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MIN YOUNG,추천시와 추천 문학

[스크랩] 유현숙의 시세계 / 홍신선

LEE MIN YOUNG 2010. 1. 15.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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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해와 동침하다 | 은사시나무
원문 http://blog.naver.com/wishyhs/110061741852

○유현숙 시집해설


     솔개와 어머니, 여성적 삶의 두 기표

                     -유현숙의 시세계


                                   홍 신 선

                                                (시인․ 전 동국대 교수)


   1.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범박하게 말하여 그것은 남근중심주의 아래에서의 숱한 금기와 억압들을 헤쳐 가는 일이다. 아니 그 금기나 억압과 싸우며, 자신도 모르게 또 그것에 적응하고 길들여지는 삶일 것이다. 이를테면 출산과 육아와 같은 가족이데올로기에 갇혀 사는 것이나 과도한 순결이데올로기 등에 함몰되는 일들이 그것이다. 이 땅의 여성들은 그 이데올로기와 싸우면서도 결국 그 이념에 길들여진 채 삶을 살아낸다.  특히 모성성으로 불리는 여성의 생산과 육아는 과도한 자기희생과 노동을 제공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그렇다. 여성은 그의 분신인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거나 던져버린다. 흔히 어미로서의, 아니 어머니로서의 삶이라고 알려진 길이다. 길게 말할 나위 없이 그 길은 부덕(婦德) 가운데 하나로 오랫동안 전통사회에서 미화되고 기려진 가치의 세계이기도 하다. 나는 이번 유현숙의 시들을 곰곰 읽으면서 이 같은 어머니로서의 삶이 얼마나 신산하고 고난으로 점철된 것인가를 확인한다. 이는 일찍이 홍윤숙이 말한 바대로 ‘열매를 익히고 모두 다 타버리는 껍질’같은 무한 헌신의 삶인 것이다. 우선 다음 작품을 읽어보자. 


자재암 들어 백팔 배를 드리는 어머니

백 여덟 번 째 이마를 바닥에 대고

머리 위로 내던졌다가 뒤집은 손바닥에는 희고 검은 잔금들이 패였다

한 생 내내 얻었던 것 다 잃고

수심 깊은 주름살만 거머쥐고 상경한 노모다

삐걱거리는 무릎관절과 휜 팔꿈치와 바람에 닳은 이마까지

먼지 나는 일대기를 온 몸으로 받들어 올린 다음에도

꿇어 엎드린 어머니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손금」의 일부


  이 작품의 화자는 어머니와 함께 암자를 찾는다. 그리고 여느 어머니들처럼 암자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를 지켜본다. 마치 풀 샅으로 찍은 스냅사진처럼 기도하는 그 정경은 세부들이 모두 선명하다. 이를테면 손바닥의 손금들마저 또렷하게 들여다보인다는 대목 같은 것이 그것이다. 화자의 이 정치(精緻)한 시선은 어머니의 곡절 있는 사연에도 가 닿는다. ‘한 생 내내 얻었던 것’을 다 잃었다 라든지 손바닥 손금 속으로 소리 없이 흐르는 ‘무진한 물길’이 모두 그 사연들이다. 물론 작품의 겉 문맥에는 시시콜콜 구체적인 사연들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사연들을 싸잡아 함축적인 말로, 비유들로 읽는 이들의 상상에 내맡긴다. 굳이 말하자면 읽는 이들이 그 사연을 나름대로 복원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어떻게 그 사연들을 복원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 복원작업을 깊이 있게 하는 일이 이번 유현숙 시집 읽기의 한 방법이기도 하리라. 왜냐하면 어머니의 그 무진한 물길은 실은 유현숙 자신의 물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사는 일이, 곧 어머니/딸로서의 삶이 그만큼 서로 다르지 않고 닮아있다는 데서도 그렇다. 더 나아가 거기에는 의도적이든 무심결이든 어머니는 모든 딸들의 동일시 대상인 탓도 있다. 일찍이 H. R. 모파상은 소설 「여자의 일생」에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유사하게 반복되는 여성적 삶을 한 원형으로 제시하지 않았던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지구촌 대다수의 여성적 삶은 그런 것이고 이는 남근중심주의사회가 존속하는 한 별반 달라지지 않는 일이리라. 아무튼 이러한 어머니의 무진한 물길은 작품 「아버지의 약장」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 시의 후반부를 읽어보자.


