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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송욱 교수의 한용운 시해설 몇 편]

LEE MIN YOUNG 2006. 4. 15. 20:15

[한용운의 시해설 몇 편]

 (송욱 교수)

 

 

[군말]
  
1.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의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2.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3.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군말」쓸데 없는 말이라고 하지만, 이 서문은 이 시집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1. <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찬송해야 할 모든 대상과 깨달음을 뜻한다.


2. <석가가 중생의 님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고 중생을 주제로 삼은 것은 민중을 위한 불교를 부르짖은 만해의 면목을 드러낸다. 간트에 언급한 것은 팔만대장경을 용약한 「불교대전」을 펴내어 삼십오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불교학의 최고봉이었던 만해로서는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는 <동서고궁의 철학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모두가 물론 불경의 주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3. 장미화와 봄비는 <님>이 자연 혹은 생명의 첫걸음까지도 뜻함을 가리킨다.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이는 한용운의 님은 한국이다.> 이렇게 고쳐서 읽으면 된다. 혹은 <모든 한국사람의 님은 한국이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시니. Giuseppe Mazzini. 일생을 이태리의 민주체제와 통일을 위하여 싸운 혁명가. 맛씨니. 따라서 만해의 목표는 한국의 민주와 통일이었음을 안다. 이러한 목표에 우리는 아직도 멀다. 우리 님은 아직도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이시집의 주제의 하나는 우리 민족의 민주적인 통일이다. 만해가 역사의 진전을 예견하고 있음은 놀랍다.


4. <내가 불교의 진리를 사랑할뿐 아니라 진리 혹은 깨달음도 나를 사랑한다.> 이렇게 보면, 뜻은 더욱 깊어진다.


5. <연애가 자유라면……>연애는 남녀 사이의 사랑으로부터 인간과 불법의 관계까지를 포함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을 사랑하는 자비로운 마음을 법애라고 하는데 연애는 곧 법애를 뜻하기도 한다. 

자유라는 말을 불교에서는 자재라고 한다. 만해는 거의 반세기전에 이미 현재에도 낡지 않은 새로운 말을 대담하게 쓰고 있다. 불교에서 자재는 소원대로 무슨 일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지장이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이나 보살 그리고 깨달은 사람이 갖추고 있는 힘이다. 따라서 <인간과 불법의 관계가 자유라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6. 번뇌와 무명에 가리운 인간이 처음부터 불법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7. 번뇌에 갇혀서 깨닫지 못한 인간에게 님이 있다면, 그것은 불법의 광명이나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그림자> 즉 어두운 무명과 같은 것이다.


8.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 이는 기독교에서 신앙을 통한 구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뜻하는 비유인데, 만해는 이를 거리낌 없이 채택하고 있다. 번뇌와 불안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구제함이 이 시집은 만해의 강열한 개성을 통해서 현대시로 결정된 <불교철학인문>이기도 하다!


이 서문은 이 시집의 내용을 풀이할 수 있는 열쇠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열쇠를 숨기고 있다. 이시집의 내용을 풀이할 수 있는 열쇠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열쇠를 숨기고 있다. 이시집의 주제의 하나는 깨달음 즉 오도. 혹은 증도의 경지이니까 말이다. 만해가 여기서 깨달음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대선사로서 오도를 내세워서는 안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님만 님이 아니라……>. 이렇게 시작하는 이 서문은 만해가 선에 언급한 글로서 보충되어야 한다.


선은 선이라고 하면 곧 선이 아니다. 그러나 선이라고 하는 것을 여의고는 별로 선이 없는 것이다. 선이면서 곧 선이 아니요, 선이 아니면서 곧 선이 되는 것이 이른 바 선이다. 
달빛이냐, 갈꽃이냐, 흰 모래 위의 갈매기냐.

달빛과 갈대꽃(갈꽃), 그리고 흰 모래와 갈매기는 모두가 흰 빛이면서 각각 다른 존재이다. 이는 차별상 속에서 평등을 보는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시집은 바로 이러한 경지를 표현한 <증도가>인 셈이다. 이시집처럼 사랑의 시란 형식을 빌린 증도가는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이십세기에는 물론 고금의 선종사 전체에 있어서도 흡사한 실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유일무이(唯一無二)의 것이며 실로 독보적인 것이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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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1.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2.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3.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 습니다.

4.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5.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6.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7.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8.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9.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10.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 3·1운동을 지도했지만, 민족의 독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도 있으리라.


