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시하늘 손남주시인기고글 번호20694 글쓴이流石/ 2005.07.30 10:54
나무와 詩人
손 남 주
·나무는 말없이 서 있다.
·나무는 푸른 잎으로 盛裝하고 있다.
·나무는 먼 未知의 세계를 향하여 무수한 가지를 흔들고 있다.
·나무는 종일 우러러 기도하고 섰다.
·나무는 聖者다.
위의 몇 개 문장은 문덕수 시인이 그의 시론의 첫머리에서 '시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인
식'이며, '사물에 대한 인식은 구체적이고 감각적 레벨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시한 것 중의 몇 개다. 시인이 인식한 나무의 면모를 점점 심도있게 그려 내고 있어서
그 짧은 한 줄의 문장에서도 나무를 형상화한 시가 읽혀지는 것 같다.
시의 소재는 실로 다양해서 지상과 우주공간의 모든 자연과, 문화의 소산인 모든 사물이
다 그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본원이라 할 수 있는 서정시는 주로 자연을 소
재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자연 중에서도 동물보다는 식물이, 식물 중에서도 나
무가 많이 선호되고 있는 듯하다. 동물은 그 희로애락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어 우리에게 보
여 주지만 식물(나무)은 그렇지 아니하다. 다분히 형이상학적이랄까, 그 은근한 몸짓이 시인
에게 사색과 감각의 여백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
은 시인이 나무를 소재로 해서 수없이 많은 시를 써 냈겠지만 비슷한 이미지와 비슷한 주제
의 시는 있을 수 있어도 똑 같은 시는 아마 한 편도 없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계절
나무를 소재로, 어떤 시인이 어떤 시를 써 냈는가 보기로 한다.
나무와 시인, 어쩌면 '異名 同體', '異體 同人'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나무 아래 서서 半白
의 知天命이 나무를 쳐다 보고 있는 모습이나 사진만 봐도 뭔가 싯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것만 같다.
열 일곱 살 옥아, 너는
고향 강가에서 옥색 명주실 같은 5월의
하늘을 찌르는 드높은 내 꿈의 한 그루 미루나무였다
네가 맑은 음성으로 읊조리던 릴케의 시들
네가 달콤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안델센의 동화들
네가 높이 뛰어올라 농구대에 공을 넣던 飛翔의 모습
네가 나뭇가지를 휘어잡아 꺾어주던 아카시아 꽃송이들
…… 중 략 ……
열 일곱 살 옥아,
추억의 물살이 60년을 더 굽이돈 지금도 너는
내 삶의 하늘을 받치는 쌍무지개 걸친 한 그루 미루나무다
그 미루나무에 지금 새생명의 싱그러운 물이 솟구쳐오르고 있다
쑥물 같은 푸름이 차츰 내 인생의 상처 세상의 상처 위에
봄날의 장막으로 뒤덮여 오고 있다
세상에 열 일곱 네가 있는 한
희망의 두레박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김여정<하늘 찌르는 미루나무> 부분「月刊文學」2005.7월호
상승기류다. 위로만 치솟는 싱싱함이다. 하늘로 치솟는 것에는 잣나무도 있지만 잣나무가
주는 이미지가 경륜이라면 미루나무가 주는 이미지는 젊음이요, 꿈이다. 푸른 하늘을 향해
멈출 줄 모르는, 열 일곱 살 소녀의 싱싱함이다.
미루나무의 주위에는 '맑은 음성으로 읊조리는 릴케의 시'가 있고, '달콤한 목소리로 들려
주는 안델센의 동화'가 있다. '농구대에 공을 넣으며' 쑥쑥 키가 자라던 소녀의 '飛翔'이 있
고, 미루나무 둘레에는 '나뭇가지 휘어잡아 꺾어주던 아카시아꽃 같은 소녀의 향기가 있다.
미루나무 그 '몽환의 숲길'엔 '어김없이 동행하던 우수의 안개'가 자욱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미루나무가 떠받치는 하늘 위에는 영롱한 쌍무지개가 뜬다. 미루나무만 떠올리면
젊음이 싱싱하게 물오르고 '쑥물 같은 푸름의 상처 위에도 봄의 장막이 뒤덮여 온다. 열 일
곱의 그 청순한 꿈과 미루나무와 같이 싱싱하게 솟아오르는 열정으로 하여 시인은 '희망의
두레박질을 멈추지 않으'리라.
