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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백석>과 <수선화>에 대한 이 글의 출처는 김달진 시인의 블로그이며 주소는 윗표기입니다.
저작권보호를 위하여 스크랩금지하였으며, 글을 원하신 분은 윗주소에 가셔서 보시길 바랍니다..<옮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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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 강원도(江原道)의 어느 깊은 산골 마을에서는 눈이 푹푹 내려도 좋을 시간입니다.
인적 끊어진 거리의 가로등 불빛에 흰눈이 날리는 것에 삽살개가 컹컹 짖어대는
소리가 몹시도 그리운 밤입니다. 갓 볶은 커피의 향내를 맡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둘 부르고 싶은 밤입니다. 기억 속에 가물거리는 정겨운 옛날의 풍경을
하나둘씩 불러내 마음의 오선지(五線紙)에 옮겨 그리고 싶은 밤입니다.
이 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당신께서 좋아하실 이야기 하나를 무새 헝겊 위에 써보아도 좋겠습니까.
깊어가는 동짓달 밤―지어낸 이야기면 지어진 대로 좋을, 사실이라면
사실인 대로 좋은 소담한 이야기 하나를 당신에게 들려주어도 되겠습니까.
수선화(daffodil)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평생을 시(詩)만을 그리며 살다가 죽겠다고 다짐을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본토 중앙인 도쿄의 한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청춘을 가난한 조국인 조선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무엇이 이 사내에게 그러한 결심을 하게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조선의 슬픈 현실 속에서
세속적인 성공을 좇거나 아리따운 아가씨를 찾아 달콤한 연애를 한다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죄책감을 느꼈을는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마을의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스스로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야 그는 안서나 소월처럼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무지개빛의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시인이 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자 사명이라고 결단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조선 땅一지금의 서울인 경성一으로 돌아온 사내는 틈틈이 서양 언어로 된
잡지를 뒤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조선에 가장 아름답고 재미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밤낮을 설쳤습니다. 영어나 러시아어로 쓰여진 아름다운 글귀를 보면 조선어로 옮겨도 보고
직업상 필요하면 잡문도 썼습니다. 하지만 사내의 꿈은 오로지 시에만 있었습니다.
사내는 시를 생각하며 길을 걷고 시와 같이 밥을 먹고 시를 꿈꾸며 잠을 잤습니다.
사내는 시와 같이 아침을 맞이했고 시와 같이 자신의 직장인 신문사로 출근했습니다.
이따금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아리따운 처자를 마주치는 일이 있을 때면 사내는
자신의 시를 저 처자보다 더 아름답게 꾸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내에게는 젊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처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선의 사람들 모두가 힘들고 가난한 시대에 개인의 달콤함을 찾아 가정을 꾸리는 것은
양식과 양심 있는 시각으로 볼 때 옳지 못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내는 아리따운 처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대신, 조선 사람들 모두가 아름다움을 느끼고 달콤함을
누리고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시(詩)―, 고전으로 길이 남을 바로 그러한 시를 쓰고자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튼튼하고 달콤한 시를 쓰는 것만이 일제 치하의 식민지 조선 땅에서 스스로의
삶을 값지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튼튼한 시―이것을
시인은 자기의 아내라고 생각했습니다―를 쓰기 위해, 자신의 새악시를
가장 아름답고 튼튼한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 사내는 자신의 은금보화같은 청춘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사내는 자신이 근무하던 신문사를 떠나 경성에서 수백 리 떨어진 먼 북쪽의 바닷가
어느 도시의 학교에 영어 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에는 사내가 평소 존경하는
선배 시인이 국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선배 시인은 아끼는 이 후배 시인―이제부터는
이 사내를 P라 하겠습니다―이 연애에 통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술자리에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P는 빙그레 웃으며 자기는 시와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도 남은 청춘 십 년을 시를 쓰며 시하고만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덧붙였습니다.
K선배는 놀란 얼굴로 그러면 십 년 후에는 시를 안 쓸 것이냐고 되물었습니다.
P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않는 것과 같이 자기도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십 년 후에는 시를 더는 안 보겠다고, 십 년 후에는
시를 더 이상 안 쓸 각오로 지금 시를 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P의 시를 일찍이 신문지상과 그의 시집을 통해 접한 K선배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P의 말 속에서 노오란 수선화를, 하나의 거륵한 나르시시즘을 보았습니다.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시만을 사랑하는 P의 굳은 결심 속에서 K는 순교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 한켠으로는 P의 시와 생각이 과연 후대인들에게―올바른 평가는 고사하고―그 맘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K는 P후배를 위해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시를 한 수 지어주었습니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날으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부칠 곳 없는 정열을
가슴 깊이 감초이고
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의 창작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
또한 나의 적은 애인이니
아아 내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서 눈길을 걸으리.
얼마 안 있어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돌아와 다시 신문사에
들어가 잡지 편집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1939년말 무렵의 추운 겨울,
P는 경성에서의 조선어 신문과 잡지의 발행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일제가 중국 본토에 세운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지금의 장춘―으로 향했습니다.
P는 신경에서 조선어로 발행되는 신문 《만선일보》에 기사를 쓰기도 하고 짤막한
영국소설을 조선어로 번역하기도 하고 더러는 새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때였다 봅니다, 경성을 떠나 신경 교향악단의 바이올린주자로 와 있던 작곡가 김동진을 P가 만난 것은…
. P로부터 K의 시를 전달받은 스물일곱 살의 청년 김동진은 시를 읽고서는 단숨에 통절 가곡으로
<수선화>를 완성했습니다. 원시의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고 시인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김동진은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멜로디의 흐름과 의미의 강조를 위해
2연의 마지막 행 “가여운 넋은 아닐까”를 한 번 더 반복하는 게 좋겠다라고 생각하여
그 부분만 최소한도로 가사의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리듬과 선율의 흐름을
고려하여 마지막 행의 "나도 그대를 따라서 눈길을 걸으리"를 "…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로 바꾸었습니다.
P가 그리 했는지, 아니면 P의 각별한 친구인 H가 그리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를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으로 바꾼 이가 누구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김동진의 <수선화>는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1년 전인 1939년 함흥 영생고보의
국어 교사이었던 김동명 시인―(나도 모르게 K시인이 누구인지 그만 말해버렸습니다!)―에게
P는 분명 “빙그레 웃는 … 얼굴”로 자신은 청춘을 시와 결혼한 사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P가 한 말의 의미를, 그리고 P가 남긴 숱한 기행(奇行)을 오늘날, 북한 땅은 물론
남한 땅의 그 누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헤아려보면 <수선화>의
‘그대’는 오랜 세월 우리들에게 “쓸쓸히” 웃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P는 일찍이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울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어느덧 멀리서 새벽닭이 웁니다. 어느새 믿으면 믿어서 좋을 이야기,
안 믿으면 안 믿는 대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끝낼 때가 왔습니다.
동화같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 P가 누구인지 당신께서 벌써 눈치챘는지 모르겠네요.
P는 우리에게 백 개의 무지개[析]로 남은 사내, 백 개의 단단한 바위 같은 꿀같은
술같은 은금보화 같은 시를 우리에게 남겨준 사내, 《사슴》의 시인으로
우리에게 기억된 사내一 백석(白石)입니다.
성은 백이요, 이름은 석一, 그의 이름 두 자가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 하나된 조국을 보는 날이 머지않은 날에 올 것이라고,
이 안 믿으면 안 믿는 대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 밤에 읽는 당신은 믿는지요. ...................김달진
출처--김달진 시인님의 불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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