2. 모든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 상대방과 관계를 맺고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으로서는 있지만, 실체로서 혹은 주체로서는(이를 불교에서 자성이라고 한다) 붙잡을 수가 없다(空). 이를 모든 물질적인 존재는(色) 空이라고(色卽是空) 말한다. 한편 그러한 공은 모든 존재(色)에게 가치를 주며, 그것을 긍정한다. 이를 공은 즉 모든 존재다(公卽是色), 이렇게 말한다. 또한 모든 존재는 공과 다르지 않으며(色不異空) 空은 모든 존재와 다르지 않다(空不異色)고도 한다. 존재와 무에 관한 이러한 사상은 <님의 침묵>이 지닌 뜻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만해는 유 혹은 존재를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 실은 무 혹은 공을 말하기가 일쑤이니까 말이다. 이는 만해의 미학이 의지하고 있는 기둥의 하나이기도 하다.
<푸른 산빗을 깨치고……> 이 구절에서 우리는 공으로 정화된 자연을 볼 수도 있다.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존재가 무로 변화하는 순간. 이러한 순간은 흔히 드라마틱하게 묘사된다.


3. 존재를 넘어선 것이기에 <황금의 꽃>이다. <빛나는 옛 맹서는 불법에 대한 맹서이기도 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맹서 역시 <티끌> 즉 공을 바탕으로 한다.


4.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 민족에 대한 참된 사랑을 깨달은 순간도 되고, 견성의 진리를 깨친 찰나도 된다. 공이 존재와 접촉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감미로운 첫키쓰>가 아니라 <날카로운 첫키쓰>, 이렇게 표현하였으리라.


5. 진리를 말하는 목소리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보통 귀로는 들을 수 없고 따라서 말을 초월한 것이며, 혹은 너무나 뚜렷하고 어마어마하여 귀먹을 지경이다. <귀먹고>, <눈멀고>, 모두가 긍정과 부정을 지니고 있어서 강렬한 효과를 낸다.


6.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이렇게 극적인 표현. 정수박이는 정수리의 뜻이리라. 슬픔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면 진리를 가리키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7.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극적인 표현. 정수박이는 정수리의 뜻이리라. 슬픔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면 진리를 가리키는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8. 유와 무, 슬픔과 기쁨, 성공과 실패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9.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독립운동을 계속하는 것과 불법을 깨닫는 것이 모두 자기의 마음에 달려 있으며, 상황에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만유의 바탕인 공은 한 없는 의지와, 주체성의 바탕이 될 수도 있다.


10.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 노래를 넘어선 노래. 따라서 아주 훌륭한 예술은 진리가 침묵의 깊이에서 드러내는 것을 꾸준히 표현한다. 이루어지지 않은 독립운동을 일제하의 극한상황에서도 쉬지 않는다. 불도에 대한 정진을 계속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항시 침묵에게 묻고 대답을 얻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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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어요]


1.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2.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3.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4.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5.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6.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1. 오동잎이 떨어지니까 수직의 파문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러한 파문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 더군다나 이러한 느낌은 수직이라는 말이 기하학적이어서 더욱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실상 수직의 파문이란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파문 때문에 고요함은 한결 깊이를 지닌다. 이처럼 만해는 때로 놀라운 모더니스트임을 드러낸다. 오동잎에서 님의 발자취를 보니까, 자연과 님은 일치하고 일체가 된다.


2.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 <무서운> 검은 구름이란 표현에 주목해야 하낟. 지리한 장마를, 깨닫지못하는 중생이 보내는 시간이라고 치면, 바람은 무상의 바람이며, 검은 구름은 번뇌 혹은 의정의 구름이리라. 그러기에 구름을 무섭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푸른 하늘 같은 님의 얼굴 즉 번뇌가 전혀 없는 깨달음에 들 수는 없다.


3. 님의 입김은 꽃의 향기보다 더욱 향기로우니까, 꽃이 있을 필요가 없다. <깊은 나무>는 공간적으로, <옛탁>은 시간적으로 깊이를 갖추는 표현이다. <하늘을 슬치는 알 수 없는향기>에 우리는 내면적인 공간이 아주 넓어지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이 <입김>이기 때문에 매우 절실하게 가까운 것처럼 여기게 된다.


4.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님의 노래라고 하므로, 한 없는 자연과 무상의 불도는 일치한다. 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냇물은 나중에 나오는 <약한 등불>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 한정된 인간조건 속으로 들어온 불도의 시냇물은 가늘게 흐를 수 밖에 없다.