가장 어린 것이/ 기댈 곳 하나 없는 하늘 한가운데
홀로 덩그렇게 놓여 있다
뿌리로부터 가장 멀리/ 기둥으로부터 가장 멀리
다 커버린 잎들로부터도 멀리 떨어져서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다
햇살과 비와 바람은/ 힘이 되다가도 적이 되는 세상이지만
해도 달도 가는 길 가르쳐주지 않지만
아무도 도착한 적 없는 허공에 지도를 그린다
그 길 따라 띄어띄엄 발자국 같은/ 연두 빛 집들이 생기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무성해지는 마을,/ 힘도 없고 작지만 큰 걸음이다
-전 향 <나무 가지의 끝>전문「현대시」2005.7월호
물려받은 재산도 돌봐줄 부모나 친척도 없이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딛는
고아, 단신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묵은 잎 위로 돋아나는 새순이 참 여리게 보인다. '기댈 곳 하나 없는 하늘 한가운데 홀로
덩그렇게 놓여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새 잎은 물과 영양을 공급해 주는 뿌리에서 가장 멀
리 떨어져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이 힘의 중심부에 닿기가 제일 어렵다. 그래서 새순처
럼 힘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새순에게 햇살과 비와 바람은 그 생명의 절대적 기본 요소이지만, 때로는 정책 방향이나
사회의 인식이 힘없고 외로운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되려 짐이 될 수도 있
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시인은 새순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들은 '아무도 도착한 적 없는 허공에 지도를 그리'듯이 제 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시
인의 따뜻한 눈이 거기에 이르러 약한 자들에게 닿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언제나 희망 쪽
에 선다. 새로 열어가는 '그 길 따라 띄엄띄엄 바자국 같은 연둣빛 집(잎)들이 생기고, '앞으
로 나아갈수록' 새로 이민한 개척 마을은 무성해진다. 마지막 행의 '힘도 없고 작지만 큰 걸
음이다'에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시인의 사고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며 그건 어쩌면
시인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무는 시인보다 더 시적이라고
상투적인 언사가 아니다.
초록으로 세상을 점령한 위세에 눌려서도
철 늦은 빈 가지 쓸쓸한 뒷모습 때문도 아니다.
밑둥치 남기고 트럭에 실려서 간 뒤,
비로소 그가 남긴 둥근 시구를 보았다.
어느 시인이 온몸으로 제 나이를 그리겠느냐,
나도 나이테를 두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는가.
담 벽에 기댄 채 묵묵히 깊어가는 그의 그림자,
채머리 흔들며 아니다아니다 이마에 스친 바람도
머리 풀며 취하도록 빗물에 흠뻑 젖었던 날도
돌아보면 한 시절 삭정이처럼 삭이게 되었는가.
겨울 초입,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를 본다.
마지막 남은 잎새 몇 장 발밑에 내려놓고
한 해 단 한 줄만을 남길 줄 아는 그는
온 몸으로 테를 두른 계관 시인이다.
-우진용<나무 시인> 전문「시인의 눈」2005.5
나무와 시인이 비교되었다. 비교는 같은 부류끼리만 가능한 것이니 일단은 나무와 시인을
동질성으로 본 것이다. 시인은 나무 같고, 나무는 시인 같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가 느끼기
에도 시인은 나무와 통하는 것 같다. 푸른 기운이 우리의 눈을 서늘하게 씻어 주며 세상의
오염을 맑게 정화해 줄 뿐 아니라 그 싱싱함이 늘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때
로는 고단한 삶의 안식처가 되어 주기도 하고 텅 빈 손의 겨울나무가 어떤 깨달음 같은 것
을 주기도 한다. 나무 한 포기 없는 사막을 연상해 보면 안다, 나무가 얼마나 인간에게 위대
한 존재인가를. 시인이 나무에 비유되기도 한다. 나무 같은 시인, 얼마나 깊고 정감어린 말
인가. 이 시 작자의 비교는 비유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시인보다는 나무의 손
을 들어 주었다. 그것은 '초록으로 세상을 점령한 위세에 눌려서도' 아니며 '철늦은 빈 가지
쓸쓸한 뒷모습 때문도 아니'라고 하였다. 나무보다 위대한 시인이 있을까. 근년에 거목 같은
시인 몇 분이 타계하셨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문화인들이 거국적으로 애도를 드
리고 명복을 빌었다.
