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MIN YOUNG,추천시와 추천 문학

한 恨/ 박재삼 (권상혁선생님 추천시)

LEE MIN YOUNG 2010. 11. 26. 21:17

제47회 권상혁 선생님 - 한(恨)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 삶의 모든 걸 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깊이 그리고 아프게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사랑한 마음은 절실하고 강렬했으나, 외사랑일 뿐이었고 그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날카로운 칼로 깊이 베인 듯 아리고 쓰렸다. 오랫동안 그 아픔은 줄어들지 않았고, 줄어들지 않은 만큼 더욱 선명하게 내 앞에 불쑥불쑥 도드라지게 나타나곤 했다.

박재삼의 「한(恨)」을 읽거나 수업 시간에 가르치게 되면 섬뜩섬뜩 놀랄 때가 있다. 내 온몸의 신경 세포들이 하나씩 일어나서 잠재웠던 지난 기억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도 이 시의 감나무처럼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 가며 내 사랑을 가슴 한켠에 또렷이 아로새겨 두고 있다.

나는 적극적으로 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 무척이나 소심했고 겁이 많기도 했지만, 거절당했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비참함과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선택한 혼자만의 사랑이었으나, 돌이켜 보면 후회막심이었다. 상처를 받더라도 마음 가는 대로 끝까지 가 보았다면 지금처럼 시와 오롯이 마주쳤을 때 건조한 눈에 맑은 눈물방울이 맺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사랑이 제대로 뻗을 데는 저승밖에 없다는 시인의 말에, 언제나 그렇듯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면 죽어서라도 이루어졌으면 하나 죽어서도 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드러낼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사람의 등 뒤로 뻗어 가서 보이지 않는 내 손이 그 사람 모르게 그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게 될지, 나 혼자 애면글면하며 속앓이를 하며 가슴을 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쉽게 사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인연이란 것도 시절 인연이 있어, 그 시절이 다하면 바람처럼 흩어지게 마련이니, 흩어지는 바람처럼 내 마음의 그 사람도 그렇게 흩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가슴 아린 사랑 한번 못 해 본다면 참 서글플 것 같다. 당시에는 죽을 것 같은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무뎌진다. 그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만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가 보다.

나는 그 사람에게 한평생 나의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서럽게 살아왔다. 혹시나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 사람이 알게 된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내 마음과 같이 그리 기뻐하거나 벅차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할 거면서 말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 사람도 나에 대한 사랑을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고백하지 못했을지,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건 내가 모를 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천형처럼 나는 이 시를 매번 접해야 한다. 가르치는 일을 선택한 이상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다. 도망치려고 하면 더욱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을 때까지 들여다보려 한다. 이 시에 대해 무덤덤해지고, 그 사람에 대해 무덤덤해질 때까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기 위해서는 잊고 싶은 과거와 반드시 맞닥뜨려 순진했던 나와 화해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남아 있는 내 삶에 대한 배려이자 선물이 될 거라 믿는다.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08년 상명고등학교에 발령받아 지금까지 세 해째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고 있다.

1997년에 문학사상사 청소년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받았고, 대산청소년문학상에서 문예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대학생 때는 고대문화상 소설 부문에 당선하고 최명희청년문학상을 받았다.

나라말과 나라글을 사랑하고 특히 소설 창작 교육에 관심이 많아 석사 과정에서는 창작 교육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성북교육청 문예창작영재원에서 문학 소녀, 소년들과 주말마다 즐거운 창작 수업을 하고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빛나는 날들이 함께할 것이라 믿고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1933~1997.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경남 사천에서 자랐다.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가,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 등이 추천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시집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천년의 바람"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대관령 근처" "해와 달의 궤적" "다시 그리움으로", 시조집 "내 사랑은", 수필집 "아름다운 삶의 무늬" 등이 있다.

한국시협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평화문학상, 중앙시조대상 등과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박재삼, 권상혁 / 작품 출처: 박재삼 시집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