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사랑할때, 글과 글

나는 가야지 / 만추의 연인 문정숙

LEE MIN YOUNG 2009. 1. 10. 13:10

(이민영의 추천 음유시- 만추의연인 문정숙의 시, 나는 가야지)

겨울이 가고 따뜻한 해가 웃으며 떠오면 꽃은 또 피고 아양 떠는데

노래를 잊은 이 마음 비가 개이고 산들바람이 정답게도 불면

새는 즐거이 짝을 찾는데

노래를 잊은 이 마음 아름다운 꿈만을 가슴 깊이 안고서

외로이 외로이 저 멀리 나는 가야지

 사랑을 위해 사랑을 버린 쓰라린 이 마음 다시 못 오는 머나먼 길을

말없이 나는 가야지

 (영화 「꿈은 사라지고」 주제가)

이 曲 "나는 가야지"는 최무룡,문정숙주연의 영화 「꿈은 사라지고」

(1959)에서 女주인공 文貞淑이 부른 曲이다.

남자 주인공은 머지않아 세계올림픽에 출전할 권투선수다. 그에게는 아름답고 청순한 애인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녀는 카바레 여급이었고 그것을 알게된 그는 실의에 빠진 나머지 연습은 고사하고 술로써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코치의 끈질긴 설득과 격려로 마침내 재기한 그는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리스트가 되는데....

'나는 가야지'는 이 영화의 女주인공 문정숙이 직접 불렀고

男 주인공 최무룡은 「꿈은 사라지고」를 불렀다

문정숙은 최은희 조미령과 함께 한국영화 초기 女優 삼인방 이었다.

 

'만추의 여인' 문정숙(1966년)에 대한 펌글 

 

만추의 여인, 문정숙은  [나는 가야지]란 영화 음악 주제가로 직접 불렀다


저 유명한 영화 ‘만추’(이만희 감독)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다.
깊어가는 가을의 공원.쓸쓸한 벤치. 공원엔 낙엽이 딩굴고 바람에 우수수 지고...

바바리 코트 깃을 올리고 벤치에 앉아 누군가 기다리는 우수에 젖은 여인.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만추’를 본 사람들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이 장면은 이 영화가 지닌
매력이자 클라이맥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가 개봉됐던 1960년대에 고등학교 학생들은 영화관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문정숙(文貞淑)씨의 서늘한 눈매,우수 와 정열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는 내 가슴속에도 뚜렷한 각인을 남겼다. 그가 출연한 영화의 스틸 사진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 드문 배우였기 때문이다.‘7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 환풍구 위에 선 마릴린 먼로의 모습 도 강렬하지만 문씨의 경우는 뒷 모습을 담은 한 컷의 사진 만으로도 숨을 멈추게 한 미국의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과 더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새봄이 오는 길목을 ‘만추’의 여인이 떠나갔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문정숙 회고전’을 열려던 참에 주빈이 개막식에 참석도 못하고 간 것이다.
 
‘만추’의 여인에겐 그 것이 더 어울리는 모습일 수도 있겠지만 남은 사람은 그 뒷모습에 또 다시 가슴이 젖는다.
 
문씨의 별세를 전하는 기사들은 그가 1927년 평북 선천에서 태어나 북한의 공훈배우까지 지낸 언니 문정복씨의 영향으로 연극무대에 섰다가 영화에 데뷔해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고 쓰고 있다.
러나 지난 1980년대 초 한 신문인터뷰에서는 400여편에 출연했다고 그 자신이 말한 것으로 나온다.
 
데뷔 작품도 52년 신상옥(申相玉) 감독의 ‘악야’와 56년 유현목(兪賢穆) 감독의 ‘유전의 애수’ 등 각각 다른 기록이 뒤섞여 있다 . 아직 체온이 느껴지는 스타의 기록이 이처럼 부정확한 것 또한 쓸쓸한 느낌 을 안겨준다.



워낙 많은 작품에 출연한 탓으로 데뷔작을 잠시 착각했을 가능성이 없지않다.
그러나 생전에 그녀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작품이 ‘만추’가 아니라 같은 감독의 ‘시장’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만추’는 홍성기(洪性麒) 감독의 ‘실락원의 별’‘애원 의 고백’,이강천(李康天) 감독의 ‘나는 속았다’,권영순(權寧純) 감독의 ‘흙’,이만희 감독의 ‘주마등’‘귀로’‘검은 머리’‘7인의 여포로’ 등 과 함께 “기억되는 작품들” 중 하나로 꼽았을 뿐이다.
 
