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세상 기슭의
우당 김지향
(세상 끝은 생각의 기슭에 붙어 있다)
칡넝쿨 보다 질긴 힘줄이
힘줄만 불거져 나온 나뭇가지들이
땅 밑에서 올라와 스르륵 기어간다
주글주글 쭈그러진 땅을 옭아매 끌어다
꽃잎처럼 벌어진 나무 몸통 밑, 땅 밑
수렁 입으로 집어넣는다
세상 끝이 꽃잎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세상이 한 번도 쓰지 않은 새풀 같은 아이들이
꽃잎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아, 수만 킬로 흘러 들어간 꽃잎 속에도
길이 있고 세상이 있구나
그 곳,
길은 나무줄기 사이로 오고 있다 길 위엔 전차 같은 화물차들,
머리띠 맨 포수가 총부리에 눈을 박고 움직임 없는 표적을 휘어잡고
온다 아이들은 세상 같은 꿈 한 채 짊어지고 덤불 사이로 내빼는 길을 따라
달려가본다 산비탈 옆 넓게 패인 사막을 내리닫는 코끼리떼, 코끼리떼가 종이연이
된 아이들 등 위로 지나간 뒤, 산비탈을 깔아뭉갠 산돼지떼가 성난 소리로 길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지나가고 다시 총부리를 쳐든 포수가 위풍당당히 지나가고
모래먼지가 지나가고 모두 지나간 한참 후, 아이들이 일어나 발 밑을 보았다
저-아래 멀고 먼 하늘 한 쪽 뺨에 르노와르의 '아이'를 닮은 안개가
보글보글 김을 내고 있다 안개 속으로 밀리는 계단도 나 있다 아이들은 잽싸게 계단을
내려갔다 순간, 머리 꼭지가 포플러 꼭지로 휘말려 올라갔다 아찔! 눈을 뜨고 보니 땅,
천막들이 펄럭거리는 땅! 머리에 뿔난 사람들이 뿔씨름을 하고 있다 바람은 차고 길은
고드름으로 찼다 뿔난 사람들은 짐승 가죽 옷을 입고 밥을 찾아 진종일
창날을 휘날렸다 창날을 만지는 아이들, 창날이 창집에서 나와 아이들을 어디로
날려보냈다 시커먼 회오리를 타고 깊고 좁은 퉁소 속으로 날아갔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지, 빽빽한 숲들이 달려왔다
(잠깐 생각을 돌리면 아이가 되어 꿈 속으로 간다 나는)
오늘은 창가에 앉아
훤히 뚫린 터널의 끝을 본다
아득하나 잠시인 생
눈으로 더듬어도 밟힐 것 같은 생
한 개의 생이 다 말라 가도록
남과 다른 집 한 채 지으려고
길 끝으로 가면서(한 길로만 가면서)
내장을 저미는 무식한 야수인
시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려 몸 전체로 싸웠지만
집은 아직 머리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길의 끝이 보이다니!
아이들은 어디로 뿔뿔이 흩어진
조용한 기슭의 나는
잔인하게 다가온
창 밖, 세상 끝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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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김지향 시집 <유리상자 속의 생> 1997
끝, 세상 기슭의
우당 김지향
(세상 끝은 생각의 기슭에 붙어 있다)
칡넝쿨 보다 질긴 힘줄이
힘줄만 불거져 나온 나뭇가지들이
땅 밑에서 올라와 스르륵 기어간다
주글주글 쭈그러진 땅을 옭아매 끌어다
꽃잎처럼 벌어진 나무 몸통 밑, 땅 밑
수렁 입으로 집어넣는다
세상 끝이 꽃잎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세상이 한 번도 쓰지 않은 새풀 같은 아이들이
꽃잎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아, 수만 킬로 흘러 들어간 꽃잎 속에도
길이 있고 세상이 있구나
그 곳,
길은 나무줄기 사이로 오고 있다
길 위엔 전차 같은 화물차들,
머리띠 맨 포수가 총부리에 눈을 박고
움직임 없는 표적을 휘어잡고 온다
아이들은 세상 같은 꿈 한 채 짊어지고
덤불 사이로 내빼는 길을 따라 달려가본다
산비탈 옆 넓게 패인 사막을 내리닫는 코끼리떼,
코끼리떼가 종이연이 된 아이들 등 위로 지나간 뒤,
산비탈을 깔아뭉갠 산돼지떼가
성난 소리로 길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지나가고 다시 총부리를 쳐든 포수가 위풍당당히 지나가고
모래먼지가 지나가고 모두 지나간 한참 후,
아이들이 일어나 발 밑을 보았다
저-아래 멀고 먼 하늘 한 쪽 뺨에
르노와르의 '아이'를 닮은 안개가
보글보글 김을 내고 있다
안개 속으로 밀리는 계단도 나 있다
아이들은 잽싸게 계단을
내려갔다 순간, 머리 꼭지가 포플러 꼭지로 휘말려 올라갔다
아찔! 눈을 뜨고 보니 땅,
천막들이 펄럭거리는 땅! 머리에 뿔난 사람들이 뿔씨름을 하고 있다
바람은 차고 길은
고드름으로 찼다 뿔난 사람들은 짐승 가죽 옷을 입고 밥을
찾아 진종일 창날을 휘날렸다 창날을 만지는 아이들, 창날이
창집에서 나와 아이들을 어디로 날려보냈다 시커먼 회오리를 타고
깊고 좁은 퉁소 속으로 날아갔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지, 빽빽한 숲들이 달려왔다
(잠깐 생각을 돌리면 아이가 되어 꿈 속으로 간다 나는)
오늘은 창가에 앉아
훤히 뚫린 터널의 끝을 본다
아득하나 잠시인 생
눈으로 더듬어도 밟힐 것 같은 생
한 개의 생이 다 말라 가도록
남과 다른 집 한 채 지으려고
길 끝으로 가면서(한 길로만 가면서)
내장을 저미는 무식한 야수인
시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려 몸 전체로 싸웠지만
집은 아직 머리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길의 끝이 보이다니!
아이들은 어디로 뿔뿔이 흩어진
조용한 기슭의 나는
잔인하게 다가온
창 밖, 세상 끝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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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김지향 시집 <유리상자 속의 생> 1997
Chopin/Prelude(쇼팽-빗방울 전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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