나, 눈 뜨고 누워서 창자가 비어 가는 기척을 듣는다

창밑에 웅크린 어머니도 속이 빈 어미 곰처럼 둥그렇게

몸을 말고 있다


몇 해째 겨울잠이 깊은 저 어둠의 덩어리


굽은 그녀의 등 뒤로 아버지의 약장이 보이고

내 어린 날의 아침빛에 빛나던 색색의 약병들이 가지런하고

저 만큼 걷고 있는 아버지의 좁은 등 뒤에서 와르르 한 생이

부서졌듯

부서진 유리조각들이 어머니의 뒷등에 꽂힌다

나, 중년의 골 패인 등허리에도 날 선 유리조각 몇 개 아프다

     -「아버지의 약장」의 일부


  이 작품을 산문으로 번역하자면 이렇다. 화자는 고향의 어머니를 찾는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딸을 이끌고 예전 집을 들린다. 그러나 그 집은 ‘이젠 우리 집이 아닌’ 기억 속의 한 공간일 뿐이다. 달빛 속으로 난 논둑길을 걸어 모녀는 옛 집을 뒤로하고 지금의 집에 도착한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도착한 집에서의 정황이다. 이 작품에서도 어머니는 「손금」의 경우처럼 ‘둥그렇게 몸을 만’ 어둠의 덩어리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부동의 자세야말로 숱한 의미를 내장한 몸의 언어일 터이다. 딸이면서 화자인 나는 그 몸의 언어를 해독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와 꿈꾸듯 화해로왔던 지난 한 시절을 읽어내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낡았지만 한 때 색색의 약병이 그득했던 아버지의 약장이 상징하는 행복한 시절이 그것이다. 그 시절은 역시 세부가 제시되지 않는다.  화자가 그 세부의 제시가 가져올 시에서의 부정적 효과를 잘 감지하고 있는 탓이다. 지난 세기 30년대 우리 모더니즘의 공이라면 시에서 절제의 미덕을 주장하고 실천한 일일 것이다. 이른바 메마르고 견고한 미학을 성립시킨 일이다. 그 이래로 우리시에서도 절제의 미학은 아주 질 좋은 미덕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의 유현숙의 일련의 시적 태도는 그 미학을 모범생처럼 보여준다. 그것이 어머니와 관련된 시편들에서 우리가 확인한 저 세부가 없는 시적 진술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자신의 삶과 끝없이 동일시되는 어머니의 삶-역으로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서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유현숙 자신의 삶을 따라가 보자.


   2.


  대저 여성의 어머니 되기는 무엇인가. 여성의 생산성은 무엇인가. 지난 날 S. 프로이트는 여성의 신체구조는 운명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생산과 육아가 여성의 피할 수 없는 조건임을 뜻하지만 달리는 여성의 몸이 어둡고 탐험 불가능의 무슨 대륙이 아님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몸의 발견이면서 동시에 여성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자리에서 토해진 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생산을 위한 여성 특유의 신체구조는 남성과는 다른 여러 문화들을 창출해 내었다. 그 문화의 일단을 우리는 유현숙의 적지 않은 시편들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여름저녁 유충의 부화를 예감하는 어미 쇠똥구리이거나 깊은 우물, 아궁이 등으로 여성성을 상징하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어미로서의 남다른 운명을 맞닥뜨리는 일은 초경을 치르는 일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초경을 앓던 내 아랫도리 물빛 검은 도랑에 새벽별들이 쏟아졌다

이따금 유성이 길게 타서 맨 발등에 박히었고

오동나무 아래를 걸어도 그림자가 생겼다

이튿날은 훌쩍 키가 자랐고 가슴이 높아졌고 여드름이 돋았고

나는 다만 열 다섯이었다

    -「초승달」의 일부

 