5. 우리는 <가 없는 바다를 밟는 연꽃 같은 발꿈치>와 <끝 없는 하늘을 만지는 옥 같은 손>을 보고 아름다운 님의 모습이, 즉 부처님의 법신 이 허공에 충만하면서 눈 앞에 삼삼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모습은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로 변하면서 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님의 시만이 남는다! 그리고 <떨어지는 날>은 앞서 나온 <떨어지는 오동닢>과도 관계가 있다. 우리는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에서 어떤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느낀다. 인간이라는 존재 속에 들어온 법신은 저녁놀이 되고 마니까 그러하리라.


6. 사람은 항시 번뇌에 불타는 존재이며, 차별을  넘어선 깨달음인 空(님의 밤)에 이르기는 매우 어려운 노릇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인간조건이 지닌 의정(疑情)과 空의 경지 사이에서 불타서 재가 되고, 재는 다시 기름이 된다. 이는 空이 有로 변하고 有가 다시 空으로 변하는 우리 마음의 본성을 가리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약한 등불>은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달은 견성의 지혜이기도 하다. 
자연의 고요함에서 님을 느끼며 비롯하는 이 작품은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가 되다가는 가없는 허공에 가득 찬 아름다운 법신이 곧 보일 듯 하다. 그러나 법신은 가뭇 없이 사라지고 저녁놀만이 남는다. 그리고 결국은 차별을 초월한 <님의 밤> 속에서 견성의 지혜는 약한 등불로서 끝내 남는다. 이 작품은 매우 극적으로 구성되었고, 깨달음과 인간조건이 지닌 의정의 심각한 깊이를 훤칠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이 때문에 가장 훌륭한 예술품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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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


1.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2.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3.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위에 발자취를 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4.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5. 의(義)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6.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7.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탑니다.

8.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9.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10.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11.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12.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13.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내일 수가 없습니다.

14.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1. 길 즉 도의 뜻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2. <산에는 돌길>, 이 두가지 길은 중생이 불도에 다달으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한 방법에는 땅 위를 걸어가듯이 어려운 길(難行道)과 바다 위를 배로 가듯이 쉬운 길(易行道)이 있다(용수의 말). <달과 별의 길>은 불도를 상징한다.


3. 낚시군의 길과 여자가 밟는 방초의 길은 자연과 인간이 일치하는 길이다.


4. 여기서 방초의 길은 <죄의 길>로 돌변한다. 우리는 번뇌에 미혹되어 도리를 보지못한다(惑道).이 때문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잘못 행동한다(業道). 그 과보로서 고통을 받는다(苦道). 이와 같이 惑과 業과 苦가 바퀴처럼 두루 돌며 끊어지지 않음으로 <三道>라고 한다.


5. 여자가 밟는 방초의 길은 의인이 밟는 칼날도 된다. 사회라는 상황 속의 불법을 뜻한다. 우리는 스스로 칼날을 밟고 3·1운동을 영도한 만해 자신을 연상해도 좋으리라.


6. 「님의 침묵」에는 저녁놀이 자주 나온다. 해가 지는 것을 보고 극락이 서녘에 있음을 생각하는 것을 <일상관>이라고 한다.(「관무량수경」) 그러나 만해의 <붉은 놀>은 흔히 불법과 현실이 마주치는 찰나, 혹은 의정을 상징하는 비장미를 지닌다.


7. <봄아침의 맑은 이슬>은 지는 해가 밟는 붉은 놀과 정반대의 이마쥬. 불교에서는 감로가 불사를 뜻하며, 불법의 묘미를 비유하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불법을 감로법이라고도 한다.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탑니다.> 이 구절에서 누구나 유모어 혹은 중심을 느끼리라. 그러나 선정에 든 경지가 지닌 자재로움과 무서운 투명성 혹 무심을 볼 수도 있다.


8. 공을 체험하는 선정에서 치면, 만상이 아공이요 무시인데, 도가 두가지인 듯이 표현한다.


9. <님의 품에 안기는 길>은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는 길도 되고 불법을 깨닫기 위하여 몸을 바치는 길도 된다.


10. <주검의 품에 안기는 길>은 번뇌 속에서 그대로 사는 길도 되고, 죽음을 무릎쓰고 번뇌를 떠나는 길도 된다.


11. <다른 길은 주검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이라고 하여 매우 논리적으로 죽음보다 더 험한 길이 있는 듯이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 그런 길은 없다는 뜻이다.


12. <나의 길>은 무슨 뜻인가, 이렇게 바꾸어 보면 이해가 간다.


