寄 陶隱(도은에게 부치다)
둔촌 이집이 도은 이숭인에게 부친 詩
子安年甚小還似老成翁
高義追前輩新詩繼國風
三年江海謫一日道途通
努力扶王室從今愼厥終
자안(子安)
그대 나이 아주 젊지만 오히려 노성(老成)한 어른 같구려
고의(高義)는 선배를 바짝 따르고
신시(新詩)는 국풍1)을 이었네
강해(江海)에서 삼 년간의 귀양살이 끝
그 하루로 갑자기 길이 트였지.
힘을 다하여 왕실을 부호(扶護)하며
지금부턴
조심 조심 영종(令終)을 이루게나.
註 1) 국풍(國風): 시경(詩經)의 시체(詩體)의 하나.
각 국의 풍속 인정을 읊었다 하여 붙여 진 이름. 사물(事物)의 도리
또는 이치(理致)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9-1392)의 호다.
자는 자안(子安)으로 본관은 성주(星州)다.
1362년(공민왕 11)에 문과급제하였으며 성균관 개창(改創)에는 정몽주(鄭夢 周),
김구용(金九容) 등과 함께 학관(學官)으로 있으면서 조제(條制)를 정하 였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당하고 명나라의 사신이 피살(被殺)되는 등
불상 사가 일어난 것을
해결하고 세공(歲貢)도 감면(減免)받게 하였다. 명나라와 친할 것을 주청(奏請)하다가
귀양가고 1376년에는 정몽주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했다.
1386년 명나라에 정조사(正朝使)로 갔을 때에는 황제(皇 帝)가 공의 재주를 인정해서
관복(官服)과 벼루 금장(金杖) 등을 하사하였고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도 관복을 착용하는 풍속(風俗)을 바로잡았다.
1390년 옥사(獄事)에서 풀려나와 벼슬이 지밀직사(知密直事).
동지춘추관사 (同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정몽주 선생이 살해된 뒤에
그 일당이라 하여 귀양갔다가 음계(陰計)에 의하여 배소(配所)에서 살해되었다.
고려말 성리학의 대유(大儒)로서 시문(詩文)과 외교문서에
밝아 명나라에도 유명했으며
우리나라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 다.
성주(星州)의 충현사(忠賢詞)와 안산서원(安山書院),
개성(開城) 표절사 (表節詞) 등에 제향(祭享) 되었다.
遁村先生遺稿序(둔촌선생유고 서) 글-이민영2002.출처 광주이씨,사이트 에서
.
고려말학자 하륜이 지은
둔촌 유고집의 발문
昔予始見遁村先生于圃隱先生之小軒新脫逆旽之禍
來自南方其貌莊而毅其氣充然而秀奇語琅然而確以
暢予心奇之再見于牧隱先生之草廠先生敬相待移日
予聞其餘論繼而陶隱邀牧隱圃隱遁村設小酌置盆梅
于前作梅花聯句予亦往參席末聞其警句後子移家硯
井洞去遁村龍首山下之草亭不數里贈予菊花詩一篇
子謹和之因幸遂相從之願未幾遁村病而卒厥後十餘
年間圃隱陶隱相繼淪沒而牧隱先生亦且乘化矣獨子
尙在至今每念相從之樂況然如夢中事鳴呼可勝悲哉
三隱詩文皆行于世而遁村獨無之子竊怪焉今其
子刑曺參議之直奉其遺稿來示子曰吾先子欲施所學而
官不克達欲行所志而壽不克永不肖孤所以有終天之慟也
嘗聞立揚顯親孝之終也不肖孤安敢必哉切欲刊此數百篇以傳
諸後使後之尙論之士知吾先子之名請子幸 其券端子聞而益悲之讀
其詩竟日所謂充然而秀琅然而確以暢者悉著于聲律之間古人云詩不可以僞
爲豈虛語哉遁村有三子俱登科以文行著名參議其長也
拳拳以顯父美傳父名爲念其志亦可尙已
永樂八年 庚寅七月日 晉陽浩亭河崙 謹序
지난날 나는 둔촌선생을 포은선생(圃隱先生 정몽주)의 소헌(小軒)에서
처음으로 뵈었는데
선생이 막 역적 신돈(辛旽)의 화(禍)에서 벗어나
남방(南方:영천)에서 올라오신 무렵이었다.