  누구든 2차 성징(性徵)이 들어나고 사춘기를 맞으면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묻고 발견한다. 그러면서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독자적인 존재로 삶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이 시의 화자에 따르자면 나는 자신의 몸이 곧 욕망의 저수지임을 깨닫고 더 나아가 ‘죄도 없던 죄’를 빌어야한다. 죄도 아닌 죄- 굳이 지칭하자면 원죄라고나 할 그것은 저 프로이트가 말한 여성됨의 운명일 것이다.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사실이지만 초경은 그 운명의 첫 기표이다. 이 기표로부터 여성은 별똥구리로, 바람구리로, 햇볕구리 또는 쇠똥구리로 살아간다.(「쇠똥을 굴리다」) 그것은 한결같게 별똥이나 바람, 또는 햇볕과 쇠똥을 부지런히 ‘파먹고 커서’ 알을 슬고 유충의 부화를 준비하고 이룩하는 삶이다. 모성으로서의 삶인 것이다.

  그런데 그 삶에는 왜 저수지가 있고 깊은 우물이 있으며 또 불이 지펴지지 않는 아궁이들이 있어야 하는가. 이미 말한 바지만 우리가 유현숙의 시들을 읽다보면 이런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위의 「초승달」을 읽다 보면 화자는 열다섯에 ‘물 빠진 저수지’를 만나 번들거리는 욕망을 발견한다. 그것은 결국 여성의 몸이 욕망의 장(場)이며 그 욕망들은 실제 삶에서 다양한 기표들로 실현됨을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화자는 나이 마흔을 넘어서도 초경으로 상징되는 숱한 욕망을 앓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에는 우물이 깊이 감추어져 있다. 그 우물은 네팔의 산골소녀인 루빠 미자르의 몸에도 있고 안마사인 태국 여인의 몸에도 있다. 그러면 이들에게 우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우물을 들여다보며 새벽 다섯시의 공복을 다독여요/ 공복이란 빈 우물이다가 동굴 같은 절망이기도 해요’(「루빠 미자르」)라고 할 때의 절망이며 공복으로 출렁거리는 몸 그 자체이다. 아니 낡은 몸을 해체하고 다시 씻어 조립하는, 그래서 전신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기도 하다(「우물」).  곧,


수직으로 몸을 세우고 앉아 내 몸 속 수 백 마디 매듭을 주물러 풀며

겹겹이 지른 빗장을 허물어요


와 같이 몸을 열거나 또는


사람 속에 묻힌 흰 뼈들을 하나 씩 추려 세워요


와 같은 진술에서처럼 몸을 해체하고 씻기는 공간으로서의 무엇인 것이다. 흔히 원형적 상상력에서 말하듯 물이 출렁이는 그 공간은 재생의 한 과정이자 정화의 현장인 것이다. 이 같은 우물의 한 옆에 역시 아궁이가 있다. 그 아궁이는 한 때 ‘저 혼자 뜨거워지기도 뜨거워진 저 혼자 서럽기도 했던’ 시인의 아랫목 방고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영 불이 지펴지지 않는’ 싸늘한 아궁이로 변모해 있는 것. 그 변모는 이 작품의 화자의 언술 그대로 ‘많이 아픈’ 상태라고 할 것이다(「아궁이」). 이 아픔, 혹은 병듦은 두말할 것 없이 몸이 생생력을 잃어가는 황무화의 한 징표라고 할 것이다. 이는 작품 「폐경기」에서 읽을 수 있듯 ‘폐염전에 핀 소금꽃’같은 정황인 것이다.