이 시의 작자는 '나무가 시인보다 싯적이라'는 것을 나무의 죽음에서 찾았다. '밑둥치 남기
고 트럭에 실려서 간 뒤',/ 비로소 그가 남긴 둥근 시구(詩句)를 보았다'고 했다. '어느 시인
이 온몸으로 제 나이를 그리겠는냐.'라고 한 것은 시인은 죽은 뒤에 비로소 그 위대함이 들
어난다는 말인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인가. 그 반문투는 다분히 부정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나도 나이테를 두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는가.'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온몸으로 나
이테를 그린다'는 것은 전력 투구해서 시를 썼는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때 퍽이나 의미심장
한 여운을 나겨 준다 하겠다.
시인은 나무의 밑둥치에서 보는 나이테에서 '그(나무)가 남긴 둥근 시구를 보'는 데 그치
지 아니하고 나무가 살아 있을 때의 여러 정황을 상상해서 늘어 놓은 다음 다시 나무 밑둥
으로 돌아가 '한 해 단 한 줄만을 남길 줄 아는 그는/ 온몸으로 테를 두른 계관시인이다.'라
고 끝을 맺어서 시의 초점이 '한 줄의 나이테'에 있음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전생에 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나 봐
선 채로 기다리는 나/ 살짝 스쳐가는 당신
그래도 그 바람이어야/ 꽃도 잎도 피우리니
덧없는 시간 기다리는/ 빈 가지 그 사이로
철 따라 이는 바람/ 왔다가 사라졌다가
가끔은 서늘한 그늘에/ 삶의 짐을 부리는 바람
무성하던 나뭇가지/ 삭정이가 되어가고
바람도 길을 잃어/ 방황하고 포효하고
바람아 푸르른 날들이/ 얼마나 남았으랴
-김인숙<나무와 바람> 전문「PEN 문학」2005. 여름호
제목만 보고 '나무와 바람'을 노래했나 싶어 읽어 보니 그게 아니다. 어떤 男과 어떤 女를
'나무'와 '바람'으로 비유했다. 그 비유가 너무도 적시(摘示)하다. 너무 적시적지(適時適地)하
여 오히려 詩의 모호성의 매력을 감소시키지 않는가 하는 기우를 갖게 한다.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직접 보았거나 책에서 읽었거나 또는 얻어들은 것들이 얽히어
머리에 입력된 우리나라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부부 혹은 남녀관계의 삶이 어렵풋이 떠 오른
다. 어렵던 시절, 독립 운동으로 해외로 떠돌던 남편이나 탄광이나 공장 등 객지로 돈벌이
나간 남정네를 기다리려야만 했던 그 많은 세월, 어쩌다 바람결처럼 왔다가 스쳐가듯 떠나
가던 남정네를 속절없이 보내야 했던 우리네 여인들이 떠오른다. 그 꿈결 같은 바람이 그래
도 답답한 나무 가지를 흔들어 주었기에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며, 떠돌던 바람 또한
잠시나마 그 서늘한 나무 그늘이 안식의 품이 되었다. 이제 나무도 삭정이가 늘어가고 바람
또한 길을 잃고 울부짖으니 남은 젊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회한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 관계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어느 특정 세대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시
대나 환경의 영향도 받겠지만 이러한 방랑성은 남녀관계를 포함해서 원초적으로 인간 내부
에 존재해 오는 것 같다. 우리말에 '역맛살'이란 게 있다. 남정네의 방랑벽을 이르는 말이지
만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 방랑성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도 적용이 되는 것은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시대는 자꾸 변해 간다. 남과 여,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바람이 되고, 어느 한 쪽이 굳이 나무가 되어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1
깊고 둔중한 고통이 등허리를 지나가며
내게 말한다.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
나는 네게 말 하마,
고통마저 태워버린 너에게
내 아픈 것이 너를 아프게 하는 게 더 아프구나!
