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랑 할매
김지숙
내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에는 방금 내린 산山물이 고랑을 끼고 흘렀다.
박조각․도토리 깎데기로 고여든 산물을 퍼서 나뭇잎에 담아 흙고물 놀이를 했다.
고랑이 끝나는 길목, 무허가 판잣집에는 할매 홀로 살았다.
기찻길 옆 고물상집 남자의 본처였지만 자식을 못 낳아 소실에게 오래 전에
밀려났다. 소꿉놀이 시들해지면 고랑가에 사는 할매가 궁금했다.
할매집 지붕에 잔돌을 던지고, 산물을 끼얹어도 할매는 큰 소리 치는 법없이
서릿발 하얀 얼굴 쑥 내밀고는 다시 문을 닫곤 했다. 판대기로 짜 맞춘 느슨한
창틈새를 들여다 보면 할매는 커다란 대침으로 쭉 쭉 팔을 벗어
곧 천장에 닿을 듯이 이불을 꿰매고,
다 쓴 전구 알을 넣어 양말도 깁곤 했다.
동네 잔치날, 떡을 돌릴 때에도, 할매집은 빠졌고, 국수를 삶아도
할매만은 부르지 않았다. 우리들 누구도 할매를 이웃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할매에 대한 이방감(異邦感)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어느 늦은 밤, 잔치떡을 돌려 먹고 신열로 온 몸이 땀에 젖었던 나는,
가슴이 막히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병원이 너무 멀고 늦은 시각이라
어머니는 동네 약국 앞에서 발을 굴렸다. 그날 따라 약국 아제는 큰집제사라
타지로 나가고 없었다. 어머니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름 등을 켜고
밤늦도록 바느질하던 할매의 판자문을 어머니는 와락 여셨다.
어느 틈엔가 나는 할매의 커다란 대침아래 꼼짝없이 누여졌다.
안경너머로 바라본 할매의 실낱같은 눈, 나는 할매를 힘들게 했던
지난 날들을 진정으로 후회했다. 희고 굵은 실로 양 엄지를 챙챙 동여매자
시꺼먼 피가 몰리고, 할매는 나의 양 손톱 밑을 사정 없이 찔렀다.
검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할매는 내 가슴과 등을 한동안 쓱쓱 쓸어내렸다.
할매의 눈고랑을 흐르는 山물 같은 외로움을 그 때 처음 보았다.
(2002,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시인단 선정, 최우수작).
시집 [푸른 솔숲, 꽃이 되어버린 바람에게][詩문학사]
부산에서 문학강의와 독서토론등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지숙(金智淑)시인이
제2시집.[푸른 솔숲, 꽃이 되어버린 바람에게]를 펴냈다.
-산에 가면 사과나무골 지나는 길.방하착等
-70여편의 시가 수록돼있다[시문학사 刊.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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