폐염전에 피었던 소금꽃이다

꽃 벙그는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이들도 다 자라서 떠난 빈 소금밭에

소금꽃이 서럽다

    -「폐경기」의 일부


  인용한 대목에서 보듯 생생력이 고갈된 이 작품의 폐염전에는 소금꽃만 그득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생명이 꽃 피거나 새들이 날지 않는다. 지난 날 T.S. 엘리엇이 묘사한 황무지의 정경 그대로인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황무한 정황이 서유럽의 정신세계에서 여성의 몸으로 전이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것을 잃고 오체투지한 「손금」의 어머니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한 생 내내 얻었던 것 다 잃고’ 어머니는 깊은 잠에라도 들려는 듯 고요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작품 후반의 겉 문맥 그대로 그 어머니는 ‘풍경을 치고 온 바람’에 고요를 깨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L. 알튀세에 의하면 세상의  뭇 종소리(풍경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울리어 나가며 모든 정신들을, 뭇 생명들을 일깨운다고 한다. 그 일깨움에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던 어머니는 곧 일어서리라. 그러면 생생력이 고갈된 저 몸의 황무화는 무엇인가. 우리의 김선우는 폐경이란 여성 몸의 완성에 다름 아닌 완경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완경에 이르러서야 여성 몸의 우물도 갱도도 때로는 아궁이도 모두 지워진다. 범성주의자인 프로이트식 독법으로 하면 이들은 모두 자궁의 다른 이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워짐은 생생력의 고갈이 아닌 그 주어진 생생력의 위대한 마감이며 완수이다. 그러한 완수와 함께 이제 유현숙의 작품들에는 ‘고요하고’ ‘익어가며’ ‘우려내는’ 일들이 대신 자리 잡는다.  그 일들은 범박하게 관조라고 해야 할 터이다. 이번 시집에서 유현숙은 이상에서 설명한 페미니즘의 여성성 못지않게 이러한 관조적 자세들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 같은 자세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몇 대목을 읽어보자.


1)건창에서 자연발효 시켰다는 수수 십년 된 보이차도 장뇌나무 아래에서 자라며

매운 성질 다 버렸습니다

찔리고 옹이 박힌 시간들이 완강한 제 고집을 버리고 풍화되며 우려져

맑고 깊습니다


2)대추알들 붉게 익고

주둥이 흰 새들 날아와 대추알들 쪼던

새들의 눈빛이 대춧빛으로 익던 때가 있었다

기대어 서면 내가 대추나무이던 때가

대추나무 밑동을 걷어차며 또 내가 걷어차이던 때가

지났다

............(중략)..........

날 저물고 내 안의 빈 마당에 바람 불고

지금은 밑동만 남은 마당 귀퉁이에 돌아와서 후두둑 떨어지는

대추알을 줍는다

내 안에 드리워진 대추나무 그림자가 대춧잎새보다 푸르다  


 윗 시 1)은 작품 「보이차를 마시며」에서, 2)는「점멸기」에서 손쉽게 뽑아 본 대목들이다. 1)은  보이차를 매개로 삼아 ‘매운 성질’ 모두 죽인 뒤의 편안함을 제시한다. 그 편안함은 아마도 ‘바람 차고/ 내 몸 속속들이 얼어 붙는다/ 전신에 박힌 소금 알갱이들 살 속을 파고들어 /오장육부가 쓰다’ 라고 한(「굴비」) 삶의 오랜 신산을 겪은 다음의 마음 상태일 것이다. 살 속 깊이 박힌 쓰디씀도 오래 우러나면 보이차의 청정한 산바람으로 승화한다!  유현숙의 남다른 이 마음의 움직임은 여기서 더 나아가 도원경(桃源境)을 상상한다. 그의 도저한 상상력은 이처럼 미각을 통해 도원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작품 2)에서 화자는 지금 밑동만 남은 대추나무가 있던 옛집에 돌아와 대추알을 줍는다. 그 익은 대추알은 과거 기억을 일깨우는데 그 때 화자는 ‘걷어차고’ ‘걷어차이는’ 이런 저런 지난날 경험을 떠올린다. 여기서 대추알이 익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널리 말하듯 익는다는 것, 또는 성숙한다는 것은 많은 경험이 안으로 축적되면서 앎을 깊고 넓게 확장하는 일이다. 그것도 단순한 양적 팽창이 아닌 경험의 질적 승화를 수반한 확장인 것이다. 그리하여 ‘날 저물고 빈 마당에 바람 부는’ 정황임에도 대추 잎새들은 더욱 푸르게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시 읽기에서 보듯 유현숙은 갖은 신산과 굴곡을 거쳐 그 경험을 우려내고 또 익혀낸다. 이쯤에서 우리는 관조하는 그 밖의 작품들을 읽어가도 좋을 것이다.


  3.


