 世宗의 曾孫이요 碧溪都正를 지낸 李終叔이라는 새로운 고증이 나왔다. 그의 묘가 원주 문막에 있다며 그의 14대손이라는 분은 벽계수의 落馬說을 부인할 뿐 아니라 도리어 황진이가 벽계도정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읊은 시조인데 뒷사람들이 황진이를 돋보이게 하려고 지어낸 억설이라고 주장한다.
그 외에도 금강산을 함께 유람했던 李生(이름이 전하지 않음) 등 많은 남성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편력에 실증을 느꼈던지 마지막으로 6년 동안을 동거했던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음률의 달인이요 천하명창이었다는 宣傳官 李士宗이다. 당대에 황진이와 비견할 명창은 오직 이사종 뿐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를 한번 만나고 싶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에 전대미문의 계약결혼이 이루어졌다.
먼저 이사종을 따라가서 서울에서 3년을 살고 후엔 황진이가 사는 송도에서 3년을 살기로 작정하였을 뿐 아니라 서울에서의 생활비는 이사종이 대고 송도에서는 황진이가 대기로 했던 그 약속을 그대로 이행해서 만 6년을 살고 깨끗이 헤어졌다고 하니 황진이야말로 이 땅에서 남녀평등을 최초로 이룩해 냈던 여성이요 프랑스의 저 유명한 사르트르Sartre와 보봐르Beauvoir의 계약결혼보다도 400년 앞섰던 자유연애사상을 지닌 신여성이었다 할 것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春風 이불 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송도에서 동거하는 중에도 서울 본가에 올라간 이사종이 좀처럼 내려오지 않아서 애태우는 밤이 많았었나 보다. 독수공방하는 지루한 밤 그 긴긴 시간의 한 토막을 잘라 두었다가 항상 짧게만 느껴지는, 님과 함께하는 밤을 길게 연장하고 싶다는 발상이야말로 황진이다운 열정을 멋지게 표현했다 할 것이다.
황진이 이야기에 빼어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이 白湖 林悌(1549~1587)이다. 그는 황진이보다 한세대 뒤의 사람이었으니 생전에 그를 만난일도 없었으련만 平安道都事가 되어 부임하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혼자 술잔을 들면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紅顔은 어디 두고 白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 하노라
이로 인하여 부임길이 늦어짐으로서 구설수에 올랐던 임백호는 마침내 파직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으니 당대의 문장가요 호방한 시풍으로 명성을 떨쳤다는 선비가 그 수모를 어찌 감내 했는지 고소를 금치 못하지만 그래서 더욱 유명해졌고 그 시조가 오늘날 학교의 교과서에 오르기까지 했으니 그 또한 황진이의 명성에 힘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2004년 남북의 작가들이 제가끔 황진이 소설을 써서 인기를 끌고 올해는 영화계에서 북한 작가 홍석중(홍명희의 손자)의 ‘황진이’를 영화화하고, 방송국에서는 북한의 금강산과 송도의 박연폭포 등을 현지 로케해서 사극 ‘황진이’를 만들어 선 보이니 이른바 시인이자 연주가인 절색의 미인 황진이 붐을 이룬다고 할 것이다
*사료속의 황진이자료
번호 |
자료 |
저자 |
생몰연대 |
성 |
명 |
1 |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
허 균 |
1569-1618 |
|
眞娘/眞 |
2 |
어우야담(於于野談) |
유몽인 |
1559-1623 |
|
眞伊/眞娘 |
3 |
송도기이(松都記異) |
이덕형 |
1566-1654 |
|
眞伊/眞娘 |
4 |
죽창야사(竹窓野史) |
이덕형 |
1566-1654 |
|
眞 |
5 |
수촌만록(水村漫錄) |
임 방 |
1640-1724 |
|
眞 |
6 |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
정재륜 |
1648-1723 |
|
眞伊 |
7 |
조야휘언(朝野彙言) |
김시민 |
1681-1747 |
|
眞娘 |
8 |
이순록(二旬錄) |
구수훈 |
1760 무렵 |
|
眞伊 |
9 |
중경지(中京誌) |
김이재 |
1767-1847 |
黃 |
眞 |
10 |
금계필담(錦溪筆談) |
서유영 |
1801-1874 |
黃 |
眞/眞娘 |
11 |
소호당문집(韶濩堂文集) |
김택연 |
1850-1927 |
黃 |
眞 |
|
사랑의 한국시인-이민영旻影
편자--이민영시인. /우리네 여인의 삼작노리개 해설과 조선시대의 금지된 사랑은
블로그에 게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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