13. <나의 길>이 지닌 내용을 명확히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의정은 여전히  여전히 남는다.


14. <주검의 길은 왜 내섰을까요.>, 이렇게 의문으로서 끝을 맺는다. 아공을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은 죽음 즉 번뇌에 있기 때문에 아공과 번뇌는 하나이며, 생과 사를 하나로 보는 것이 바로 무심의 내용임을 알면서도, 만해는 그것을 모르는 듯이 표현한다. 이는 무심을 얻으려며는 말과 생각만으로는 되지않으며, 실천을 통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도를 얻으려며는 몇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듯한 경험을 거쳐야 하는데, 그러한 경험은 깨닫고 보면, <봄아츰의 맑은 이슬이 꽃머리에서 미끄름타는 것>과 흡사하다! 이것이 선정의 경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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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와 행인]
  
1.  나는 나룻배
 

2.  당신은 행인(行人).

 

3.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4.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5.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6.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7.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8.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9.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날마다 낡아갑니다.

 

10.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1. <나>는 만해 자신도 되고 불도도 된다.


2. <당신>은 중생 혹은 한국사람 전체를 말한다.


3. 중생은 <흙발> 즉 번뇌 때문에 불도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한다. 혹은 우리는 참된 지도자를 알아차리지 못하기가 일쑤다.


4. 제도를 말한다. 제는 구제한다는 뜻. 도는 건넨다는 뜻. 즉 생사라는 고해를 건너가게 한다는 뜻이다


5. <나> 즉 불도는 생사를 초월한 진리일 뿐만 아니라, 중생을 항시 살리고 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안으면>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자와 비를 느낄 수 있다.


6. 불도는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이 <모두> 구제되기를 <기다리고> 즉 바래고 있다.


7. 중생은 흔히 불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다.


8. 불도는 중생으로 더부러 하나이기 때문에 중생을 떠나지 못한다.


9.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이 구절은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이 구절과 함께, 불교에서 강조하는 <인>의 경지를 말한다. 인은 남에게 모욕과 박해를 받아도 화내지 않음이며, 또한 모든 것이 공임을 깨닫는 경지를 <법인>이라고도 한다.


이 작품은 참된 사랑의 본질인 희생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상 그 근원은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와 비, 그리고 인에 두고 있어서 <절실한 깊이>를 지닌다. 이 때문에 그리고 시로서의 짜임새도 훌륭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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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보았습니다] 
 
1.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2.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3.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4.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5.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6.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7.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8.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9.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10.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1. <당신>은 무심의 경지임으로 <당신이 가신 뒤>라고 해도, 내가 항시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여기서 <당신>은 민족의 독립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2. <나를 위함이 많다>고 함은 모든 문제는 <자기의 책임>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3. <나>는 땅이 없고 추수가 없는 심한 빈농으로 드러난다.


4. <나>는 한걸음 나아가 거지가 된다. <주인>의 말을 빌리면 <거지는 인격이 없으니까 생명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우리 인격이며 우리 생명이다>, 이런 뜻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소유권이 인격이며 생명이라는 물질지상의 생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지는 사회적인 무를 상징한다. 그리고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  이 말은 자비를 철저하게 부정함을 가리킨다.


5. 그러나 자비가 없으면 진리도 없다. 물질지상의 원리에 따라서 자비가 철저히 부정될수록 <나>는 끝끝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즉 너무나 벅찬 자비 속에서 진리를 본다! 그리고 자비는 공의 경지를 떠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인>의 공덕을 엿볼 수 있다.


6.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다>. 일제하에 살고 있었던 우리 민족 전체는 민적이없는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만해는 일생을 호적 없이 살았다고 한다.


7. <장군>은 무엇보다도 우선 일제를 가리킨다. 일제는 한국사람의 인권을 부정하고 능욕하였다. 또한 <장군>은 모든 정치권력을 뜻한다고 할 수도 있다.


8. <그를 항거한 뒤에>. 이 구절은 만해 자신이 영도한 삼일운동을 뜻한다. 모든 문제는 <자기의 책임>이라는 것이 선의의 입장이다. 따라서 일제하에서 우리가 살게 된 것도 우리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일제에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 즉 자기의 책임으로 변하는 순간에 진리를 본다. 바꾸어 말하면 공의 경지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강간하려는 것을 항거 할 수 있는 동시에, 우리 민족 자신의 책임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9. 일제하에서는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 즉 일제의 권력과 <황금> 즉 금전과  물질을 위하여 있는 <연기> 즉 무와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는 <제사지낸다>는 말에 두가지 뜻을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존경한다>. 둘째는 <상대방을 죽은 존재로 여긴다.> 따라서 일제하에서는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일제와 금전 역시 죽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연기> 즉 무와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어서 뜻은 더욱 날카로와질 뿐더러 깊어지기도 한다.