2
불탄 나무가 남은 한쪽 팔로 푸른 그늘 이룬 것
악, 아, 하고 입을 벌려
삶을 받아들인 현존, 그 증거
진정한 현존이란/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에 있다
현존은 오고 있는 것/ 지금 생성 중인 상태 속에서
그 어떤 죽음들을 통하여……
-엄원태<불 탄 나무>부분「생각과 느낌」2005.봄호
위의 시 2에 나오는 '현존'이란 말은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만 쓰여진 게 아니라, 20세기
전반의 '실존주의'의 '실존'이란 말과 관련하여 다분히 철학적 의미를 갖는 듯하다.
아무리 악랄한 삶을 살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라 할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임
하여 임종의 그 짧은 시간에 기나긴 자신의 한 생애를 뒤돌아보는 진정한 참회의 순간을 갖
는다고 한다. 암투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 지난 날의 모든 미움과 시기, 이기심을 버
리고 오직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새삶을 영위해 나간다는 말도 들었다. 극한 상황을 넘어
죽음을 딛고 일어섰을 때, 사람은 더없이 겸허해져서 미움과 원망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
에게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불타는 나무처럼 등허리로 고통이 지나갈 때, 내 고통은 다 소멸
되고 내 아픔이 다른이에게 아픔이 될까 봐 되려 그걸 아파한다는 것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움직여 시를 읊고, 발가락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불탄 나무가 남은 한쪽 팔로 푸른 그늘을 이룬 것,' 극한 상황을 현재의 삶
으로 받아들인 증거인 것이다. 진정한 현재의 삶은 아직 살아 보지 않은 미래의 삶을 창조
해 나가는 데 있는 것, 그래서 진정한 현재의 삶은 오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어떤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생성해 내고 있는 것이다. '불 탄 나무'를 통해 삶과 죽음을 통찰해 내
는 엄원택의 시는 3, 4로 이어지는데 다 이야기하지 못함을 안타깝고 죄스럽게 생각한다.
나무와 詩人
손 남 주
·나무는 말없이 서 있다.
·나무는 푸른 잎으로 盛裝하고 있다.
·나무는 먼 未知의 세계를 향하여 무수한 가지를 흔들고 있다.
·나무는 종일 우러러 기도하고 섰다.
·나무는 聖者다.
위의 몇 개 문장은 문덕수 시인이 그의 시론의 첫머리에서 '시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인
식'이며, '사물에 대한 인식은 구체적이고 감각적 레벨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시한 것 중의 몇 개다. 시인이 인식한 나무의 면모를 점점 심도있게 그려 내고 있어서
그 짧은 한 줄의 문장에서도 나무를 형상화한 시가 읽혀지는 것 같다.
시의 소재는 실로 다양해서 지상과 우주공간의 모든 자연과, 문화의 소산인 모든 사물이
다 그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본원이라 할 수 있는 서정시는 주로 자연을 소
재로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자연 중에서도 동물보다는 식물이, 식물 중에서도 나
무가 많이 선호되고 있는 듯하다. 동물은 그 희로애락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어 우리에게 보
여 주지만 식물(나무)은 그렇지 아니하다. 다분히 형이상학적이랄까, 그 은근한 몸짓이 시인
에게 사색과 감각의 여백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서고금을 통해 수많
은 시인이 나무를 소재로 해서 수없이 많은 시를 써 냈겠지만 비슷한 이미지와 비슷한 주제
의 시는 있을 수 있어도 똑 같은 시는 아마 한 편도 없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계절
나무를 소재로, 어떤 시인이 어떤 시를 써 냈는가 보기로 한다.
나무와 시인, 어쩌면 '異名 同體', '異體 同人'이란 느낌을 갖게 한다. 나무 아래 서서 半白
의 知天命이 나무를 쳐다 보고 있는 모습이나 사진만 봐도 뭔가 싯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것만 같다.
