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MIN YOUNG,추천시와 추천 문학

고려말 최원도의 고별 시(遁村 에게. 영천 나현에서 )에 대하여/이민영

LEE MIN YOUNG 2009. 2. 28. 21:05

高麗 최원도 詩 (對 遁村)

 

慷慨僞時淚滿襟
-의분과 슬픔으로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流離孝懇達幽陰
-집을 떠나 헤매면서도 효성은 저승까지 다달았네

漢山迢遞雲煙阻
-한산은 멀고 멀어 운현에 막혀 있고

羅峴盤回草樹深
-나현은 回 돌아서 초수(草樹)가 깊구나

天占後先雙馬鬛
-하늘이 선후로 두 무덤을 점하였으니

誰知君我兩人心
-누가  그대와 나 두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으리

願焉世世長如此
-원컨데 세세로 길이 길이 이 같이 하여 
湏使交情利斷金
-모름지기 교정으로 하여금 쇠라도 끊게 하세나

.

 

 


作者는
崔元道이다 (영천인.고려말 學者)
字는 백상(伯常) 호는 천곡(泉谷)이며 이색의 문하 고려 충목왕대에 遁村 李 集과
同傍 進士(진사시라는 과거 동기라는 말)하였다. 이어 공민왕 대에 문과에 올라 판서 대사간등을 지낸 고려 수절신이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후 태종이 다시 대사간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고향 경상도 영천 나현에 은거, 不仕(불사.벼슬하지 아니함)하였다.
 
廣州의 李 集(충목왕대 학자, 최원도와 동방,문과. 판전교시사)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로 공민왕 시절, 친구 이 집이 왕의 면전에서
신돈의 전횡을 탄핵한 일로, 신돈이 집권한 이후에 이집이 화를 입게 되자
아버지(唐)를 업고 경상도 영천 崔사간 元道의 집으로 피난을 갔는데 
이때 친구 崔元道는 이집과 친구의 아버지를 숨겨주고 관가의
감시를 피하며 친구 아버지에 대하여는 공손하고 극진을 다해 친부처럼
효우하였으며 李 唐이 죽자 자기 모친의 묘하에 장사 지내주었다
둘의 우정과 교우는 후에 사림의 의표가 되었으며
각각 사림의 천거로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 詩는 신돈이 죽고 나서 친구 李 集이 수배에서 풀려
서울,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集을 위해서
나현(지금 영천의 지명)에서 지은 전형적인 칠언 漢詩이다
최원도는 유고집 <천곡집>을 남겨 현세에 전한다. 이후 양가는 내리 육백년동안
서로 혼인 통서하기도 하고, 우애스럽게 지냈다.

시의 내용은
朋友之交.離別의 서정,詩壇에는 잘 알려지지아니한 詩이다.
한산은 멀고 멀어 운현에 막혀 있고.
나현은 回 돌아서 草樹가 깊구나....麗末 나현에 한아름의 함박 꽃이
動하는 명작(鳴芍)이다

 

 

 


 영천시 북안면에 위치한 추원재와 나현재

 

광주이씨의  이 당과 영천최씨(영양최씨) 최원도 3형제의 재사가 있다

양가는 매년  같은날 제사를 지낸다

 



     

     

     둔촌과 천곡의 애틋한 우의

    장마철로 접어들면서 후텁지근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이런 날씨에 낚시가 잘 된다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웅장한 규모의 도유못에는 수많은 강태공들이 가족을 동반 고기잡이에 여념이 없었다.

    밋밋한 구릉지를 북쪽으로 넘으면 괴연동에 이르고 서쪽으로 넘으면 대창면 직천리에 이르는 도유리는 도유못에서 발한 수원이 마을 앞을 흐르며 서남쪽은 구릉지로 되어있다. 당리 용계 북리 도리 4개의 부락이 들 또는 물을 경계로 서로 인접하고 있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농산물이 매우 잘된다.

    약 5백여년전에 개척한 도유리는 경주에서 서울로 가는 한 길목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며 도유지는 수량이 매우 많아 북안면 전체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마을 입구에서 안 쪽으로 못의 물을 바라보며 1㎞ 정도 들어가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왕릉 못지 않게 웅장한 규모의 무덤을 만나게 된다. 주변 또한 말끔하게 정비가 잘 되어있다.

    이 곳은 광주(廣州)이씨 대종회에서 시조로 모시는 이당의 무덤이다. 이 무덤에 얽힌 사연은 지난 2001년부터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생활의 길잡이’(이호연과 최원도의 우정이야기)에 실려 있고 일제시대에는 교과서에 ‘진우(眞友)’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둔촌과 천곡의 우정에 대해 일본사람들이 존경하면서 교과과목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들의 소풍이나 자녀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곡(泉谷)은 영천최씨인 원도의 호다. 그는 여말의 사람으로 요승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 땅에 내려와 우거하고 있었다. 둔촌 이집과는 과거 동년생으로 절친한 친구였다. 어느 날 둔촌은 이웃에 살고 있는 신돈의 측근인 채판서란 자에게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 말이 신돈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큰 화를 자초하게 되었다.