‘만추’도 ‘시장’ 도 네가필름이 없어져 버려 고인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게 됐지만 그를 다듬 어 낸 이만희 감독처럼 그도 한국영화의 한 신화(神話)가 될 것은 분명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임영숙 대한매일 논설위원. 2000.3.4)



(줄거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혜림은 사흘간의 특별 휴가를 얻어 어머니 산소를 찾는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한 청년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위조지폐범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다. 외로운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몸을 섞고, 일년 후 창경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그 사이 청년은 체포되어 감옥에 끌려가고, 혜림은 모범수로 가석방된다. 약속한 그날, 창경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청년을 기다리는 혜림.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엔 낙엽들만 가득하다.


 
수려하고 짜임새 있는 영상 미학 속에 담겨진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그 후 <육체의 약속>으로 김기영 감독이 리메이크했으며, 1981년 김수용 감독도 리메이크한 바 있다. 또한 사이토 고이치 감독이 <약속>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그해 일본영화 베스트 5위에 오르기도 한 작품이다.

이만희 감독은 단편 같은 단순한 이야기를 밀도 있는 영상과 정감을 쌓아올리는 연출로 감동을 주었다. 이 영화는 대사가 많지 않으며 한 쇼트, 한 쇼트의 영상이 의미를 전달해 준다. 서정민의 카메라는 흑백의 절묘한 톤으로 두 사람의 심리와 성격의 미묘함을 잘 나타냈다. 갯벌의 롱신, 역광으로 비쳐진 갯벌 아낙네들의 모습들, 낡은 폐선과 실루엣, 창경원의 박제실에서 박제가 되다시피 한 그들의 삭막한 심리 표현과 몽타주, 동물원 우리에 갇혀 느린 템포로 왔다갔다하는 낙타의 목마른 표정 등 고도로 짜여진 영상은 관객들을 무거운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다.
 
10월 9일 오후 2시. 부산시 남포동 PIFF 광장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가 기록됐다.
 
<만추>, <돌아오지 않는 해병>등의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긴 고(故) 이만희 감독의 핸드프린팅 행사가 열린 것이다.
 
이 날 행사에는 이만희 감독을 대신해 그의 딸이자 영화배우인 이혜영이 참석해 손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고인과 함께 작업했던 백결 시나리오 작가와 서정민 촬영감독, 영화배우 안성기가 함께 무대에 섰고,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고인의 업적을 읊었다.
 
'핸드프린팅은 거장 혹은 영화에 평생을 바친 분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진행을 맡은 허문영 프로그래머는 다소 소란스러운 행사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핸드프린팅의 의미를 설명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람이 북적대는 일요일 오후, 이 의미 있는 말이 먹힐 리 없었다. 6,70년대에 활약한 이만희 감독을 알 턱이 없는 중,고교생이 대부분이었고, 그를 기리려는 사람들보다 이혜영, 안성기 같은 유명인사들을 보려는 관람객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은 고인의 업적을 기린다는 의도가 무색할 만큼 들뜬 축제분위기 속에 진행된 이 날 핸드프린팅 행사의 장면.


(사진 위) 왼쪽부터 영화배우 이혜영씨, 영화 '만추' 시나리오 작가 백결 선생, '만추' 촬영감독 서정민씨,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 안성기씨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집행위원장과(왼쪽) 이혜영씨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만희 감독은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전쟁 중에 통신병으로 복무하였다.
그는 1956년 안종화 감독 밑에서 조수로 일하며 영화계에 들어선다. 배우 김승호의 추천으로 19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한 그는 62년 느와르 풍의 스릴러 <다이알 112를 돌려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군번없는 용사>, <마의 계단>과 같은 전쟁, 스릴러 등의 장르영화와 <만추>와 <귀로> 같은 드라마를 통해 영화의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성취해 나간다. 70년대 이후 영화제작환경이 악화되지만, 영화 만들기에 집요하게 매달리던 이만희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1975년 4월 3일 <삼포가는 길>의 편집실에서 쓰러진 그는 열흘간 병마와 싸우다 4월 13일 45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배우 이혜영씨의 친아버지다.

은 사라지고 -최무룡

나는 가야지 - 문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