열 일곱 살 옥아, 너는
고향 강가에서 옥색 명주실 같은 5월의
하늘을 찌르는 드높은 내 꿈의 한 그루 미루나무였다
네가 맑은 음성으로 읊조리던 릴케의 시들
네가 달콤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안델센의 동화들
네가 높이 뛰어올라 농구대에 공을 넣던 飛翔의 모습
네가 나뭇가지를 휘어잡아 꺾어주던 아카시아 꽃송이들
…… 중 략 ……
열 일곱 살 옥아,
추억의 물살이 60년을 더 굽이돈 지금도 너는
내 삶의 하늘을 받치는 쌍무지개 걸친 한 그루 미루나무다
그 미루나무에 지금 새생명의 싱그러운 물이 솟구쳐오르고 있다
쑥물 같은 푸름이 차츰 내 인생의 상처 세상의 상처 위에
봄날의 장막으로 뒤덮여 오고 있다
세상에 열 일곱 네가 있는 한
희망의 두레박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김여정<하늘 찌르는 미루나무> 부분「月刊文學」2005.7월호
상승기류다. 위로만 치솟는 싱싱함이다. 하늘로 치솟는 것에는 잣나무도 있지만 잣나무가
주는 이미지가 경륜이라면 미루나무가 주는 이미지는 젊음이요, 꿈이다. 푸른 하늘을 향해
멈출 줄 모르는, 열 일곱 살 소녀의 싱싱함이다.
미루나무의 주위에는 '맑은 음성으로 읊조리는 릴케의 시'가 있고, '달콤한 목소리로 들려
주는 안델센의 동화'가 있다. '농구대에 공을 넣으며' 쑥쑥 키가 자라던 소녀의 '飛翔'이 있
고, 미루나무 둘레에는 '나뭇가지 휘어잡아 꺾어주던 아카시아꽃 같은 소녀의 향기가 있다.
미루나무 그 '몽환의 숲길'엔 '어김없이 동행하던 우수의 안개'가 자욱하지만,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미루나무가 떠받치는 하늘 위에는 영롱한 쌍무지개가 뜬다. 미루나무만 떠올리면
젊음이 싱싱하게 물오르고 '쑥물 같은 푸름의 상처 위에도 봄의 장막이 뒤덮여 온다. 열 일
곱의 그 청순한 꿈과 미루나무와 같이 싱싱하게 솟아오르는 열정으로 하여 시인은 '희망의
두레박질을 멈추지 않으'리라.
가장 어린 것이/ 기댈 곳 하나 없는 하늘 한가운데
홀로 덩그렇게 놓여 있다
뿌리로부터 가장 멀리/ 기둥으로부터 가장 멀리
다 커버린 잎들로부터도 멀리 떨어져서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다
햇살과 비와 바람은/ 힘이 되다가도 적이 되는 세상이지만
해도 달도 가는 길 가르쳐주지 않지만
아무도 도착한 적 없는 허공에 지도를 그린다
그 길 따라 띄어띄엄 발자국 같은/ 연두 빛 집들이 생기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무성해지는 마을,/ 힘도 없고 작지만 큰 걸음이다
-전 향 <나무 가지의 끝>전문「현대시」2005.7월호
물려받은 재산도 돌봐줄 부모나 친척도 없이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딛는
고아, 단신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묵은 잎 위로 돋아나는 새순이 참 여리게 보인다. '기댈 곳 하나 없는 하늘 한가운데 홀로
덩그렇게 놓여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새 잎은 물과 영양을 공급해 주는 뿌리에서 가장 멀
리 떨어져 있다.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이 힘의 중심부에 닿기가 제일 어렵다. 그래서 새순처
럼 힘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새순에게 햇살과 비와 바람은 그 생명의 절대적 기본 요소이지만, 때로는 정책 방향이나
사회의 인식이 힘없고 외로운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되려 짐이 될 수도 있
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시인은 새순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들은 '아무도 도착한 적 없는 허공에 지도를 그리'듯이 제 길을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시
인의 따뜻한 눈이 거기에 이르러 약한 자들에게 닿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언제나 희망 쪽
에 선다. 새로 열어가는 '그 길 따라 띄엄띄엄 바자국 같은 연둣빛 집(잎)들이 생기고, '앞으
로 나아갈수록' 새로 이민한 개척 마을은 무성해진다. 마지막 행의 '힘도 없고 작지만 큰 걸
음이다'에는 언제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시인의 사고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며 그건 어쩌면
시인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무는 시인보다 더 시적이라고
상투적인 언사가 아니다.