10. 지금까지 <나>는 땅도 추수도 없는 빈농, 혹은 인격과 생명이 없는 거지로서 등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집도 민적도 없는 가녀린 여인으로서 <장군>에게 능욕당하려다가 <그를 항거한다.> 그러나 이 <항거> 다음에는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이 칼과 황금으로 더불어 부정되면서, <나>는 그 참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여기서 깨달음의 경지가 종교적인 진리(<영원의 사랑>) 일뿐더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이요, 실천력이라고 믿고 행동한(인간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한) 독립투사였고 대선사인 만해 자신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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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1.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2.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3.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별의 첫걸음이여.

 

4.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5.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6.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7.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8.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9.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에 봄바람이여.
 

 

1. <백번이나 단련한 금결>은 지혜가 단단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리며 비추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불신을 금신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비슷한 뜻으로서 금강신, 금강심이란 말을 쓴다.


2. <뽕나무 뿌리>가 등장한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세상 일이 덧 없이 바뀜을 비유하여 <상전벽해>라고 한다. 즉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고, 푸른 바다가 뽕나무 밭이 되듯이 세상에서 운수가 변하기 쉽다는 말이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즉,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 뒤에 뽕나무 뿌리가 다시금 아름다운 산호로 변할 때까지>, 이렇게 풀이할 수 있으리라. 세상은 어떻게 변하더라도 <천국의 사랑> 즉 증도의 경지는 영원히 축복을 지닌다는 뜻이다.


3. 죽음을 무릅쓰고 얻은 깨달음에서는 <아츰볏의 첫걸음> 즉 새로운 생명과 광명이 비추기 시작한다.


4. 진리의 깨달음은 번뇌가 많은 중생들이 사는 사회를 결코 떠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인간의 상황 속에 구현되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만해의 불교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세를 위한 것이다. 이를 <의가 무겁고 만금이 가볍다>고 표현한다. 결국 깨달음은 사회정의와 경제적인 정의로서 구현되어야 함을 가리키고 있다.


5. <거지>는 물질적인 식량이 없는 사람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식량이 없는 사람들을 아울러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6. <옛 오동>은 도를 얻은 경지며, 경지에서 나오는 소리는 모두가 드러날 수는 없는 <숨은 소리>인 셈이다.


7. 깨달음이란 죽음과 같은 번뇌를 물리치고 새로히 비롯하는 생명, 즉 <봄>이며, 또한 광명과 평화(의정 혹은 마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까)라고 할 수 있다.


8. 여기서는 오도의 경지와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강조하는 대승선의 본질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약자>는 깨닫지 못한 중생도 되고, 일제의 쇠사슬에 얽혀서 허덕이는 민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만해의 일생은 대선사로서 우리 민족에게 자비를 베푼 일생이 아니고 무엇이랴!


9. 앞서는 <아츰볏의 첫걸음>이라고 했지만, 이번에는 <얼음바다에 봄바람>으로 바뀐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얼음바다>를 불생으로 치면 <봄바람>은 불멸을 뜻한다. 또한 <얼음바다>를 깨달음의 경지로 본다면 <봄바람>은 자비의 실천을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이 <찬송>을 바로 만해 자신에게 바치고 싶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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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繡)의 비밀]
  
1.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놓았습니다.
   심의(深衣)도 짓고 도포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뿐입니다.

 

2.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3. 나는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은 금실을 따라서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4.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아직 없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1. 선종에서는 스승이 교법을 전하는 표지로서 의발(의발, 가사와 바리때)을 제자에 주었기 때문에, 법을 전함을 <의발을 전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다>고 함은 교법을 모두 공부하고 수도를 하였다는 뜻이다. 심의(深意). 높은 선비가 입는 흰 베로 만든 웃옷.
<짓지아니한 것은 적은 주머니에 수놓은 것 뿐>, 이 구절은 <완성하지 못한 것은 적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 뿐>이라는 뜻이리라. 그리고 적은 주머니와 거기에 수놓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이낟.


