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詩選-67.詩人백석의 여인-1편.자야의 사랑,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이생진에 대하여
--이민영
시심마(패랭이꽃)/1992/87X129/한지에 수묵채색 / 김대열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있어 '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자야. 김진향.본명은 김영한
자야子夜
백석에 의해 자야라 불리웠던 김영한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
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으며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
기생이기도 했다.
백석과는 백석이 함흥의 영생고보 교원으로 있던 시절에 만났으며, 그 후 두 사
람은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만낫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우여곡절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힌 바람벽이 있어'를 포함한 백석의 많은 시가 자신을 염
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는 없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라는 시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
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자야 김진향 선생님과의 인연-국립국악원정악단 문현 (음악학.문학박사)
자야 선생님은 한때 가곡으로 인연을 가진 바 있다.
작고하시기 약 4-5개월 전부터인가-기억도 가물해졌지만-자야 선생의
가곡 스승이었던 하규일 명인으로부터 배운 가곡을 복구시키고 싶으시다며
제가 몸담고 있는 국립국악원에 문의를 해 오셨고,
이리해서 필자는 장구를 잡고 지금도 정악단 단원으로 있는
대금에 김상준씨와, 거문고에 윤성혜씨와 함께 작고하시기
직전까지 그가 사시던 한강이 창문너머 보이던 동부이촌동
한 아파트를 일주일이면 1-2 회 정도씩 드나들며 선생이 부르는
여창가곡을 반주하곤 했었다.
연습할 때마다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직접 해 두셨고,
그가 작고하신 후 이를 CD 5-6장의 분량으로 복각하여
반주했던 우리들이 나누어 가진 바 있다.
사실 선생은 이렇게 댁에서 연습하신후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을때 녹음실 기자재로 정식으로 녹음 제작하여
보관해 놓으시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작고하시기 전날밤, 이날도 우리 일행은 선생의
가곡 반주를 해 드렸던 날이었는데,
그날 새벽 갑자기 작고하셨던 것이다.
우리 일행이 가곡반주를 위해서 동부이촌동 댁을 드나들 때에도
이미 호흡기 계통에 문제가 있으셔서 예전의 낭낭했을 목소리는
빛을 잃어 가쁜 호흡을 뿜어내며
긴 노래를 힘겹게 하시곤 했었다.
선생이 기거하던 넓은 아파트에서 선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 부부 내외와 함께 거처하면서,
특히 선생이 숨이 턱에 차서 호흡곤란이 발생할 때면
항상 남자로부터 응급치료를 받았던 선생이었다.
작고하시던 그날도 호흡곤란이 일어났을 때
빠른 응급처치를 받았더라면 더 사실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날은 그 타이밍을 놓쳤던 것이다.
자야 선생은 위 소개글에서도 적혀 있듯이
많은 이름을 가지고 계셨다.
한가지 더 추가할 이름이 있으니 '김진향(金眞香)'이다.
그의 妓名이다. 이 기생 이름으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서울 : 도서출판 예음, 1993)이라는 책을 남기셨다.
국악계에서는 김진향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한겨울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註-이상의 글은 국악원정악단.문현 박사(http://blog.naver.com/singerkr)님이
本 考를 보시고 다음카페 백석 카페(http://cafe.daum.net/BaekSuk)에,
위와 같이, 자야 여사님과의 인연을 기고한 글을 덧붙임 합니다.
同心草 / 신영옥(Sop.)
자야여사가 시주한 길상사의 오솔길
시인의 시인-백석
백석白石
1912. 7. 1 평북 정주~1995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
본명은 기행(夔行).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
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
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
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
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
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
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1936년에 시집〈사슴>〈여우 난 곬족(조광,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
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무술(巫術)의 소재가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
는데, 이것은 이용악 시의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 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남한에서 해금후 최초로 영남대 이동순 교수에 의해 시집
〈백석 시전집.1987)〈흰 바람벽이 있어.1989)과 논문이 출간되고,
이후,여러 작가들에 의해
다투어 많은 시선집이 나왔다.
子夜는 백석의 여인 중에서 잘 알려진 분이다. 이동순 교수(영남대)가
백석 문학이 해금되던 해 자야 여사를 직접 면답해 얻은 자료가
백석과의 자야의 사랑이 담긴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자야 여사의 회고/이동순]이다
백석의 여인에는 여러 여인이 등장한다,
한 분은 지금 옮기는 자야이고,
백석의 절친한 친구 신현중과 결혼해버린 통영의 란,
그리고 김진세의 누이,
..등이다. 백석의 심중에 남은 여인이 란이라면,
여인의 심중에 남아있게한 사랑이
자야의 백석에 대한 사랑이다.
오늘은 이생진 시인님의 시를 빌어 1편-자야의 사랑을 보낸다.
37년 12월 말에 백석의 결혼으로 마음이 상한 자야가 훌쩍 함흥을 떠나
청진동 집에서 살았다
그때 그녀를 백석이 다시 찾아왔다고 했다.
백석이 이미 그쪽 세계에서 알려진 자야 여사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자야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 몇 달 뒤인 이듬해 봄, 어느 주말 오후였을 것이다.
그 대 나는 청진동에서 11간 짜리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살고 있었는데,
사동(使童:심부름하는아이)이 웬 쪽지를 드로 찾아왔다.
펴 보니 백석이 보낸 메모였다.
'몇 달만에 이렇게 찾아온 사람을 허물하지 마시고 나 있는데로 속히 와 주시오
<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
이 때 자야는 깜작 놀랐다고 한다.
자신의 거처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동을 보내어 연락을 전하며 찾아온
백석에 대하여 예전의 미움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고 한다.
"사동에게 물어보니 그는 지금 우편국 앞 제일은행 부근의 한 오뎅집에 있다고 했다.
내 가슴은 사뭇 그리움으로 두근거려왔다.
부리나케 그의 앞에 가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노라니
그는 다시금 지난 해의 사건을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기뻤지만,
그의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그가 무작정 좋아지고,
또한 우쭐거려 오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백석은 학교 출근을 위해 함흥으로 떠났다.』
*자료 출처..백석, 내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자야여사의 회고(이동순)
*자료 편집/태그-솔의향기/글-이민영. 문현 (200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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