초록으로 세상을 점령한 위세에 눌려서도
철 늦은 빈 가지 쓸쓸한 뒷모습 때문도 아니다.
밑둥치 남기고 트럭에 실려서 간 뒤,
비로소 그가 남긴 둥근 시구를 보았다.
어느 시인이 온몸으로 제 나이를 그리겠느냐,
나도 나이테를 두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는가.
담 벽에 기댄 채 묵묵히 깊어가는 그의 그림자,
채머리 흔들며 아니다아니다 이마에 스친 바람도
머리 풀며 취하도록 빗물에 흠뻑 젖었던 날도
돌아보면 한 시절 삭정이처럼 삭이게 되었는가.
겨울 초입,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를 본다.
마지막 남은 잎새 몇 장 발밑에 내려놓고
한 해 단 한 줄만을 남길 줄 아는 그는
온 몸으로 테를 두른 계관 시인이다.
-우진용<나무 시인> 전문「시인의 눈」2005.5
나무와 시인이 비교되었다. 비교는 같은 부류끼리만 가능한 것이니 일단은 나무와 시인을
동질성으로 본 것이다. 시인은 나무 같고, 나무는 시인 같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가 느끼기
에도 시인은 나무와 통하는 것 같다. 푸른 기운이 우리의 눈을 서늘하게 씻어 주며 세상의
오염을 맑게 정화해 줄 뿐 아니라 그 싱싱함이 늘 우리의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 준다. 때
로는 고단한 삶의 안식처가 되어 주기도 하고 텅 빈 손의 겨울나무가 어떤 깨달음 같은 것
을 주기도 한다. 나무 한 포기 없는 사막을 연상해 보면 안다, 나무가 얼마나 인간에게 위대
한 존재인가를. 시인이 나무에 비유되기도 한다. 나무 같은 시인, 얼마나 깊고 정감어린 말
인가. 이 시 작자의 비교는 비유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시인보다는 나무의 손
을 들어 주었다. 그것은 '초록으로 세상을 점령한 위세에 눌려서도' 아니며 '철늦은 빈 가지
쓸쓸한 뒷모습 때문도 아니'라고 하였다. 나무보다 위대한 시인이 있을까. 근년에 거목 같은
시인 몇 분이 타계하셨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문화인들이 거국적으로 애도를 드
리고 명복을 빌었다.
이 시의 작자는 '나무가 시인보다 싯적이라'는 것을 나무의 죽음에서 찾았다. '밑둥치 남기
고 트럭에 실려서 간 뒤',/ 비로소 그가 남긴 둥근 시구(詩句)를 보았다'고 했다. '어느 시인
이 온몸으로 제 나이를 그리겠는냐.'라고 한 것은 시인은 죽은 뒤에 비로소 그 위대함이 들
어난다는 말인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인가. 그 반문투는 다분히 부정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나도 나이테를 두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는가.'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온몸으로 나
이테를 그린다'는 것은 전력 투구해서 시를 썼는가라는 의미로 해석할 때 퍽이나 의미심장
한 여운을 나겨 준다 하겠다.
시인은 나무의 밑둥치에서 보는 나이테에서 '그(나무)가 남긴 둥근 시구를 보'는 데 그치
지 아니하고 나무가 살아 있을 때의 여러 정황을 상상해서 늘어 놓은 다음 다시 나무 밑둥
으로 돌아가 '한 해 단 한 줄만을 남길 줄 아는 그는/ 온몸으로 테를 두른 계관시인이다.'라
고 끝을 맺어서 시의 초점이 '한 줄의 나이테'에 있음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전생에 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나 봐
선 채로 기다리는 나/ 살짝 스쳐가는 당신
그래도 그 바람이어야/ 꽃도 잎도 피우리니
덧없는 시간 기다리는/ 빈 가지 그 사이로
철 따라 이는 바람/ 왔다가 사라졌다가
가끔은 서늘한 그늘에/ 삶의 짐을 부리는 바람
무성하던 나뭇가지/ 삭정이가 되어가고
바람도 길을 잃어/ 방황하고 포효하고
바람아 푸르른 날들이/ 얼마나 남았으랴
-김인숙<나무와 바람> 전문「PEN 문학」2005. 여름호
제목만 보고 '나무와 바람'을 노래했나 싶어 읽어 보니 그게 아니다. 어떤 男과 어떤 女를
'나무'와 '바람'으로 비유했다. 그 비유가 너무도 적시(摘示)하다. 너무 적시적지(適時適地)하
여 오히려 詩의 모호성의 매력을 감소시키지 않는가 하는 기우를 갖게 한다.