조령 40이 되면 솔개는 발톱과 부리가 닳고 무너진다고 합니다

작은 짐승의 연한 살가죽마저도 찢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마침내 솔개

곧추선 바위벽과 돌의 날 선 모서리에다 주둥이를 발톱을

부딪는 때가 온 것입니다

주둥이가 발톱이 부서지고

날카롭고 단단하던 기억들이 빠져나간 다음에는

새 발톱과 새 부리가 돋아나기까지 웅크리고 기다리는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은 그 솔개 어디에다 제 몸을 눕히고

저 하늘로 솟구쳐 오르던 직상승을

바람 끝을 말며 내리 꽂히던 직하강을 그리워하고 있는지요

춥고 바람 심한 가조 들판으로 걸어 들어가서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텅 빈 하늘을 바라봅니다 

가슴 안에 휘도는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꺾이고 휘청이며 반생을 부렸던 일터에서도 용도 폐기된

깎아지른 절벽 중턱에 매달린 닳고 뭉툭해진 내 내부 들여다 봅니다

닳아 너덜거리는 발톱과 부리 세상 향해 깨뜨리며


갈며

쪼며

굴리며

깃털로 감싸 안으며,

개활지 상공에서 남은 30년도 죽을 힘 다하여 선회 하겠습니다

    -「귀향」 전문


  이 시대에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듭 된 물음이지만 이 물음에 대한 유현숙의 대답은 명쾌하다. 꽤 긴 분량의 시이지만 윗 시를 인용한 까닭은 그 명쾌한 대답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여성의 삶이 과거와 달라진 가장 두드러진 점은 ‘꺾이고 휘청이며’ 반생을 일터에서 보낸다는 사실이다. 멀리 서구식 근대의 기획까지 들먹일 것 없이 가까운 우리 경우만 해도 이제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널리 보편화되어 있다. 그 진출은 여성들을 단순 가사 노동자에서 저임 근로자로, 그리고 이제는 전문직 종사자로 역할과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의 역할과 지위의 급격한 변동은 전통적 가족구조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과거 대가족제도에 집약되어 있던 많은 기능들이 지금은 여러 사회적 제도들에 위탁되고 분화되었다. 이를테면 육아와 교육의 기능이 놀이방. 유치원, 그리고 학교에 이전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노인세대의 부양 역시 각종 복지시설이나 병원 등으로 이관된 것이다.  우리에게 가족제도의 이 같은 급격한 변동은 불과 30여년에 걸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혹심한 변동을 여성들은 그야말로 각자 자기 몸의 삶으로 살아내야 했다. 말이 쉬워 살아낸다는 것이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사는 일이란 윗 시에서 보듯 용도폐기될 때까지 끊임없이 ‘꺾이고’ ‘휘청이며’ ‘부림’을 당하는 삶이 아닐 수 없다. 그 밖에도 이번 시집에서 읽게 되는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또는 노래방에서, 여행지에서 자성(自省)처럼 토로되는 갖가지 언술들이 그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피접의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이런, 얼어 죽지도 못한