선생의 용모(容貌)는 장중(莊重)하고 강의(剛毅)해 보였으며
기품(氣稟)은 꽉 짜이면서 준수하였고 음성(音聲)은 옥이 구르는 듯하면서
명확하고 유창(流暢)하여 나는 내심 몹시 기이(奇異)하게 느꼈었다.
두 번째는 목은선생(牧隱先生)의 초창(草廠:초막)에서 뵈었는데
목은선생께서는 둔촌선생을 경의(敬意)를 갖고 대하면서
다음날까지 함께 지내시기에
나는 곁에서 그 여론(輿論)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뒤에 곧 도은(陶隱 이숭인)께서
목은[이 색], 포은[정몽주], 둔촌[이 집]을 초대하여
간략한 술자리를 마련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분매(盆梅)를 앞에
놓고 매화(梅花)를 주제로
연구(聯句:한 사람이 한구씩 불러서 한 수를 이룬 시)를 지었는데
나도 말석(末席)에 참여하여
그 분들의 경구(驚句:才氣警發한 글귀, 즉 경인구<驚人句>)를 들었다.
뒷날 나는 연정동(硯井洞)으로 이사했는데 용수산(龍首山) 아래에 있는
둔촌의 초정(草亭)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다.
선생께서 나에게 국화시(菊花詩) 한 수를 지어 주시기에
나도 삼가 화답을 했는데
이로 인하여 다행히도 상종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얼마 후에 둔촌께서는 병으로 세상을 뜨셨고
그 뒤 십여 년 동안에 포은과 도은도 연이어 세상을 떠났으며
목은선생 마저 이승을 하직하고 홀로 나만이 아직껏 남아있다.
이제 와서 매양 지난날 상종하던 즐거움을 생각하면
어렴풋이 꿈속의 일만 같이 느껴진다. 아! 이 슬픔을 어찌할거나!
삼은(三隱:목은, 포은, 도은)의 시문(詩文)은
모두 세상에 행해지고 있는데 둔촌의 시문만이 그렇지 못하여
몹시 안타까워하였더니
이제 선생의 아들 형조참의(刑曹參議) 지직(之直)이
선생의 유고를 안고 와서 내게 보이며 말하기를
겁나의 선인(先人)께서는 배우신 바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벼슬이 높지 못하였고 뜻하신 바를 행하고자 하였으나
수한(壽限)이 길지도 못하였습니다.
불초 고(不肖 孤)는 그 때문에 이 세상에 다시없을 슬픔을 안고 있습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 도리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는 불초한 이 사람이 어찌 감히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나 하겠습니까?
다만 남기신 이 몇 백편의 글을 간행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뒤에 오는 상론지사(尙論之士)로 하여금 선인의 이름을 알게 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오니 바라건대
선생께서 이 책머리에 서문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슬퍼했으며
하루종일 그 시를 읽어보았는데 앞서 말한 그대로 꽉 짜이면서
준수하고 옥을 굴리는 듯하면서 명확하고 유창스러움이 모두
그 성률(聲律:시부詩賦 )속에 나타나 있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겁시란 거짓으로 지을 수는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어찌 허언(虛言)이겠는가?
둔촌께서는 세 아들을 두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참의(參議)는 그 장자(長子)로 정성을 다하여 그 아버지의 미덕(美德)을 드러내고
이름을 전해드리기에 전념(專念)하니 그 뜻 또한 높이 살 만하다 하겠다.
영락(永樂: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8년 (조선조 태종太宗10, 서기 1410)
경인(庚寅) 7월에 진양(晉陽) 호정(浩亭) 하륜(河崙)은 삼가 서하다.
註)
하륜(河崙: 1347-1416)
진양인.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이다.
1365년(공민왕 14) 문과급제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재임시에 신돈(辛旽)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미움을 사서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좋은 치적(治積)을 쌓고 고공좌랑(考功佐郞) 등 여러 벼슬을 거쳐서
첨서밀직사(簽書密直事)가 되었으며
조선조 개국 후에는 좌우 정승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태조실록의 편찬을 지휘하였다.
좌명공신(佐命功臣) 일등(一等)에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계룡산(鷄龍山) 천도를 반대하고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었으며
태조 5년에 가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성공하고 돌아왔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천문지리(天文地理)에도 정통했다.
시호(諡號)는 문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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