내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직접 보았거나 책에서 읽었거나 또는 얻어들은 것들이 얽히어
머리에 입력된 우리나라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부부 혹은 남녀관계의 삶이 어렵풋이 떠 오른
다. 어렵던 시절, 독립 운동으로 해외로 떠돌던 남편이나 탄광이나 공장 등 객지로 돈벌이
나간 남정네를 기다리려야만 했던 그 많은 세월, 어쩌다 바람결처럼 왔다가 스쳐가듯 떠나
가던 남정네를 속절없이 보내야 했던 우리네 여인들이 떠오른다. 그 꿈결 같은 바람이 그래
도 답답한 나무 가지를 흔들어 주었기에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며, 떠돌던 바람 또한
잠시나마 그 서늘한 나무 그늘이 안식의 품이 되었다. 이제 나무도 삭정이가 늘어가고 바람
또한 길을 잃고 울부짖으니 남은 젊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회한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녀 관계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어느 특정 세대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시
대나 환경의 영향도 받겠지만 이러한 방랑성은 남녀관계를 포함해서 원초적으로 인간 내부
에 존재해 오는 것 같다. 우리말에 '역맛살'이란 게 있다. 남정네의 방랑벽을 이르는 말이지
만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 방랑성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도 적용이 되는 것은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시대는 자꾸 변해 간다. 남과 여,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바람이 되고, 어느 한 쪽이 굳이 나무가 되어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1
깊고 둔중한 고통이 등허리를 지나가며
내게 말한다.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
나는 네게 말 하마,
고통마저 태워버린 너에게
내 아픈 것이 너를 아프게 하는 게 더 아프구나!
2
불탄 나무가 남은 한쪽 팔로 푸른 그늘 이룬 것
악, 아, 하고 입을 벌려
삶을 받아들인 현존, 그 증거
진정한 현존이란/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에 있다
현존은 오고 있는 것/ 지금 생성 중인 상태 속에서
그 어떤 죽음들을 통하여……
-엄원태<불 탄 나무>부분「생각과 느낌」2005.봄호
위의 시 2에 나오는 '현존'이란 말은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만 쓰여진 게 아니라, 20세기
전반의 '실존주의'의 '실존'이란 말과 관련하여 다분히 철학적 의미를 갖는 듯하다.
아무리 악랄한 삶을 살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라 할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임
하여 임종의 그 짧은 시간에 기나긴 자신의 한 생애를 뒤돌아보는 진정한 참회의 순간을 갖
는다고 한다. 암투병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 지난 날의 모든 미움과 시기, 이기심을 버
리고 오직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새삶을 영위해 나간다는 말도 들었다. 극한 상황을 넘어
죽음을 딛고 일어섰을 때, 사람은 더없이 겸허해져서 미움과 원망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
에게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불타는 나무처럼 등허리로 고통이 지나갈 때, 내 고통은 다 소멸
되고 내 아픔이 다른이에게 아픔이 될까 봐 되려 그걸 아파한다는 것이다.
뇌성마비 장애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움직여 시를 읊고, 발가락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불탄 나무가 남은 한쪽 팔로 푸른 그늘을 이룬 것,' 극한 상황을 현재의 삶
으로 받아들인 증거인 것이다. 진정한 현재의 삶은 아직 살아 보지 않은 미래의 삶을 창조
해 나가는 데 있는 것, 그래서 진정한 현재의 삶은 오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어떤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생성해 내고 있는 것이다. '불 탄 나무'를 통해 삶과 죽음을 통찰해 내
는 엄원택의 시는 3, 4로 이어지는데 다 이야기하지 못함을 안타깝고 죄스럽게 생각한다.
출처 : 시사랑 사람들
글쓴이 : 행복한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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