아직도 동백꽃 피고 지는 내가 섬이다

    -「섬」의 일부


  이 시의 화자는 지하노래방에서의 노래모임도 끝나 송별회가 파한 늦은 밤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대중가요 「동백섬」의 노랫말을 패러디하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그 지난날이란 말할 것도 없이 직장에서의 시간들이다. 그 시간들에 대해 화자는 ‘커피스푼으로 되질해버린’, 그래서 결국 삶을 낭비한 T. S. 엘리옽의 프르푸록씨와는 다르게 ‘꽃숭어리 같던 젊음을 수탈당한’ 통한의 시절이었음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그 시절이 ‘피접의 방 한 칸 마련 못한’ 열악하고 각박하기만 한 것임도 깨닫는다. 이는 저 M. 베버류의 프로테스탄트적 직업관, 곧 천직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소명을 실현한다는 그런 멋진 직업은 오늘날 어디에도 없음을 뜻한다. 거기에는 끝없는 자기소외와 강도 높은 작업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아이들의 교육이나 가족부양 같은 여성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갖가지 역할에 짓눌리는 경우 그 고통은 더욱 가중된다. 송별회가 파한 밤거리를 걷는 화자는 얼마못가 종각역 지하통로에서 깡소주를 털어 붓는 노숙하는 홈리스를 만나고(「사회면에 깔리다」) 시청 앞에서 철거민 생존권을 읽는 젊은이도 발견한다(「봄밤」). 이들은 두말할 것 없이 이 시대의 열악하고 상처투성이인 삶의 한 단면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기표들이다. 이들 익명의 기표들을 읽으며 유현숙은 다른 한 편에서 기억 속의 여섯 살 난 명희나(「겨울 삽화」) 연자언니(「사하촌」)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들은 친근한 이웃이면서 동시에 저 기표들과도 동질성이 확보된, 그래서 너 나의 구분 없는 여성적 삶의 기표들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보듯 이 시대 이 땅에서 사회문화적 존재로서 여성들이 누리는 삶은 아직도 열악하고 간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다른 한 켠에는 아직도 솔개와 같은 삶이 또한 있어 감동적이다. 위에 전문을 이끌어 쓴 「귀향」은 굳이 산문적인 번역 없이도 우리에게 속도감 있게 잘 읽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솔개를 매개로 바람직한 삶의 정신적 자세를 제시하고 있는 탓이리라. 마치 해방공간의 백석이 갈매나무를 매개로 곧고 정갈한 삶의 자세를 설파했듯이 유현숙은 솔개를 통하여 이 시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설파한다. 늙은 솔개는 다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자진해서 기능이 퇴화한 부리와 발톱을 깨트린다. 그리고 그것들이 좀 더 날카롭고 예리한 새것들로 돋아날 때까지를 기다린다. 이 자신을 깨트려(죽이고서) 새로운 자신을 획득하는 일이야말로 값진 재생이고 거듭남이다. 그 거듭남을 통하여 솔개는 한결 더 감연하게 거칠고 황무한 세계에 맞선다. 이 작품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그것이 결국 솔개만의 일이 아닌 화자인 ’나‘ 자신,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점 때문일 터이다.


    4.


 지금까지 나는 유현숙의 시를 이 땅에서의 여성적 삶이 어떤 것인가. 또는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앞세워가며 읽었다. 이는 그녀가 여성성에 대한 자각을 시적 세계관으로 삼았는가 아닌가와는 상관없는 일일 터이다. 왜냐하면 시는 상당부분 시인들의 잠재의식내지 무의식 속에-따라서 특정한 자각내지 의도와 관계없이- 깊이 심지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젠더의 구분과도 상관없이 뭇 시인들에게 공통된 사안이라고 할 것이다. 이 같은 일의 이치 그대로 유현숙의 경우도 그 자각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성은 작품들 속에 일정 정도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시의 길 안내를 하며 여성성의 시각에서 유현숙의 시를 읽어온 까닭도 오로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거듭된 말이지만 유현숙의 시들은 모성과 그에 맞물린 몸, 그리고 사회적 자아들에 관한 담론들을 힘 있게 제시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담론들을 작품화하는 과정에서는 다른 여성 시인들과 시적 전략을 달리한다. 지난 90년대의 여성시인들, 이를테면 김언희나 김선우 등이 선보인 시적전략과 꽤는 다른 방법론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김언희의 경우는 그동안 남근중심사회에서 줄기차게 금기시했던 몸 관련 언어나 표현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의 시에서 한결같게 읽었던 성에 관한 각종 비속어나 몸의 표현들이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거기에 비해 유현숙은 우리시의 규범문법들을 모범생처럼 정공법으로 보여준다. 이번 시집 대부분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강인하리만큼 잘 단련된 절제의 시적 태도 등이 특히 그렇다. 그 절제는 행간을 최대한 넓히며 주관적 감정들이나 사설들을 철저하게 걷어내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면서 작품의 얼개를 빈틈없게 만드는 견고함을 보여준다. 이 같은 그의 시적 성취는 남다른 개성으로 읽힌다. 동시에 이는 그녀의 시를 우리가 되풀이 여러 번에 걸쳐 독파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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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랑 사람들
글쓴이 : 논시밭에 망옷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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