    장차 닥쳐올 큰 화를 예견한 둔촌은 연로하신 노부를 등에 업고 영천 땅의 천곡을 찾아 낮에는 숨고 밤이면 산길을 택해 걸었다. 천신만고 끝에 몇 달이 걸려 도착한  천곡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이라 많은 인근주민들이 모여 주연을 베풀고 있었다.

    둔촌 부자는 바깥 툇마루에 앉아 피곤한 몸을 쉬며 천곡을 찾았으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천곡은 반기기는커녕 대노(大怒)하여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소리치며 오히려 내쫓았다.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둔촌은 다시 노부를 등에 업고 정처 없이 그곳을 떠났다.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를 태워야 된다며 둔촌이 앉았다가 떠난 툇마루에 불을 질러 태워 버렸다.

    한편, 둔촌은 천곡에게 쫓겨나 산길을 걸으면서 천곡이 진심으로 자신을 쫓아낸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여 멀리가지 않고 길옆 덤불 속에서 밤을 맞고 있었고 천곡은 둔촌이 노부를 등에 업었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 손님들이 돌아가자 등불을 켜들고 산길을 더듬어 찾아 나섰다. 그는 산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둔촌 부자를 발견하고 서로 얼싸안으며 산을 내려와 밤이 깊은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겼다. 이렇게 하여 4년 간에 걸친 다락방 피신생활이 시작되었으니 그때가 1368년(공민왕 17)이다.천곡은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했다. 식욕이 왕성해졌다며 밥을 큰그릇에 고봉으로 담게 하고 반찬도 많이 담게 해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긴 세월동안 날마다 고봉으로 담은 밥을 먹어치우는 주인의 식욕을 의아히 여긴 여종 제비가 문구멍을 몰래 들여다보고 놀라서 안방마님에게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이 결국 천곡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함구령을 내린다고 과연 비밀이 보장될까? 그러나 그 방법밖에 없어서 식솔들에게 엄하게 주의를 주었다. 만약에 비밀이 새는 날에는 양가가 멸망한다는 주인의 심각한 표정에 여종 제비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말았다. 한문으로 된 기록에는 제비를 연아(燕娥)라고 적고 있다. 그 후 영천에 수색이 시작되어 천곡의 집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둔촌 부자를 쫓아버린 상황을 목격한 동리사람들의 증언으로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인 1369년 둔촌의 부친이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었음은 물론, 장례도 비밀리에 치러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 실로 컸다.

    천곡은 자기의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에 어긋남이 없이 빈염을 하고 자기가 묻히고자 잡아 놓은 자신의 어머니 산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이 곳이 바로 도유리에 있는 광주이씨 시조공 묘소 즉, 광릉인 것이다.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여 유배되었다가 곧 주살되었고 장장 4년에 걸친 피신생활도 끝이 났다. 둔촌이 떠날 때 천곡은 시로써 전별했고 그 시는 지금도 전한다. 둔촌은 그 후 판전교시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로 세월을 보냈고 천곡도 좌사간으로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자고로 우의의 두터움을 말할 때면 관포(管鮑)와 양좌(羊左)를 들지만 둔촌과 천곡의 우의도 오래도록 기릴 만 하다.

    둔촌의 후손들이 산 아래에 천곡의 은혜를 추모하기 위해 보은당(報恩堂)을 지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으며 충비(忠婢) 제비를 잊지 않기 위해 제비의 무덤 앞에 술과 밥을 지어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6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단을 유지하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무덤 일대에는 나현회관 앞에 둔촌선생유적비가, 이당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재사인 추원재,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여 정착한 사간 최원도, 장례원판결사 최형도, 형조참의 최정도 3형제의 단을 수호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은 묘재인 나현재 등이 자리잡고 있다.이 마을에 전하는 둔촌과 천곡의 우정과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자기가 모시는 주인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던 몸종 제비의 이야기,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충노 억수의 무덤, 충과 효에 큰 모범을 보였던 포은·노계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의 우애를 가르쳐준 화북면 횡계리 옥간정의 양수선생, 부부사랑을 몸소 실천한 오원복 노인의 고인돌 무덤, 자양면 충효리에 서린 산남의진의 충과 효…. 죽어서 오히려 더 큰 모범으로 남아 아름다운 이야기로 승화시킨 이 분들의 삶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얻어야 될까?.....<이 내용은 펌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