2. <그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다>고 하지만,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한 것은 <짓는 것>과 <놓아두는 것>이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짓는 것>은 수행을 가리키며, 놓아두는 것은 <무위> 혹은 <자연>을 뜻한다. 또한 선에서는 마음의 기틀에 있어서 <붙잡는 것>과 <놓아주는 것>을 자재롭게 해야 깨달음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짓는 것>은 <붙잡는 것>이며, <놓아두는 것>은 바로 <놓아주는 것>이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이 구절은 크게 공교로움은 서툴음과 같다>(대공여출)는 노자의 말을 연상시킨다. 또한 <그러한 비밀은 나 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까 <적은 주머니>, <수놓는 것> 그리고 <나의 바느질 솜씨> 등은 모두 깨달음과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3.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수놓는 금실>, <주머니 속>, <맑은 노래> 그리고 <나의 마음> 등, 이 모든 이마쥬가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알아차릴 수 있다. 깨달음이란 결국 <나의 마음>을 깨닫는 일이니까 말이다.
깨달음 중에서 남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이 <수놓은 원앙새>라고 치면, 금바늘은 남에게 표현할 수 없는 깨달음의 비밀이다. 이를 만해는 <그러한 비밀은 나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혹은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4.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만한 무슨 보물이 없다>고 함은 그 주머니가 곧 깨달음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 적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다.> 이 구절은 짓는 것과 짓지 않는 것이 같은 일이라는 말이다. <천여가 입고 있는 옷에는 실밥이 없다> 는 말이 있듯이 깨달음이란, 결국 <실밥이 없는 탑>(무강탑)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적은 주머니>, <금실>, <금바늘>, <수놓는 것> 혹은 <황금이 가득 찬 나라>, 무강탑등, 이러한 모든 상징이 표현할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표현할 수 없는 비밀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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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끝판]
  
1. 녜 녜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흉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잃을까 저어합니다.

 

2.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3.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녜 녜 가요, 이제 곧 가요.
 

 

1. <나는 이렇게 바쁘다>고 함은 깨달음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진한다>는 말이다. 특히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깨달음의 기능을 강조한 만해는 시기의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등불을 켜랴다가 초를 거꾸로 꽂는 한이 있어도> 그는 불법과 민족을 위하여는 항시 달려 갔다. 말하자면 <주검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무위 혹은 무사와 무심이기도 하기 때문에,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만해의 무심은 행동과 창조의 근원이기 때문에, 역사의 <완급>을 자재롭게 따를 수 있었다! 따라서 <님의 거문곳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허한다>고 말하고 있다.


2.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름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광명은 <날이 새는 빛>이며, 불도를 우리 사회와 민족의 상황 속에 구현시키기 위한 광명이다.


3. 그러므로 만해는 항시 민족의 상황속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랑의 끝판>은 곧 <무궁한 사랑>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것은 <죽음의 사랑> 즉 무외의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이렇게 시작하는 이 마지막 작품은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이렇게 비롯하는 첫째 작품 「님의 침묵」과 대응한다. 따라서 <분리문자는 성의 원성>이라는 만해의 생각이 바로 시집 「님의 침묵」의 구조가 지닌 <원성>에서도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이런 점으로 보아서도 이 시집이 하나의 전체, 그것도 <원성된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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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1.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2.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乙丑 8월 29일 밤 끝>
 

 

1. 만해는 대선사요, 삼일운동의 가장 위대한 영도자였다. 이러한 놀라운 인물이 더욱이나 항일투징과 증도의 경험을 사랑의 시라는 형식을 통하여 현대적으로 표현하는데 크게 성공하였음은 우리 문학사와 사상사를 위하여 일대보장을 마련해 준 것이다.
<여러분은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여기서 <슬픔>이란 깨달음과 올바른 역사의 전개에 대한 의지를 지향하는 수행과 자비를 뜻하며, 결코 감상이 아님을 우리는 이제 잘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장차 세대가 바뀌면,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이, 뜻과 맛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의 시집「님의 침묵」은 날이 갈수록 광채을 토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2.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우리 역사의 무거운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 시집은 새로운 시대와 우리 전통사상의 무궁한 창조력, 그리고 모국어의 무진장인 잠재력을 알리는 <새벽종>이며, 그소리는 항시 우리 민족 전체의 귓전에 쟁쟁히 울리고 있으리라.


만해가 이 시집을 탈고한 1925년 8월 29일 밤은 우리 정신사의 일면을 언제나 빛내 주게 될 것이다. 당시 그는 만으로 46세였다.

출처 : 강가에서
글쓴이 : 왕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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